영화 이야기

2017년 10월 23일 월요일

‘BPM’


션이 거리 시위에서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다.

1990년대 파리 동성애자들 AIDS 퇴치투쟁과 우정·사랑


영화제목 ‘BPM’은 심장의 박동률(Beats Per Minute)을 뜻하는 것으로 AIDS로 수많은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쓰러져가던 1990년대 파리에서 있었던 저항단체 ‘액트 업’(ACT UP)의 활동과 회원들 간의 투쟁과 우정과 사랑을 그린 훌륭한 드라마다.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있고 대사와 나오는 인물들이 너무 많고 근 2시간 반 가량의 상영시간을 이어가면서 폭발적인 마지막 30분이 오기 전까지 진행 속도가 다소 처지는 감이 있긴 하나 신념과 정열과 확신으로 가득 찬 급박하고 맹렬한 작품이다.
노골적인 동성애 장면이 있어 모든 사람에게 어필할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의미와 함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작중 인물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넘치는 감독의 배려가 가슴에 와 닿는다. 실제로 ‘액트 업’의 회원이었던 로빈 캄필로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AIDS에 감염되는 사람은 연 6,000명으로 이는 영국과 독일의 두 배가 되는 수치다. 이런데도 그 대응에 지지부진한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와 치료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 제약회사들에 저항하고 또 이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생긴 것이 ‘액트 업’이다. 
차분하고 실제적인 티보(앙트완 레나르)가 회장으로 있는 ‘액트 업’의 열띤 토론 장면으로 시작된다. 강경파와 온건파들 간에 격한 토론이 벌어진다. 영화는 많은 이런 토론 장면과 함께 회원들 간의 개인적 관계 그리고 이들이 겪는 공포와 무기력감 및 근접성과 서로 간에 보여주는 부드러움을 교차해 가면서 진행되는데 불쑥불쑥 격렬한 시위와 파괴 장면이 이에 섞여든다. 지적이요 감정적인 연출 솜씨인데 조금 지적인 쪽으로 기울고 있다. 
여러 인물들 중에 중심인물이라 할 만한 사람은 AIDA환자로 극단적인 션(나우엘 페레스 베스카야르)과 나산(아르노 발라). AIDS에 감염은 안 됐지만 단체에 새로 가입한 나산과 션은 서로가 첫 눈에 가까워지면서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과 육체적인 정열 그리고 션의 궁극적 죽음이 가슴 메어지게 절실하게 그려졌다.
이들은 시위와 함께 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콘돔을 나눠주고 또 고무 파우치에 가짜 피를 담아 제약회사에 쳐들어가 사방팔방에 뿌린다. 물론 경찰에 체포되나 이들에겐 그것이 오히려 큰 선전이 된다. 
AIDS로 인한 속도 느린 죽음이 처음으로 아이 같은 얼굴의 제레미(아리엘 브론스틴)를 통해 묘사되는데 이와 함께 션의 상태 악화가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자세히 그려진다. 션을 돌보기 위해 아파트까지 옮긴 나산의 사랑과 지극한 간호가 감동적이다. 갈수록 면역력이 떨어지는 션의 절규가 처절하다. 
조용하게 가슴을 때리고 들어오는 장면은 나오는 인물 들 중의 한 사람이 선택한 약물에 의한 자살. 감상적이지 않고 민감하게 처리됐는데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을 찾아온 조문객들의 슬픔이 배제된 클로스 업 된 얼굴들이 통곡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앙상블 캐스트의 조화와 극적 열기는 좋지만 그 반면 개개인의 묘사가 약화됐다. 그러나 베스카야르와 발라의 연기가 출중하다. 촬영과 박진한 전자음악도 좋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스노맨’(The Snowman)


형사 해리 호울은 자기 가족까지 위협하는 킬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눈사람 살인예고 ‘연쇄킬러’ 잡아라… 호화 출연진이 펼치는 스릴러


흐리고 춥고 눈 덮인 노르웨이를 무대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술꾼 형사와 아름다운 동료 여형사의 스산하고 으스스한 스릴러인데 보기에는 말끔하고 제대로 가다듬어졌으나 스릴러의 필요조건인 서스펜스와 스릴이 모자란다.
노르웨이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스웨덴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렛 더 라이트 원 인’)이 연출하고 국제적 올스타 캐스트가 나오는데 플롯과 대사가 어디서 많이 본 영화를 모방한 듯이 구태의연한데다가 배우들 간의 화학작용이나 연기도 탐탁치 못하다. 결정적 잘못은 범인이 누구인지를 영화 중간 쯤 가서 알 수 있는 것. 알프레드슨은 이런 부실을 감추려고 공연히 여러 가지 교란작전을 쓰고 있다. 
오슬로에서 젊은 어머니들이 살해된다. 범인은 살인 전에 표적의 집 앞에 눈사람을 만들어 놓는다. 이를 수사하는 형사가 줄담배에 호주가로 규칙을 무시하는 제멋대로 형의 해리 호울(마이클 화스벤더). 여기에 새로 전근 온 아름다운 여형사 카트린 브렛(레베카 퍼거슨)이 합류한다.
둘은 수사를 통해 현재 사건이 수십 년 전에 발생한 미제 살인사건들과 함께 오슬로 외의 다른 도시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캐낸다. 그리고 백만장자 사업가 아르베 스톱(J.K. 시몬즈)과 오래 전에 엽총 자살(?)한 또 다른 술꾼 형사 거트 라프토(발 킬머)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됐음도 드러난다.
호울은 이혼한 전처 라켈(샬롯 갱스부르)과 라켈의 아들과 다시 화해하려고 애를 쓰는데 킬러가 자기 가족을 위협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적으로도 킬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다. 이와 함께 브렛의 비밀도 밝혀진다. 브렛은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기 위해 킬러 체포에 매달린다.
그리고 살인자는 호울에게 편지를 보내 호울을 희롱한다. 통속적인 스릴러의 모양새를 지닌 마지막 부분에 이은 결말 처리도 미숙하다.
긴장감 있고 스릴 가득한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소재를 평범하게 처리해 심심하다. 인물들의 묘사도 깊이가 모자라는데 연기파인 화스벤더의 연기도 공연히 심각하다. 그와 퍼거슨 간의 콤비에도 열기가 부족하다.
이 밖에 희생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 클로에 세비니와 형사반장 역의 토비 존스 그리고 시몬즈와 갱스부르 등도 다 제대로 사용되질 못했다. 특히 어색한 것은 킬머(‘탑 건’)의 모습과 연기다. 오래간만에 보는데 자다 막 일어난 사람같이 군다. 그러나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시간 보내기엔 적당한 영화다. R등급. Universal.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하비의 ‘캐스팅 카우치’

