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2월 23일 월요일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각 부문상 후보작

여자 주연상 줄리안 모어 1순위
작품·감독상‘보이후드’‘버드맨’각축


미 스튜디오들의 자화자찬 잔치인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22일 할리웃의 돌비극장에서 닐 패트릭 해리스의 사회로 열린다. ABC-TV가 중계한다. 과연 최종 승자가 누구일지는 투표함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현재 오스카를 거머쥘 것이 확실한 부문은 여자 주연상과 조연상 그리고 남자 조연상 부문이다. 
닐 패트릭 해리스(사회)

■여자 주연
*마리옹 코티야르-‘이틀 낮과 하루 밤’ *펠리시티 존스-‘모든 것의 이론’ *줄리안 모어-‘스틸 앨리스’ *로자문드 파이크-‘곤 걸’ *리스 위더스푼-‘와일드’
‘스틸 앨리스’(Still Alice)에서 알츠하이머 초기증세에 시달리는 언어학 교수로 나와 아름답고 가슴 아프고 또한 섬세하고 민감한 연기를 보여준 줄리안 모어가 탄다. 모어는 골든 글로브상과 배우노조상을 이미 탔는데다가 과거 4번이나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도 알파로 작용할 것이다.

■여자 조연 
여자 조연 패트리샤 아켓(보이후드).
*패트리샤 아켓-‘보이후드’ *로라 던-‘와일드’ *키라 나이틀리-‘이미테이션 게임’ *엠마 스톤-‘버드맨’ *메릴 스트립-‘인투 더 우즈’
여자 주연 줄리안 모어(스틸 앨리스).
12년간 텍사스의 한 소년의 성장기를 12년간에 걸쳐 찍은 ‘보이후드’(Boyhood)에서 결손가정의 어머니로 나와 아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보다 풍성히 가꾸려고 노력하는 여인의 모습을 깊고 겸손하게 표현한 베테런 패트리샤 아켓이 탄다. 모든 비평가 협회상과 골든 글로브 그리고 배우노조상을 독식했다. 상복 많은 메릴 스트립도 이번엔 어쩌지 못할 것이다.

■남자 조연
*로버트 두발-‘판사’ *이산 호크-‘보이후드’ *에드워드 노턴-‘버드맨’ *마크 러팔로-‘폭스캐처’ *J.K. 시몬즈-‘위프래시’
본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은 ‘위프래시’(Whiplash)에서 새디스틱하고 독재적인 재즈학교의 선생으로 나와 제자들을 극한 지경에 까지 몰아붙이는 연기를 겁나게 해낸 베테런 J.K. 시몬즈(60)가 탈 것이다. 오래 전에 영화를 보는 순간 그가 오스카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나리투(‘버드맨’).
상을 탈 것이라고 확신했을 정도로 강렬한 연기다. 시몬즈는 골든 글로브와 거의 모든 비평가협회상과 함께 배우노조상 등 모든 상을 싹쓸이 했다. 수많은 TV 작품과 영화에서 단역과 조연을 하면서 그동안 별로 빛을 못 본 시몬즈는 파머즈 보험회사 TV 광고로 낯이 익다. 

오스카 시상식을 이틀 앞두고도 최종 승자를 가려내기가 가장 어려운 부문이 남자 주연과 작품상 부문이다. 따라서 감독상 부문도 예측이 쉽지 않다.  

■남자 주연
*스티브 카렐-‘폭스캐처’ *브래
남자 조연 J.K. 시몬즈(위프래시).
들리 쿠퍼-‘아메리칸 스나이퍼’ *베네딕 컴버배치-‘이미테이션 게임’ *마이클 키튼-‘버드맨’ *에디 레드메인-‘모든 것의 이론’
‘버드맨’(Birdman)의 마이클 키튼과 ‘모든 것의 이론’(The Theory of Everything)의 에디 레드메인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스크린 밖의 드라마 같은 경쟁이다. 
영국의 떠오르는 젊은 배우 레드메인은 ‘모든 것의 이론’에서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로 근육위축증을 앓고 있는 스티븐 호킹 역을 뛰어나게 해 배우노조상을 탔다. 오스카 사상 지난 10년간 배우노조상을 탄 배우가 주연상도 탔는데다가 배우노조는 오스카 회원들 중 가장 회원 수가 많은 집단이어서 레드메인의 수상을 확신하는 측이 많지만 결코 장담 못할 일이다. 
그가 상을 탄다면 이는 젊었을 때의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나의 왼 발’에서 온 몸이 마비돼 기능이 유일하게 가능한 왼 발로 그림을 그린 아일랜드의 실제 인물 크리스티 브라운 역으로 오스카 주연상을 탄 것에 비유할 만하다.
그러나 기자는 마이클 키튼에게 승부를 걸겠다. 그는 ‘버드맨’에서 브로드웨이 무대를 통해 재기를 노리는 한물 간 할리웃의 수퍼스타로 나와 올인 식의 연기를 보여줬다. 그의 역은 ‘뱃맨’으로 할리웃의 수퍼스타가 됐다가 최근 들어 활동이 뜸했던 자신의 처지를 실제로 반영하는 것 같다. 그는 이 역으로 골든 글로브를 탔다. 
할리웃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베테런 키튼이 아직 젊어 상 탈 기회가 앞으로도 많은 레드메인을 제치고 오스카상을 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부문은 정말로 최종 승자를 장담하기가 힘들다.

