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의 빅 스타로 오스카 수상자인 글로리아 그램(사진)은 스크린의 전설적인 팜므 파탈이었다. 탄력 있고 곡선을 한 몸매에 심술이라도 난 듯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남자를 도전적으로 응시하는 모습이 약간 맹한 소녀 같아 그 자극성이 자못 치명적인 스타였다. 얼굴이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 수전 헤이워드를 좀 닮았다.
그램은 필름 느와르의 여주인공의 특징인 불가항력의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타락한 미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해 범죄영화에 많이 나왔다. 그가 처음으로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오른 ‘크로스화이어’(Crossfire^1947)도 범죄영화다.
그램은 실제 삶도 자기 영화들만큼이나 극적이었는데 삶의 마지막 2년 남짓한 기간을 자기보다 28세나 어린 청년과 정염을 불사르다 사망,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무대배우 출신인 그램은 스크린 스타로서 완전히 한물간 지난 1978년 56세 때 연극으로 재기하려고 영국에 와 리버풀에 머물다가 당시 28세인 연극배우 지망생 피터 터너를 만나 그를 자기 애인으로 삼았다.
둘의 뜨거운 정열로 시작된 관계는 보다 깊은 사랑과 이해의 관계로 이어지고 그램은 터너로부터 위안을 찾으면서 삶의 욕망을 다시 불태우게 됐다. 그러나 이 메이-디셈버 로맨스는 그램의 유방암이 재발해 1981년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끝이 났다. 그램은 귀국해 뉴욕의 병원에 입원한지 몇 시간 뒤에 57세로 사망했다.
이 얘기가 아넷 베닝과 제이미 벨 주연으로 ‘영화 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오는 12월 15일에 개봉된다. 터너의 자전을 바탕으로 폴 맥귀간이 감독한 이 로맨스 드라마에서 볼만한 것은 베닝의 연기다.
베닝은 그램의 태도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고 민감하며 또 연민을 갖게 만드는 연기로 그램의 분위기를 잘 살려 마치 오래간만에 그램을 스크린에서 재회하듯이 기쁨에 젖게 된다.
그램의 절정기는 1952년이었다. 이 해 그는 조운 크로포드와 잭 팰랜스가 공연한 서스펜스 스릴러 ‘서든 피어’(Sudden Fear)와 오스카 작품상을 탄 올스타 캐스트의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 및 ‘악인과 미녀’(The Bad and the Beautiful) 등에 출연했다.
‘악인과 미녀’는 커크 더글러스, 라나 터너, 딕 파웰, 월터 피전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나오는 할리웃의 내막을 파헤친 명작이다. 이 영화에서 그램은 각본가 파웰의 아내로 나와 오스카 조연상을 탔는데 그램이 스크린에 나온 시간은 달랑 10분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램은 영화에서 대부분 조연이었는데 많은 역이 끼 있고 간계를 꾸미는 남자 잡는 암커미 같은 것.
뭇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그램은 생애 모두 네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이 제임스 딘이 나온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1955)을 감독한 할리웃의 이단자 니콜라스 레이다. 그램은 레이가 감독한 명작 드라마 ‘고독한 곳에서’(In a Lonely Place^1950)에서 살인 누명을 벗으려고 애쓰는 할리웃의 각본가 험프리 보가트의 애인인 떠오르는 스타로 나왔다.
격정적이요 과격한 여인이었던 그램은 레이와 결혼 4년 만에 이혼했는데 그 이유가 가히 태블로이드 감이다. 그램은 레이의 전처의 아들 앤소니가 13세 때 그와 정사를 나눴는데 레이가 자기 아들과 그램이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면서 결혼 생활이 끝났다. 그리고 헤어졌던 그램과 앤소니는 그램이 세 번째 남편과 이혼한 뒤 재회, 결혼해 남매를 뒀는데 그램은 앤소니와도 이혼 했지만 둘의 관계가 네 남편 중 가장 길었다. 둘의 관계는 우디 알렌과 순이의 그 것과 같다.
그램은 1953년 둘 다 프리츠 랭이 감독하고 글렌 포드가 주연한 ‘빅 히트’(The Big Heat)와 ‘인간의 욕망’(Human Desire)에 나왔다. ‘인간의 욕망’은 에밀 졸라의 소설 ‘인간 짐승’(La Bete Humaine)이 원작이다. 그러나 그램의 생애는 뮤지컬 ‘오클라호마!’(Oklahoma!^1955)에 나온 뒤로 내리막길로 치달리면서 할리웃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순진의 가면을 쓴 요부 같은 그램의 얼굴을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든 영화가 ‘빅 히트’다. 가차 없이 살벌하고 폭력적인 필름 느와르로 그램은 여기서 범죄단 두목의 오른 팔로 촌티가 뚝뚝 흐르는 무자비한 갱스터 빈스 스톤(리 마빈)의 애인 데비 마쉬로 나온다. 그런데 스톤이 자신이 연루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데이브 배니언(글렌 포드)과 마쉬가 만났다는 것을 알고 마쉬의 얼굴에 펄펄 끓는 커피 팟의 커피를 들이 붓는다. 이로 인해 마쉬의 왼쪽 얼굴 전체에 처참한 흉터가 남는다. 얼굴 반쪽은 예쁘고 다른 반쪽은 흉측해 괴이하게 매력적이었다.
이 장면이야 말로 할리웃 영화사에 짐승 같은 남자가 연약한 여자에게 행한 가장 잔혹한 행위로 남아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서울 시청 앞에 있던 경남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충격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 후 나는 그램의 도발적이요 선정적인 유혹에 이끌려 그의 팬이 되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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