할리웃에는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라는 말이 있다. 스튜디오의 막강한 권력을 쥔 사장과 제작자와 감독들이 배역을 미끼로 자기들의 사무실 카우치에서 젊은 여성 스타지망생들로부터 섹스를 제공 받은 것에서 온 말이다.  할리웃 황금기 콜럼비아사의 해리 콘 사장이 그 중 한 사람이다.
이 카우치는 할리웃의 생성과 함께 있어온 것으로 얼마 전에 만난 더스틴 호프만도 “50년 전에 내가 배우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그 것은 있었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캐스팅 카우치’ 얘기는 조지 페파드가 영화사사장으로 나와 자기에게 섹스를 제공한 여자들을 스타로 만들어주는 야한 드라마 ‘카펫배거스’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캐스팅 카우치’ 때문에 지금 할리웃의 뜨거운 화제 거리가 되고 있는 사람이 명제작자 하비 와인스틴(65^사진)이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지난 수십 년 간에 걸쳐 애슐리 저드, 그위니스 팰트로 및 앤젤리나 졸리 등 수많은 여배우들을 성적으로 희롱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와인스틴은 삽시에 인디영화의 거목에서 섹스치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와인스틴은 자기가 회장으로 있던 와인스틴영화사와 함께 아카데미로부터도 퇴출당했다.
와인스틴은 동생 밥과 함께 영화사 미라맥스의 창업주로 남들이 다루기를 꺼려하는 주제와 개인적 비전이 뚜렷한 감독의 영화를 서슴없이 만들면서 인디영화를 흥행서도 성공시킨 인디영화의 제우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영화들은 총 300여개의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는데 오스카 작품상을 탄 ‘영국인 환자’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 ‘시카고’ 및 ‘왕의 연설’ 등이 다 그의 영화들이다.
와인스틴은 자기 추행이 폭로되자 “나는 요즘과는 판이한 1960년대와 70년대의 풍토에서 자랐다”면서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는 옛날에 직장의 힘 있는 남자들이 자기 밑의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 풍토를 말한다. 1950년대와 60년대 맨해탄의 광고계 실태를 그린 TV시리즈 ‘매드 멘’을 보면 여자들은 비서직만 얻어도 큰 성공이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자기 상사에게 섹스를 제공하는 일은 당연지사로 그려졌다.
할리웃에서 권력 있는 남자들이 여배우들이나 부하 여직원들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일은 ‘공개된 비밀’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할리웃에선 와인스틴 스캔들로 인해 가슴이 섬뜩한 영화사 간부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런 일은 할리웃 뿐 아니라 미 산업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캐스팅 카우치’ 사건은 비단 할리웃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지난 2009년 떠오르는 스타 장자연이 매니저의 압력으로 감독을 비롯해 화사사장 등에게 섹스를 제공하고 술시중 등을 들다가 심한 우울증에 빠져 29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사건 후 한 인권단체가 여배우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조사대상 중 60%가 출세를 위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캐스팅 카우치’가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데는 명성과 부를 위해선 어떤 대가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일부 젊은 스타지망생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왕년의 할리웃에서 와인스틴과 같은 비행을 하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알프렛 히치콕이다. 히치콕은 자기 영화 ‘새들’과 ‘마니’에 기용한 금발미녀 티피 헤드렌에게 끈질기게 성적으로 추근거리다가 거절당했다. 내가 헤드렌과 만났을 때 그는 “그 후로 내 할리웃 생애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번 와인스틴 추행사건에 대한 희생자들의 폭로가 뒤늦은 이유도 이런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할리웃은 겉으로 보기엔 진보적이지만 또래들끼리 똘똘 뭉치는 폐쇄된 동네여서 한 배우가 영화사의 눈밖에 벗어나면 다른 영화사들로 부터도 금기인물 취급을 받게 마련이다. 이런 동네이니 만큼 동료의 비행을 알면서도 너도 나도 ‘나 모르쇠’하는 것도 관례처럼 됐다.
나는 와인스틴을 몇 차례 만났는데 스모선수 같은 체구에 위압적인 인상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사랑 하나만은 지극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왕년의 명제작자들로 영화 사랑이 극진했던 새뮤얼 골드윈, 데이빗 O. 셀즈닉, 대릴 F. 재눅 등에 비유 됐었다. 그러나 그는 성질이 고약해 욕설을 밥 먹듯이 내뱉고 자기 목표를 위해선 공갈과 협박도 서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유명해 여자들을 마구 더듬어도 된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에서 와인스틴의 추행은 사실 경악할 일도 아니다. 이번 스캔들로 할리웃에서 ‘캐스팅 카우치’가 완전히 사라질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이 동네의 물이 어느 정도 맑아질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0월 15일 일요일

‘아토믹 블론드’ 샬리즈 테론



“평소 액션영화 매료… 98% 대역없이 직접 촬영”


그래픽 노블이 원작인 ‘아토믹 블론드’에서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기 직전 소련 스파이 수중에 넘어간 영국과 미국 스파이들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회수하기 위해 베를린에 파견돼 총과 칼과 온 몸을 사용해 닥치는 대로 적을 처치하는 백금발의 영국 스파이 로레인 브러턴으로 나온 샬리즈 테론(42)과의 인터뷰가 LA인근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있었다. 오스카 수상자인 장신의 테론은 짧은 금발의 얼음처럼 차게 보이는 미녀로 가끔 상소리를 섞어가면서 질문에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는데 태도가 매우 도도하고 당당했다. 미소를 아끼면서 엄격하고 사무적인 자세로 질문에 대답해 거리감이 느껴졌다. 테론은 지난 2013년부터 역시 오스카 수상자인 배우이자 감독인 션 펜과 데이트를 시작해 2014년에 약혼을 했으나 다음 해 파혼했다.