■작품
*‘아메리칸 스나이퍼’ *‘버드맨’ *‘보이후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미테이션 게임’ *‘셀마’ *‘모든 것의 이론’ *‘위프래시’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나리투가 연출한 ‘버드맨’과 텍사스에서 활동하는 미 인디영화계의 기수인 리처드 링크레이터가 감독한 ‘보이후드’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난해 1월 선댄스 영화제에서 선을 보인 이후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아온 ‘보이후드’가 상을 탈 것이 거의 확실했었다. 이 영화는 비평가협회의 상이란 상은 다 몰아 탄데다가 골든 글로브까지 타면서 오스카상도 탈 것이라고 모두들 예견했었다.
그런데 뒤늦게 ‘버드맨’이 오스카상 수상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제작자 노조상과 감독 노조상을 타면서 ‘버드맨’의 기운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 ‘버드맨’에 승부를 걸겠다.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나리투-‘버드맨’ *리처드 링크레이터-‘보이후드’ *베넷 밀러-‘폭스캐처’ *웨스 앤더슨-‘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모턴 틸덤-‘이미테이션 게임’
보통 작품상을 타는 영화의 감독이 감독상도 타는 것이 관례처럼 돼 왔지만 이번처럼 작품상을 놓고 두 영화가 경합이 치열할 경우 아카데미는 가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식으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나눠 주기도 한다. 지난해에 작품상은 ‘12년간 노예’가 탔으나 감독상은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이 탄 것이 그 일례다. 
이 부문은 작품상 부문처럼 ‘버드맨’과 ‘보이후드’의 2파전. 올해도 지난해처럼 ‘보이후드’와 ‘버드맨’이 각기 두 부문에서 상을 나눠 가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기자는 이나리투에게 승부를 걸겠다. 
‘보이후드’는 각종 비평가협회상과 골든 글로브를 타긴 했지만 ‘버드맨’은 이 부문 가장 뚜렷한 수상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감독노조상을 탄데다가 현재 상승세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나리투가 타면 이는 지난해의 쿠아론에 이어 두 번째로 멕시코 감독이 상을 타는 경우다. 

이밖에 다른 부문 수상작들을 점쳐 본다.
*각본-‘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각색-‘이미테이션 게임’ *촬영-‘버드맨’(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츠키는 지난해에도 ‘그래비티’로 상을 탔다) *주제가-‘글로리’(셀마) *음악-‘모든 것의 이론’ *만화-‘빅 히로 6’ *외국어 영화-‘이다’(폴랜드) *장편 기록영화-‘시티즌포’ *단편 기록영화-‘위기 핫라인: 재항군인은 1번을 누르세요’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맥팔랜드, USA (McFarland, USA)


짐(케빈 코스너)이 제자들과 함께 승리를 기뻐하고 있다.

백인교사-라티노 학생들 ‘승리 드라마’ 


