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1월 26일 화요일

‘이키루’




나는 신문을 볼 때면 꼭 부음을 읽는다. 우선 내가 어느덧 나이를 먹어 죽음을 낯설어하지 말아야 할 때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나이 또래의 어느 지인이 별세했는지도 궁금해서이다. 그런데 부음을 읽다보면 씁쓸한 심정이 들곤 한다. 부음란에 난 고인들은 다 살았을 때 ‘장’자리 하나 정도는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서도 신분에 층이 있는가 하는 생각에 입맛이 써지곤 한다.
그런데 당신은 앞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는다면 그 기간에 무엇을 하겠는가. 도쿄 달동네 구청의 시민과장 와타나베 간지는 모기가 들끓는 동네 시궁창을 덮고 그 위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짓는다. 와타나베는 일본의 명장 쿠로사와 아키라의 죽음을 통한 삶의 확인을 연민의 마음으로 그린 ‘이키루’(Ikiru·1952)의 주인공이다.
인간은 미련해서 죽음을 맞아서야 삶을 추스르는데 평생을 공무원 생활을 한 와타나베도 의사로부터 위암으로 앞으로 6개월밖에 못 산다는 통고를 받고나서야 사람다운 삶을 시작한다. ‘이키루’(산다는 뜻)는 와타나베의 숨 막힐 것 같은 무기력한 삶으로부터 역동적 인간에로의 변신을 우수와 비감 속에 생명 찬가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쿠로사와의 영화이기도 하다.
홀아비로 불효자식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사는 와타나베(시무라 타카시)는 30년간을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산 공무원. 국화빵 찍어내듯이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 퇴근시간 확인하느라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미라의 모습이나 진배없다.
이런 와타나베가 사망선고를 받으면서 비로소 자기가 지난 30년간을 헛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그 헛것과 함께 다가올 죽음에 대한 갚음으로 동네 아주머니들의 숙원인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건설에 집념하면서 행동의 인간이 되고 실존적 인물로 변용된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놀이터 건설에 앞서 생전 처음으로 우선 세상환락을 경험한다. 와타나베는 허름한 사케 집에서 만난 2류 작가(이토 유노스케)의 안내로 밤의 유흥가를 섭렵한다. 클럽과 바와 홍등가로 와타나베를 안내하는 작가가 마치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메피스토 같은데 와타나베가 들른 클럽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는 “인생은 짧은 것”을 듣노라면 가슴에 멍울이 생긴다. 이 와타나베의 환락가 구경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 기법으로 촬영한 눈부신 부분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던 와타나베는 자신의 젊은 부하 여직원 오다기리 토요(오다기리 미키)를 만나면서 비로소 생명력의 원천을 발견하게 된다. 와타나베는 오다기리에게 부탁해 둘이 함께 빠찡꼬장과 아이스스케이트장 그리고 요리 집과 극장엘 다니면서 여인의 젊음을 동경하고 또 희열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경직된 관료체제에 막혀 손도 채 대지 못했던 놀이터 건설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이렇게 삶의 목표를 찾은 와타나베는 그제야 평소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아름다움마저 깨닫는다. 와타나베는 어느 날 석양을 바라보면서 “아, 참 아름답구나. 난 30년간 황혼을 보지 못 했어”라고 찬탄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짧은 6개월의 삶을 충분하고 평화롭게 마감한다. 그가 죽기 얼마 전 눈 내리는 겨울밤 완공이 가까운 놀이터의 그네를 타면서(사진) “인생은 짧은 것”을 부르는 모습에서 후회 없이 만족하게 산 사람의 아름다움이 어둠 속의 촛불같이 빛난다.
‘이키루’는 2부작 형식으로 구성됐다. 전반부는 와타나베의 고리타분한 일상을 그렸고 후반부는 와타나베의 장례식. 장례식의 조문객들이 와타나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의 변신의 원인을 자기들 마음대로 추측한다. 그리고 술에 취한 구청직원들은 “앞으로 잘 해보자”고 다짐하나 이튿날 출근해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영화는 일본의 고여 있는 관료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기도 하다.
죽음에 맞선 삶의 긍정에 관한 이 영화는 동양철학이기도 한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이 사는 방법을 배우는 길이라는 것을 단순하고 조용하게 말하고 있다. 부정 속의 긍정이라고 하겠다.
이런 와타나베의 변신을 시무라는 감지하기 어렵도록 심오하게 표현한다. 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야 말로 진짜 사람의 얼굴이다. 시무라는 ‘7인의 사무라이’를 비롯해 쿠로사와의 여러 편의 영화에 나온 쿠로사와의 단골배우다.
‘이키루’가 23일(하오 7시30분) 쿠로사와의 1950년도 베니스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라쇼몬’(Rashomon)과 함께 이집션극장(6712 할리웃)에서 상영된다. 한편 ‘이키루’의 블루-레이판이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출반됐다.
나는 얼마 전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생의 마감 앞에서 와타나베가 될 수 있는가.’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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