-영화의 무대인 베를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베를린은 내가 좋아하는 유럽의 5대 도시 중의 하나다. 아름답고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중의 하나다. 나는 베를린 시민과 음식과 문화를 사랑하며 그 곳에서의 체류를 즐겼다. 실제로 베를린에서는 영화 내용과 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 도시는 영화에 사실감과 함께 무게를 주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준 액션 신은 어느 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굉장한 것인데 하기가 힘들었는가.
“육체적으로 얘기를 하는 영화란 점이 큰 도전이었고 그래서 그에 응전하려고 나온 것이다. 내가 발레 댄서였기에 더 그렇다. 데이빗 리치 감독은 액션을 위한 액션이 아니라 얘기를 위한 액션을 구사하면서 최대한으로 액션을 몰고 갔는데 그로 인해 난 온 몸이 쑤셔 아침에 촬영장에 와서도 차에서 내리질 못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몸은 기계처럼 액션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강함과 자신감을 갖게 됐다.”

-아시안 무술가로부터 훈련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렇다. 무술 실력이 대단한 여러 사람이 각기 자신들의 주특기를 가르쳐 주었는데 무술 선생들 중에 여러 사람들이 영화에 러시아 스파이로 나왔다. 그래서 그들을 상대로 액션을 하기가 편했고 또 단 한 건의 부상도 없었다. 액션은 일종의 댄스다. 상대와 호흡이 맞는 댄스는 하루 이틀에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 무술 선생이 아닌 생면부지의 스턴트맨들과 액션을 하면서는 실제로 그들이 내 발길질과 주먹질에 얻어맞기가 일쑤였다. 미안해서 술을 여러 병 사다줬다.”

백금발의 스파이 로레인이 공격하는 적을 때려 누이고 있다.
-요즘 들어 할리웃이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영화를 많이 만드는데 이 동네에 바야흐로 여성시대가 왔다고 보는가.
“그럴 수도 또 아닐 수도 있다. 그저 큰 파이의 한 조각을 먹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여성 액션영화로 내가 어렸을 때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시고니 위버가 나온 ‘에일리언’이다. 그러나 잠깐 유행하더니 다시 중단됐다. 꾸준하지가 못하다. 한 번 여성 액션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더 이상 안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인구상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도 많은데도 여성 액션영화가 남성 액션영화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은 뭔가 그른 일이다. 오래 동안 여자들은 액션을 안 좋아한다는 관념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인데 통계적으로는 여자들도 액션 비디오게임을 즐기고 격투기도 즐긴다고 나타났다. 내가 이 영화에 나온 것도 이런 영화를 관객으로서 보고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여자 스파이에게 자문을 구했는가.
“아니다. 영화 내용이 분명하고 또 내 역의 임무가 뚜렷해 그저 당시 상황과 영국 정보부 MI6의 여자 스파이 모습 등을 연구했을 뿐이다. 스파이의 개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매우 흥미 있는 사람들이다. 스파이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대부분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무모하고 변칙적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가 힘든 사람들이다. 이런 역을 한다는 것은 배우로서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어떤 운동을 하는가.
“난 매우 활동적인 사람으로 하이킹을 즐긴다. 나는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며 움직이고 무언가 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파워 요가 등 내 육체적 한계를 극도로 밀어 올리기를 좋아한다.”

-수많은 나쁜 남자들을 차고 때리고 죽이는 기분이 어땠는가.
“위험한 부분은 스턴트 대역이 했지만 이렇게 심한 육체적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일 뿐만이 아니라 뇌 속의 엔도르핀을 방출하는 것이요 정신적으로도 가공할 일이다. 자신을 강하게 느끼고 동작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지닌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내가 그런 싸움을 해보진 않았지만 기분은 매우 좋았다.” 

-이런 액션영화를 계속 만들 것인가.
“난 장르를 좋아하나 그것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난 좋은 얘기에 감동하고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몬스터’에선 체중을 40파운드를 늘렸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선 머리를 밀고 나온 것이다. 육체적인 것으로 얘기를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어서 난 늘 액션영화에 매력을 느꼈고 또 그것을 탐구하려고 했다. 내가 말없이 얘기를 한 첫 경험은 발레리나 때였다. 그 때 난 단순히 몸을 사용해 얘기를 했는데 그래서인지 난 아직도 육체로 얘기를 하는 것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촬영할 때 카메라를 얼마나 의식 하는가.
“연기한다는 것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를 역에 몰입시키는 것이다. 배우로서 가장 어려운 첫 번째 일은 자기만의 공간과 공연하는 배우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맺기 위해 그 밖에 자기 앞의 다른 모든 것 즉 조명과 촬영진과 카메라 등을 다 마음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완전히 역에 투자하고 가능한 한 사실적이 되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를 찍다가 다치진 않았는가.
“액션 훈련을 받을 때 이에 문제가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데이빗이 한 액션 장면을 쉬지 않고 8-9초 동안 찍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보통 액션 장면은 하나 찍는데 2초 정도 걸린다. 액션 장면은 그렇게 찍은 뒤 다 편집과정에서 짜맞추는 것이다. 데이빗의 의도대로 찍으려면 스턴트 대역을 쓸 수 없다. 좋은 액션 장면을 8-9초 동안 찍으려면 같은 사람이 계속해 움직여야 한다. 액션 장면의 98%는 나다.” 

-이젠 남자를 진짜로 때려누일 수가 있는가.
“모르겠다. 격투에는 진짜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싸운다는 것은 수학이다. 공격하기 전에 먼저 상대의 체중과 크기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셈해야 한다. 손을 써야 하느냐 아니면 무릎과 어깨와 팔꿈치를 써야 할 것인가를 다 셈해야 한다.”