언더 독의 승리 얘기는 언제나 기분 좋고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어준다. ‘로키’와 ‘기적’과 같은 영화가 그런 것들로 특히 ‘기적’과 같은 실화일 경우 그 감격의 진동이 더 크다. 케빈 코스너가 나오는 이 영화도 실화인데 빅스크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라티노 고교 육상선수들의 승리를 다룬 감동적인 얘기다.
물론 언더 독의 얘기는 다소 상투적이고 결과가 뻔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시감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코스너의 묵직한 자태와 연기 그리고 그와 라티노 학생들 간의 갈등과 화해 또 백인이 순 라티노 동네에 와서 경험하는 문화충돌 등에 관한 ‘물 떠난 물고기’ 얘기를 아주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아울러 주인공들을 약간 감상적이긴 하나 따스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어 박수를 보낼 만하다. 마지막의 승리를 향한 질주장면에 가선 가슴이 뛰는 흥분감과 스릴을 느끼게 된다. 좋은 영화이니 가족이 함께 관람하기를 적극 권한다.
1987년 아이다호주의 보이지의 고교 풋볼코치인 짐 와이트(케빈 코스너)는 태도가 불량한 선수를 거칠게 다루는 바람에 해고를 당한다. 이어 그가 얻은 직장은 중가주 농촌마을 맥팔랜드의 고교 체육선생으로 가난하기 짝이 없는 이 마을의 주민은 완전히 히스패닉들. 짐이 아내 쉐릴(마리아 벨로)과 틴에이지 딸 줄리(모간 세일러)와 그 아래의 둘째 딸 제이미(엘지 피셔)를 차에 태우고 동네에 다다르자 줄리가 “아빠 우리 멕시코에 왔어”하고 묻는다.
이런 영화의 정석적인 코스인 백인이 라티노 동네에서 겪는 문화충돌로 일어나는 코미디가 엮어지면서 짐과 그의 가족은 새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한편 라티노들은 짐의 가족을 호기심과 약간의 경멸의 눈길로 바라보면서도 그들을 받아들인다.
짐은 체육시간에 학생들이 달리기를 유난히 잘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크로스컨트리 팀을 구성하기로 한다. 아이들이 잘 달리는 이유는 아침 일찍 일어나 채소밭에서 일하는 부모들을 돕기 위해 농장으로 달려갔다가 이어 학교로 달려가고 또 수업이 끝나면 밭으로 다시 달려가기를 매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짐은 가장 잘 뛰는 토머스(칼로스 프래츠)와 뚱뚱하면서도 열성인 대니(라미로 로드리게즈) 등 몇 명의 아이들로 팀을 구성하고 가주 챔피언십을 노리고 맹훈련에 들어간다. 그러나 처음에는 교장과 토머스까지도 팀 존재 자체에 대해서마저 의문을 표한다. 하물며 우승이라곤 언감생심이라고 여긴다.
단순히 스포츠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라티노들의 가족애와 가족에 대한 의무 그리고 노동과 커뮤니티의 모습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그렸는데 선수 아이들의 개개인의 면목도 밀도  있게 묘사했다. 특히 보기 좋은 것은 스포츠 영화 단골인 코스너의 듬직한 자태와 티 안내는 겸손한 연기. 그와 학생들 간의 콤비가 보기 좋고 중가주의 정경과 달리기를 공중에서 찍은 촬영도 훌륭하다. 
영화 끝에 실제 짐과 성장한 학생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몽타주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학생들은 보기 드물게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대부분 고향에서 봉사하고 있는데 짐은 아직도 맥팔랜드에 살고 있다. 그는 자기 팀이 우승했을 때 부유한 백인 동네인 팔로알토의 학교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큰 박수를 보낸다. 닉키 카로 감독. 
PG. Disney.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와일드 테일즈 (Wild Tales)


결혼식날 남편의 부정을 발견한 로미나가 결혼케익 앞에서 망연자실하니 서있다.

