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1월 4일 월요일

대통령이 될 뻔했던 지휘자




1991년부터 2002년까지 11년간 뉴욕 필을 이끌며 이 세계 굴지의 교향악단의 오랜 연주 태도인 날이 선 외형미에 대한 치중을 지양하고 보다 따스하고 쾌적한 소리를 만들어낸 상임지휘자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사진)가 지난달 19일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서 88세로 타계했다. 마주어는 주빈 메이타의 바톤을 이어 받아 뉴욕 필을 맡은 이래 이 교향악단과 청중을 크게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욕 필은 웅장하고 윤곽이 뚜렷한 음악을 창조하는 악단이면서도 단원들의 성질이 까다로운 데다가 콧대가 높아 지휘자를 산 채로 잡아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음악 전문가들은 마주어가 뉴욕 필의 지휘자가 되면서 작품의 감정을 물 흐르듯 함으로써 작품이 스스로 숨 쉬고 노래하도록 고전음악의 전통적 의미를 되찾아 주었다고 평가한다. 즉 그는 모든 음표가 다 들리도록 허락함으로써 작품이 스스로 소리를 내게 하고 자연스러운 색채와 무게를 찾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약한 자들’로 알려졌던 단원들로 하여금 인간성을 서로 보다 가깝게 연결시켜주는 음악의 힘을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고 LA타임스가 현 뉴욕필의 상임지휘자인 알란 길버트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마주어는 지휘자로서 뿐 아니라 인도주의자로서도 세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현재 폴란드 땅인 브리크에서 출생한 그는 특히 동독 땅이었던 라이프치히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라이프치히 음대에서 피아노와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 마주어는 1970년부터 1996년까지 무려 26년간 세계적인 교향악단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그런데  멘델스존도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마주어는 1989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을 때 이를 저지하려고 출동한 진압군과 민중 간의 유혈사태를 막은 ‘라이프치히 6명’ 중 한 사람이다. 마주어는 그 때 시위군중과 진압군 양측 모두에게 평온과 대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라디오로 방송,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결국 라이프치히 시위 한 달 후 동독은 서독과의 국경을 개방했고 그 이듬해 독일 통일을 보았으니 마주어는 통독의 영웅이라고 해도 되겠다. 독일이 통일되자 마주어는 축하곡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연주했다. 그리고 통독 후 새 대통령 후보로 마주어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니까 마주어는 독일 대통령이 될 뻔했던 사람이다.  
마주어가 2012년 뉴욕 필을 떠난 것은 타의에 의해서다. 당시 막강한 힘을 지녔던 뉴욕 필의 대표로 진취적인 데보라 보다(현 LA 필 대표)에 의해 쫓겨난 셈이다. 이유는 마주어가 베토벤과 브람스와 브루크너 같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정통 고전 낭만파 음악가들을 좋아한 반면 현대음악을 기피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의 후임은 로린 마젤.
보다와 마주어의 대결은 지금 서울서 벌어지고 있는 서울시향의 예술감독 정명훈의 재임명을 둘러싼 논란을 연상케 만든다. 1년여 전에 정명훈과 시향대표였던 박현정 간에 세력다툼이 일어나 박현정이 물러났는데 지금 이 사건이 다시 도져 지난해로 끝난 정명훈의 예술감독직 재임명이 일단 보류된 상태다.
클래시컬 음악은 고상하고 거룩하며 또 순수하나 그것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와 단원들과 교향악단 관계자들 간의 세력다툼과 함께 섹스와 드럭과 술이 범람하는 막후 광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라고 한다. 이런 사정을 코믹하고 흥미진진하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현재 방영되고 있는 아마존의 30분짜리 드라마 ‘정글 속의 모차르트’(Mozart in the Jungle)이다. 이 드라마는 뉴욕 심포니의 아이 같고 야단스럽지만 천재적인 멕시칸 지휘자 로드리고 데 수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와 이사장 글로리아(버나뎃 피터스) 그리고 단원들과 후원자 및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그렸는데 로드리고의 모델은 베네수엘라 태생의 두다멜이다. 그리고 글로리아도 보다를 닮은데가 있다.
두다멜과 베르날은 둘 다 라티노인 데다가 서로 작달막한 키까지 닮았는데 베르날이 두다멜의 지휘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어 드라마에서 베르날 즉 로드리고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 두다멜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시리즈는 현재 제2 시즌이 방영 중으로 시즌 첫 에피소드에는 할리웃보울과 함께 두다멜이 캐미오로 나왔다. 나는 지난 8월 이 에피소드를 찍을 때 보울 무대 뒤에서 두다멜과 베르날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둘이 나란하 서서 웃고 얘기하는 모습이 마치 정다운 형제 같았다.
나는 마주어가 지휘하는 뉴욕 필의 연주를 1998년 연말에 오렌지카운티 공연예술센터에서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연주곡목은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환’과 ‘죽음과 변용’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이었다. 독일 사람답게 큰 체구에 인자한 얼굴의 산타클로스처럼 생긴 마주어는 극히 절제된 제스처로 아름다운 화음을 빚어 나로 하여금 음들의 해심에 잠기게 만들었었다. LA 필의 소리보다 폭과 감촉이 깊고 짙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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