-원작인 그래픽 노블을 읽었는가.
“아직 출판되지 않은 10페이지짜리를 읽었다. 난 인물이 마음에 들어 출연에 응했는데 영화의 인물과 원작의 인물은 육체적으로 서로 많이 다르다. 원작자와 후에 만났는데 그는 로레인을 자기 장모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말했다. 그래픽 노블 속의 로레인은 왜 그가 액션을 휘두르는 여자가 되었는가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는데 난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제임스 본드가 왜 액션을 휘두르는 남자가 되었는가에 대해 별 설명이 없는 것처럼 여자라고 해서 그 이유를 밝혀야 될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할리웃에선 보기 드물게 할 말은 꺼림없이 하는 여자로 알려졌는데.
“어머니 덕이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여자라는 것 때문에 결코 부정적이거나 무언가 하고픈 말이나 행동을 주저해선 안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난 10대 때 남아공의 시골에서 자랐는데 그 때 그곳 사람들은 늘 반쪽짜리 진실을 얘기하고 속삭이거나 거짓말 아니면 허황된 선전이나 하면서 살고 있었다. 난 이에 반발해 하고픈 말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죽을 때 어느 정도 진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브리드(Breathe)

로빈과 다이애나(왼쪽)가 케냐의 황혼 속에 사랑을 나누고 있다.

“윌체어로는 막을 수 없다” 사랑과 생존 투쟁기


소아마비 환자로 의사의 예견과 권유를 무시하고 병원에서 나와 특수 윌체어에 의지해 살면서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한 영국의 로빈 캐븐디쉬와 그를 옆에서 돕고 격려하고 또 사랑한 아내 다이애나 블랙커의 생존 투쟁기이자 순애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가슴 울리는 멜로드라마이지만 감상적이지 않고 진지하면서도 경쾌하고 밝고 맑게 그렸는데 영화가 너무 말끔하고 고운 것이 흠이라면 흠.
에디 레드메인이 오스카상을 탄 스티븐 호킹의 얘기 ‘모든 것의 이론’을 연상케 하는 이 영화는 배우인 앤디 서키스의 감독 데뷔작이다. 서키스는 ‘반지의 제왕’에서의 골룸 역과 ‘원숭이들의 혹성’ 시리즈에서 얼굴 표정과 움직임을 포착해 원숭이들의 리더인 시저를 연기한 배우로 연출 솜씨가 매우 스무스하다.
1950년대 중반 영국의 상류층 멋쟁이 로빈(앤드루 가필드)은 클럽하우스에서 크리켓을 하다 경기를 구경하던  아름다운 다이애나(클레어 포이)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다이애나도 마찬가지로 둘은 곧 결혼한다. 그리고 둘이 로빈의 업무차 케냐에 갔다가 로빈이 쓰러진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진단결과 악성 소아마비. 귀국한 로빈은 목 아래를 쓸 수 없게 되는데 의사는 몇 달 못 산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로빈과 다이애나는 의사의 권유를 무시하고 사랑과 삶의 의지와 용기로 똘똘 뭉쳐 감옥 같은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이 때부터 두 부부의 치열한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는데 이 투쟁의 주도자는 로빈이라기 보다 다이애나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다이애나의 얘기기도 하다.
로빈은 과학자 테디 홀(휴 본느빌)이 만든 호흡기가 부착된 윌체어를 타고 우선 집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즐기다가 이어 차량을 개조해 멀리 나들이를 가고 마침내는 비행기에 윌체어를 싣고 스페인 등 유럽 여행까지 즐긴다.
남편을 돌보는 다이애나에게 좌절과 어려움이 없을 리 없으나 그는 때로 좌절하고 지치고 화를 내다가도 곧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투지와 정성 그리고 밝은 성격으로 인해 이를 극복한다. 그리고 두 사람 간에 육체적 애정의 표시도 은근히 묘사되는데 물론 이런 애정의 행위는 전적으로 다이애나에 의해 표현된다.
로빈은 이어 산송장 취급받는 자기 같은 사람들을 위해 독일을 방문, 의사들 앞에서 이들의 편의와 권익을 위해 보다 진취적으로 대응해줄 것을 호소한다. 로빈은 영국에서 호흡기가 부착된 윌체어를 이용해 집 밖으로 나간 첫 사람이다. 그는 의사의 예견과는 달리 소아아비로 쓰러진 뒤에도 36년을 더 살았다.
늘 진지한 가필드(핵소 리지)와 넷플릭스 시리즈 ‘크라운’(The Crown)에서의 엘리자베스 여왕 역으로 급부상한 포이의 콤비가 보기 좋은데 두 사람의 인물이 빛과 그림자를 고루 섞어 묘사되진 못했다. 끝에 가서 손수건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로빈과 다이애나의 사랑을 반주하듯이 빙 크로스비가 부르는 ‘트루 러브’가 흐른다. PG-13.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외국인(The Foreigner)


민이 테러리스트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

“딸을 죽인 자들 절대 용서 못해”
   재키 챈의 정치색 짙은 액션스릴러”


재키 챈이 평소의 자기 스타일과는 달리 시종일관 찌무룩한 연기를 하면서 자기 딸을 죽인 자들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액션 스릴러로 물론 챈의 영화이니 만큼 그의 무술실력이 화면을 찢을 듯이 박력 있다. 챈은 인터뷰에서 자기는 단순히 액션배우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면서 이 영화가 드라마임을 강조했으나 그의 음울한 연기가 도무지 어색하기만 하다. 
액션 스릴러에 음모와 배신과 기만 그리고 테러가 있는 정치성이 다분한 영화인데 너무 정치적인 얘기를 많이 다뤄 주인공 챈의 액션은 다소 옆으로 밀려난 셈이다. 플롯이 황당무계하고 너무 여러 가지를 늘어놓아 산만하기는 하나 보고 즐길 만은 하다. 원작은 스티븐 레더의 소설 ‘차이나맨’.
런던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콴 곡 민(챈)이 딸을 차로 파티장인 식당에 내려놓은 직후 폭탄이 터지면서 딸이 죽는다. 이 테러는 북아일랜드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IRA(에레공화군)가 저지른 것. 
여기서부터 민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딸을 죽인 자들을 찾아 벨파스트로 간다. 그가 만난 사람은 전직 테러리스트에서 정치인이 돼 북아일랜드의 장관이 된 리암 헤네시(피어스 브로스난). 민은 헤네시에게 딸을 죽인 자들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요구하나 거절당한다. 
민이 헤네시의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사무실의 화장실이 폭파된다. 민은 중국에서 태어나 베트남에서 성장한 뒤 이어 미국으로 이주해 미군 특공대 요원으로 활약한 암살과 파괴의 전문가.  
이어 얘기는 권력과 평안을 위해 자기 이념을 팔아먹은 헤네시와 영국 정부와의 밀약과 혼외정사 및 IRA에서 이탈한 테러단체와의 협상 그리고 헤네시의 주변 인물들과 테러단체 내의 배신이 뒤섞이면서 심하게 정치 냄새를 풍긴다. 
헤네시는 집요한 민을 피해 경호가 엄한 시골 별장으로 몸을 피하나 민은 여기까지 따라와 인근 숲에서 야영을 하면서 계속해 헤네시의 일당을 공격한다. 그리고 마침내 민은 헤네시와 다시 정면으로 맞선다. 챈은 역시 액션이 어울리는 배우로 영화에서 대사를 말 할 때보다는 손과 발 그리고 온 몸을 사용해 액션을 구사할 때가 멋있다. 아일랜드 배우인 브로스난이 자기 뿌리로 되돌아와 차분한 연기를 잘 한다. 마틴 캠벨 감독. R.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K(왼쪽)와 덱카드가 자신들을 추격하는 적을 피해 도주하고 있다.


 횡설수설 스토리… SF 걸작 속편으론‘기대 이하’




리들리 스캇 감독이 만든 공상과학 느와르 미스터리 ‘블레이드 러너’(1982)의 속편으로 작년에 공상과학 영화 ‘도착’(Arrival)을 연출한 프랑스계 캐나다인 드니 비예뇌브가 감독했다. 심미적 깊이와 눈부신 외형미를 지닌 무드 짙은 영화로 문제는 드라마로서의 내용이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쏭달쏭 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과 함께 시각적 표현력이 ‘도착’과 닮았다.
상영시간이 164분이나 되는데 감독의 과다 과도한 욕심이 마치 ‘마더!’를 만든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그 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시각적 효과와 기술적 면이 일사불란한 서술과 내용 설명을 압도하는 작품으로 이런 안과 밖의 불균형 때문에 보기가 피곤하다. 
영화의 첫 1시간 동안은 거의 별 일이 안 일어나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냥 춥고 어둡게 아름다운 무드와 눈부신 시각미를 감상하면서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며 참아야한다. 오염과 인구 과밀 그리고 악화된 기상 속의 2049년 캘리포니아. 과묵하고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표정과 자세를 지닌 LA경찰 K(라이언 가슬링)는 달아난 구형 인조인간 넥서스 8을 잡아내는 일에 매어 달린다. 
지금은 넥서스 8대신 눈 먼 재벌 니안더 월래스(재레드 레이토)가 생산한 신형 인조인간 넥서스 9이 인간에게 서비스를 하는데 K에겐 조이(아나 데 아르마스)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넥서스 9 애인이 있다. 그런데 K가 도주한 넥서스 8 인조인간 중 하나인 새퍼(데이빗 바우티스타)를 추적, 체포하는 과정에서 넥서스 8들과 관련된 비밀을 발견하면서 K는 이 비밀의 근원을 찾으려고 집착한다.         
오래 전에 인조인간이 임신을 했으며 그 결과 태어난 인간(또는 반인간 반 인조인간)이 어딘가에 있다는 풍문(?)의 진위여부를 밝히려는 K에게 그의 상관 조시(로빈 라이트)는 그것은 허위라고 말하나 K는 이를 안 믿는다. 이런 K를 방해하는 사람이 월래스의 살인적 하수인 인조인간 러브(실비아 혹스).    
철학적 종교적 의미마저 지녔다는 듯이 심각하게 구는 얘기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는데 이런 횡설수설로 보는 사람을 혼란에 빠트리던 영화는 전편 끝에서 사라진 LA경찰 덱카드(해리슨 포드)를 K가 찾아내면서 비로소 활기를 띄게 된다. 그리고 K와 인조인간 생산의 비결을 알고 있는 덱카드는 추격하는 러브와 그의 졸개들을 피해 도주하면서 인조인간으로부터 태어난 생명체를 찾아 나선다. 
덱카드가 전편에서 사랑했던 예쁜 인조인간 도망자로 나온 션 영이 30년 전 모습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덱카드가 은신한 거대한 저택 정문 유리창에 ‘행운’이라고 한글로 적혀있다.
뛰어난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의 이미지야말로 눈부시기가 짝이 없고 프로덕션 디자인과 의상 등도 훌륭하다. 그리고 음악도 세계 종말적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시작 된지 2시간이 지나서야 나온 포드가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그 때까지 침울한 표정으로 심각해하던 가슬링을 압도한다. R. WB.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우리 사이의 산(The Mountain Between Us)


벤이 부상한 알렉스를 이끌고 하산하고 있다.

경비행기 추락에서 살아남은 두 남녀
록키 설경 위 펼쳐지는 생존기 로맨스


백설이 만건곤한 록키산 꼭대기에 추락한 경비행기의 두 남녀 생존자의 생존투쟁과 로맨스를 그럴싸하게 접목한 얘기로 내용이 다소 억지이고 어처구니도 없지만 경치와 스타파워를 즐기면서 시간 보내기엔 안성맞춤인 영화다. 특히 여성 팬들이 좋아하겠는데 깊이는 없다.
할리웃 영화이니 만큼 결말이 어떻게 될지 자명한데도 공연히 꼼수를 쓰면서 멜로드라마의 극치를 밟고 있지만 이런 여러 단점들은 매력적인 두 수퍼스타 케이트 윈슬렛과 이드리스 엘바의 찰떡궁합으로 인해 눈감아주게 된다. 저 두 사람이 살아나 결합되기만을 바라게 된다.
겨울 악천후로 솔트레이공항에서 항공편이 취소된 알렉스(윈슬렛)와 벤(엘바)은 경비행기를 대절한다. 알렉스는 사진저널리스트요 영국인인 벤은 볼티모어에 본부를 둔 신경외과의. 알렉스는 곧 결혼식을 앞두고 있고 벤은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비행기에는 조종사의 애견이 동승했다. 
그런데 악천후를 뚫고 비행하던 조종사(보 브리지스)가 심장마비를 일으키면서 비행기가 사방이 눈으로 덮인 록키산 꼭대기에 추락한다. 이 추락으로 알렉스는 한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으나 기내에 비상의료함이 있고 벤이 의사이니만큼 응급처치가 돼 다리를 절긴 하나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식량. 그러나 이 식량문제도 처음에는 알렉스가 자기를 공격하는 쿠가를 비상용 신호총으로 사살해 해결된다. 그리고 둘은 구출을 기다리느냐 아니면 하산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다투다가 하산을 결정한다. 걷고 또 걷고 가다가 지치면 동굴에서 자고 추우니까 둘이 꼭 껴안으면서 둘 사이에 모락모락 사랑의 기운이 솟아오른다.
영화는 가끔 유머도 섞어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스릴을 부추기나 둘이 어떻게 될지 뻔해 긴장감이나 스릴은 없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윈슬렛은 얼굴이 곱기만 한데 개를 포함해 셋이 뭘 먹으며 하산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정 급하면 개를 잡아먹겠지만 개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미국이니 만큼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캐나다에서 찍은 설경 하나만해도 볼만한 영화로 감독은 둘 다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패라다이스 나우’와 ‘오마르’를 연출한 팔레스타인 태생의 하니 아부-아사드. PG-13. Fox.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글로리아 그램


흑백영화의 빅 스타로 오스카 수상자인 글로리아 그램(사진)은 스크린의 전설적인 팜므 파탈이었다. 탄력 있고 곡선을 한 몸매에 심술이라도 난 듯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남자를 도전적으로 응시하는 모습이 약간 맹한 소녀 같아 그 자극성이 자못 치명적인 스타였다. 얼굴이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 수전 헤이워드를 좀 닮았다.
그램은 필름 느와르의 여주인공의 특징인 불가항력의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타락한 미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해 범죄영화에 많이 나왔다. 그가 처음으로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오른 ‘크로스화이어’(Crossfire^1947)도 범죄영화다.
그램은 실제 삶도 자기 영화들만큼이나 극적이었는데 삶의 마지막 2년 남짓한 기간을 자기보다 28세나 어린 청년과 정염을 불사르다 사망,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무대배우 출신인 그램은 스크린 스타로서 완전히 한물간 지난 1978년 56세 때 연극으로 재기하려고 영국에 와 리버풀에 머물다가 당시 28세인 연극배우 지망생 피터 터너를 만나 그를 자기 애인으로 삼았다.
둘의 뜨거운 정열로 시작된 관계는 보다 깊은 사랑과 이해의 관계로 이어지고 그램은 터너로부터 위안을 찾으면서 삶의 욕망을 다시 불태우게 됐다. 그러나 이 메이-디셈버 로맨스는 그램의 유방암이 재발해 1981년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끝이 났다. 그램은 귀국해 뉴욕의 병원에 입원한지 몇 시간 뒤에 57세로 사망했다.     
이 얘기가 아넷 베닝과 제이미 벨 주연으로 ‘영화 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오는 12월 15일에 개봉된다. 터너의 자전을 바탕으로 폴 맥귀간이 감독한 이 로맨스 드라마에서 볼만한 것은 베닝의 연기다.
베닝은 그램의 태도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고 민감하며 또 연민을 갖게 만드는 연기로 그램의 분위기를 잘 살려 마치 오래간만에 그램을 스크린에서 재회하듯이 기쁨에 젖게 된다.
그램의 절정기는 1952년이었다. 이 해 그는 조운 크로포드와 잭 팰랜스가 공연한 서스펜스 스릴러 ‘서든 피어’(Sudden Fear)와 오스카 작품상을 탄 올스타 캐스트의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 및 ‘악인과 미녀’(The Bad and the Beautiful) 등에 출연했다.
‘악인과 미녀’는 커크 더글러스, 라나 터너, 딕 파웰, 월터 피전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나오는 할리웃의 내막을 파헤친 명작이다. 이 영화에서 그램은 각본가 파웰의 아내로 나와 오스카 조연상을 탔는데 그램이 스크린에 나온 시간은 달랑 10분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램은 영화에서 대부분 조연이었는데 많은 역이 끼 있고 간계를 꾸미는 남자 잡는 암커미 같은 것.
뭇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그램은 생애 모두 네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이 제임스 딘이 나온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1955)을 감독한 할리웃의 이단자 니콜라스 레이다. 그램은 레이가 감독한 명작 드라마 ‘고독한 곳에서’(In a Lonely Place^1950)에서 살인 누명을 벗으려고 애쓰는 할리웃의 각본가 험프리 보가트의 애인인  떠오르는 스타로 나왔다.
격정적이요 과격한 여인이었던 그램은 레이와 결혼 4년 만에 이혼했는데 그 이유가 가히 태블로이드 감이다. 그램은 레이의 전처의 아들 앤소니가 13세 때 그와 정사를 나눴는데 레이가 자기 아들과 그램이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면서 결혼 생활이 끝났다. 그리고 헤어졌던 그램과 앤소니는 그램이 세 번째 남편과 이혼한 뒤 재회, 결혼해 남매를 뒀는데 그램은 앤소니와도 이혼 했지만 둘의 관계가 네 남편 중 가장 길었다. 둘의 관계는 우디 알렌과 순이의 그 것과 같다.       
그램은 1953년 둘 다 프리츠 랭이 감독하고 글렌 포드가 주연한 ‘빅 히트’(The Big Heat)와 ‘인간의 욕망’(Human Desire)에 나왔다. ‘인간의 욕망’은 에밀 졸라의 소설 ‘인간 짐승’(La Bete Humaine)이 원작이다. 그러나 그램의 생애는 뮤지컬 ‘오클라호마!’(Oklahoma!^1955)에 나온 뒤로 내리막길로 치달리면서 할리웃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순진의 가면을 쓴 요부 같은 그램의 얼굴을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든 영화가 ‘빅 히트’다. 가차 없이 살벌하고 폭력적인 필름 느와르로 그램은 여기서 범죄단 두목의 오른 팔로 촌티가 뚝뚝 흐르는 무자비한 갱스터 빈스 스톤(리 마빈)의 애인 데비 마쉬로 나온다. 그런데 스톤이 자신이 연루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데이브 배니언(글렌 포드)과 마쉬가 만났다는 것을 알고 마쉬의 얼굴에 펄펄 끓는 커피 팟의 커피를 들이 붓는다. 이로 인해 마쉬의 왼쪽 얼굴 전체에 처참한 흉터가 남는다. 얼굴 반쪽은 예쁘고 다른 반쪽은 흉측해 괴이하게 매력적이었다. 
이 장면이야 말로 할리웃 영화사에 짐승 같은 남자가 연약한 여자에게 행한 가장 잔혹한 행위로 남아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서울 시청 앞에 있던 경남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충격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 후 나는 그램의 도발적이요 선정적인 유혹에 이끌려 그의 팬이 되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0월 1일 일요일

‘아메리칸 메이드’(American Made)

배리 실이 콘트라반군에게 전달할 무기를 비행기로 나르고 있다.

‘탑 건’서 밀수 조종사로… 탐 크루즈의 범죄 액션


100만 달러짜리 미소를 지닌 만년 소년티가 나는 탐 크루즈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중남미를 오락가락하면서 마약과 총과 현찰을 수송, 수수료조로 떼돈을 버는 코미디기가 있는 범죄 액션 스릴러로 경쾌하고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다. 
1980년대 레이건의 하수인인 올리버 노스 대령이 주도한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개입했던 에이스 조종사 배리 실의 실화에 허구를 잔뜩 입힌 비도덕적인 배달꾼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대담무쌍한 모험 얘기다. 
아메리칸 드림의 하나인 황금만능주의를 풍자한 얘기이기도 한데 여러 가지 정치적 스캔들을 깊이 파헤치기보다 피상적으로 다루면서 재미 일변도의 영화로 만들어 주인공도 만화 속 인물처럼 묘사되긴 했으나 오락영화로선 A급이다.
얘기는 실이 자기 과거를 고백한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내레이션을 하면서 진행된다. 1970년대. 아내 루시(새라 라이트)와 두 아이를 둔 실(크루즈)은 TWA 조종사로 부업으로 쿠바 시가를 밀반입해 돈을 번다. 
이를 파악한 CIA로부터 몬티 셰이퍼(돔날 글리슨)가 실을 찾아와 시가 밀반입을 눈감아주는 대신에 임무를 지시한다. CIA가 제공한 프로펠러 비행기로 파나마로 날아가 노리에가 대령에게 현찰을 주고 정보를 받아오는 일. 
실의 잦은 중부 아메리카 비행이 콜롬비아의 메데인 마약 카르텔에 의해 포착이 되고 이 카르텔의 두 두목 호르헤 오초아(알레한드로 에다)와 파블로 에스코바르(마우리시오 메이아)는 실을 붙잡아 미국으로 코케인 수송을 지시한다. 그리고 실에게 코케인 킬로 당 2,000달러를 지불한다. CIA의 묵인 하에 실은 코케인 밀반입으로 엄청난 돈을 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이런 밀반입 수송으로 떼돈을 벌던 실은 마약단속국에 걸리지만 셰이퍼가 개입해 풀려난다. 그리고 메데인 카르텔로부터 손을 뗀 실은 CIA에 의해 거주지를 바톤 루지로부터 아칸소주의 작은 마을 메나로 옮긴다. 집과 함께 개인 비행장이 있는 2,000에이커의 땅주인이 된 실은 밀반입으로 번 현찰이 너무 많아 창고에 쌓아두다 못해 집 마당에 나무를 심듯 구덩이를 파고 감춘다. 
셰이퍼는 이번에는 실에게 니카라과 좌파정부에 저항하는 콘트라 반군들에게 무기를 전달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줄 타는 곡예사처럼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을 잘도 피해 다니던 실은 결국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된다. 크루즈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약삭빠른 비도덕적인 인간의 연기를 잽싸게 해낸다. 덕 라이만 감독. R. Universal.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마크 펠트: 백악관을 무너뜨린 남자’(Mark Felt: The Man Who Brought Down the White House)

워싱턴 포스트에 정보를 제공하는 마크 펠트.

워터게이트 사건 제보‘딥 스로트(Deep Throat)’ 정체는 바로…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인해 닉슨이 하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FBI 부국장 마크 펠트에 관한 실화로 정석 전기영화의 틀을 밟은 드라마다. 너무 고지식하게 직선적이어서 딱딱한 강의를 듣는 기분이지만 미국 정치사의 희대의 스캔들을 돌아보는 흥미는 있다.
펠트 역의 리암 니슨이 견실한 연기를 하는데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은 지극히 피상적으로 그려졌다. 따라서 니슨의 독무대이다시피 해 극적 다양성이 모자라고 강한 충격도 없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그 내막을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의 얘기를 다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 흥미진진하게 묘사된 바 있다.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펠트인데 그의 암호명은 ‘딥 스로트’(Deep Throat)였다. ‘딥 스로트’는 최초로 극적 구성을 한 빅 히트 포르노영화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영화는 닉슨의 첫 번째 임기 말년에 시작된다. 펠트는 경력 30년의 베테런으로 정의감이 강하고 FBI의 독립성을 철저히 강조하는 사람으로 그는 FBI를 ‘세계에서 최고로 존경 받는 기관’으로 여긴다. 그래서 백악관을 비롯한 외부기관의 내부간섭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다.
수십 년간 FBI 국장직을 맡았던 후버가 사망하고 모두가 당연히 국장직을 승계하리라고 생각했던 펠트를 제치고 닉슨은 법집행 경력이 전무하나 자기에게 충실한 L. 패트릭 그레이(마턴 시소카스)를 임명한다. 이어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지면서 펠트가 이를 수사하자 닉슨의 보좌관인 존 딘(마이클 C. 홀)과 그레이는 펠트에게 수사를 빨리 종결지으라고 압력을 넣는다.
그러나 FBI의 독립성과 진실과 정의에 집착하는 펠트는 이를 무시하고 수사를 계속하면서 백악관이 FBI를 훼손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에 분노, 자신의 수사정보를 우드워드에게 전달한다. 이런 과정이 매우 스릴이 있어야 하는데도 너무 평범하게 처리돼 심심하다.
곁가지로 펠트의 좌파 무장저항단체 웨더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대처가 묘사되나 별 의미가 없다. 펠트가 이 단체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의 가출한 딸이 이 단체의 일원일지도 모른다는 이유 탓이다.
펠트가 고발자 역을 자임한 것이 승진하지 못한데 대한 반감 탓일지도 모른다는 기색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그의 정의와 진실 그리고 FBI에 대한 사랑을 그 이유로 그리고 있다. 펠트의 아내 오드리로 다이앤 레인이 나온다. 피터 란데스만 감독. PG-13. Sony.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레베카’디지털로 복원


캡션 추가

대저택 떠도는 죽은 부인의 망령… 히치콕 스릴러물


알프레드 히치콕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데이빗 O. 셀즈닉과 계약을 맺고 미국에 진출해 만든 첫 작품으로 로맨틱하고 강렬한 심리 로맨스 드라마다. 히치콕과 셀즈닉은 영화를 만들면서 의견 대립이 심했는데 히치콕은 이 영화 이후 계약 때문에 셀즈닉의 영화들인   ‘망각의 여로’(Spellbound·1945)와 ‘패라다인 케이스’(The Paradine Case·1948) 등 2편을 더 만들고 둘이 헤어졌다.
영화는 또 귀신 이야기이자 살인 미스터리 분위기를 지닌 분위기 스산하면서도 우아한 흑백 명작으로 대프니 뒤 모리에의 1938년 작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작품상과 감독상 등 모두 11개 부문에 오스카상 후보에 올라 작품상과 촬영상을 탔다. 남우주연(로렌스 올리비에), 여우주연(조운 폰테인), 여우조연(주디스 앤더슨) 및 각색상 등이 오스카 수상 후보에 올랐었다. 
폰테인은 후에 이 영화와 분위기가 매우 비슷한 ‘제인 에어’(Jane Eyre·1944)에도 주연했다. 이 흑백영화는 샬롯 브론테가 쓴 동명소설이 원작으로 ‘레베카’처럼 서민층의 젊은 여자와 ‘손필드 홀’이라는 음습한 기운을 내뿜는 대저택을 소유한 지체 높고 정체가 신비한 중년 남자 미스터 로체스터의 사랑을 그렸는데 로체스터로 오손 웰즈가 나온다.   
시종일관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 서술되는 신비하고 비가적인 사랑의 이야기로 특이한 것은 제목의 레베카는 남자 주인공 맥심 드 윈터의 첫 아내로 얘기가 시작되기 전에 죽어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영화의 주인공인 여자는 이름이 없다는 것.
그런데 이 죽은 여자 레베카는 영화 전편을 통해 맥심과 그의 젊은 두 번째 아내 그리고 레베카의 충실한 하녀였던 댄버스 부인(앤더슨)을 집요하게 군림한다. 
이름 없는 순진한 젊은 여자(폰테인)는 돈을 받고 나이 먹은 귀부인 이디스 밴 호퍼의 동반자가 되어 몬테 칼로로 여행을 갔다가 귀족가문의 멋쟁이로 침울한 남자 맥심 드 윈터(올리비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만난 지 2주 만에 결혼해 콘월의 맥심의 고풍 창연한 저택 ‘맨덜레이’로 온다. 귀신 들린 집과도 같은 ‘맨덜레이’가 영화에서 사람만큼이나 중요한 구실을 한다.  
새 부인을 맞는 사람이 차갑고 도도한 레베카의 하녀 댄버스 부인으로 사망한 레베카에게 아직도 그가 살아있는 듯이 집착하는 댄버스 부인은 드 윈터 부인을 냉정히 영접한다. 댄버스 부인 역의 주디스 앤더슨이 소름끼치는 사악한 연기를 한다. 
그런데 드 윈터 부인은 ‘맨덜레이’ 곳곳에 레베카의 존재와 흔적이 뚜렷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집의 매스터 베드룸 문과 레베카가 쓴 문필도구와 손수건 그리고 침대의 린넨 쉬트 등에 레베카의 두문자 ‘R‘과 드 윈터의 부인을 뜻하는 ‘R de W’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댄버스 부인은 새 부인에게 수시로 레베카의 미와 우아함과 세련미 및 지성에 대해 얘기해 드 윈터 부인은 레베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된다. 
이로 인해 드 윈터 부인은 가끔 자기에게 별 이유도 없이 크게 화를 내는 남편과의 관계에 의심을 갖게 되나 그가 아직도 자기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이어 드 윈터 부인은 남편이 ‘맨덜레이’를 비운 사이 집을 방문한 소위 ‘제일 좋은 사촌’이라 불리는 잭 화벨(조지 샌더스)을 만난다. 과연 화벨은 누구인가. 
레베카의 망령에 시달리던 드 윈터 부인은 마침내 댄버스 부인과 정면 대결을 하고 남편으로부터도 레베카와의 결혼생활이 외부에서 보았듯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레베카의 방종하고 부도덕한 생활 스타일의 희생자였다는 고백을 받아낸다. 그리고 레베카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남편이 첫 아내가 아니라 자기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드 윈터 부인은 그 동안의 소녀처럼 순진하던 삶의 태도를 내던지고 ‘맨덜레이’의 안방 주인 노릇을 시작하면서 아울러 레베카의 죽음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남편의 충실한 조언자 역을 떠맡는다. 
광기에 휩싸인 댄버스 부인에 의해 ‘맨덜레이’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댄버스 부인은 무너져 내린 천장에 깔려 죽고 영화는 레베카의 침대에 놓인 비단 잠옷 케이스에 새겨진 ‘R’자가 불길에 타면서 끝난다. 순진하고 겁먹은 모습의 폰테인의 연기와 허점이 많은 남자의 연기를 교활하도록 기민하게 해낸 올리비에의 연기가 훌륭하다.  ‘레베카’가 새로 4K 디지털로 복원돼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