기발하고 통쾌한 아르헨 블랙코미디


기차게 재미있고 황당무계하고 고약하며 또 사납고 우습고 괴이한 아르헨티나산 블랙 코미디 드라마로 각본을 쓰고 감독을 한 다미안 시프론의 데뷔작이다. 대단한 재주꾼으로 할리웃의 부름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현대인의 일상의 좌절감을 통쾌하고 시원하게 풀어주는 설사약 같은 영화로 2월22일에 열리는 제87회 오스카 시상식의 외국 영화상 후보작이다.  
막다른 궁지에 몰린 보통 사람들의 제어할 수 없는 과격하고 무도한 반응과 함께 아르헨티나의 부패와 사회 및 경제적 불공평 그리고 불의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있는데 굉장히 어두우면서도 장난 끼가 심해 박장대소하게 된다.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는 희한하고 발칙하고 기발 난 영화다.
6개의 에피소드로 엮어졌는데 첫 에피소드 ‘파스테르나크’는 일종의 서막식. 기내에 탄 예쁜 모델과 나이 먹은 음악 비평가가 얘기를 나누다가 이 비평가의 혹평 때문에 음악가로서의 꿈이 산산조각 난 파스테르나크가 모델의 전 애인임이 밝혀진다. 그런데 터무니없게도 기내 승객 전부가 파스테르나크를 알고 있지 않겠는가. 뒤늦게 파스테르나크가 정체를 드러내면서 타고난 실패자의 복수가 벌어진다.
‘쥐약’- 인정사정없는 고리대금업자 때문에 박살이 난 집의 딸이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후진 식당에 이 고리대금업자가 저녁을 먹으러 들어온다. 웨이트리스로부터 고리대금업자의 얘기를 들은 아주머니 쿡이 “저런 놈은 죽어 싸다”면서 그의 음식에 쥐약을 섞는다.
‘지옥행 길’- 정장을 한 제 잘난 맛에 사는 오만한 남자가 아우디를 몰고 좁은 산길을 가는데 앞에서 고물차가 길을 막아 추월할 수가 없자 “야, 이 촌놈아”라고 한마디 했다가 ‘촌놈’으로부터 가혹하고 무자비하며 더러운 보복을 당한다.
‘봄비타’- 주차금지 표지가 없는 도로에 주차를 했는데도 여러 번 차를 토잉 당한 남자가 시를 상대로 보복행위를 하면서 시민의 영웅이 된다.          
‘계산서’- 방자한 부잣집 아들이 차로 사람을 치고 도주한 뒤 아버지가 집의 하인에게 거금을 줄 테니 아들 대신 죄를 뒤집어쓰라고 종용한다. 탐욕과 황금만능주의를 새카맣게 냉소하고 있는데 역시 반격 식으로 끝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결혼식 파티에서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생쥐처럼 조용한 신부 로미나(에리카 리바스)가 남편에 대해 상상을 초월한 복수를 시도한다. 그 행위가 가공하면 가공할수록 로미나가 더 예뻐 보인다. 6편 중 제일 재미있다.
앙상블 캐스트의 연기와 스파게티 웨스턴식의 음악도 좋은 스타일 멋진 영화다.
R. 일부지역. Sony Classics. 아크라이트 (6360 선셋), 랜드마크(10850 웨스트 피코).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2월 18일 수요일

킹스맨: 시크릿 서비스 (Kingsman: The Secret Service)


신사 스파이 갤라하드(오른쪽)가 수제자 엑시를 스파이 본부로 데려가고 있다.

‘유혈 코믹’ 난무하는 액션 스파이 스릴러


말더듬이 조지 6세 영국 왕이 치명적인 신사 스파이가 되어 스크린에 돌아 왔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 스타일의 콜린 퍼스가 이렇게 사납게 액션을 구사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만화가 원전인 영화로(그래서 얘기가 터무니가 없다) 감독 매튜 번은 만화 같으면서도 폭력이 난무하는 ‘킥-애스’를 만든 사람으로 이 영화는 ‘킥-애스’와 풍자판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짬뽕한 코믹 터치의 난장판 액션 스파이 스릴러다. 
어리석은 재미가 있긴 한데 유혈폭력이 쓸데없이 잔인하고 액션과 내용을 너무 과다하게 늘어놓아 중간쯤 지나가면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관객보다 감독이 만들면서 더 즐긴 티가 나는데 본드 영화뿐 아니라 아서 왕의 캐멜롯과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마이 페어 레이디’로 만들어졌다)의 내용까지 빌려다 썼다. 
1997년 영국의 비밀첩보부 요원들이 중동(요즘 어디 다른 곳이 있겠는가)에서 작전 중 작전이 잘못되면서 랜슬롯이 동료 해리 하트(일명 갤라하드-콜린 퍼스)의 생명을 구하다가 사망한다. 귀국 후 갤라하드는 랜슬롯의 집에 찾아가 미망인을 위로하고 그의 어린 아들 엑시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달을 준다. 그리고 언제고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를 걸라고 일러준다.
그로부터 17년 후. 지구를 구하기 위해선 인구를 줄여야 한다고 믿는 미국의 인터넷 백만장자 사이코 리치몬드 발렌타인(야구 모자를 쓴 새뮤얼 L. 잭슨이 과장된 코믹한 연기를 잘 한다)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영국 첩보부에 비상이 걸린다. 발렌타인에게는 자기 애인을 사살한 남아공의 육상선수 오스카 피스토리어스처럼 두 다리가 금속제 인조다리인 애인이자 비서인 가젤(소피아 부텔라)이 있다. 섹시한 가젤은 살인광으로 날카로운 금속제 발로 사람을 두 쪽으로 갈라 죽인다. 
한편 학교도 중퇴하고 날건달이 된 엑시(태론 에저턴)가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남의 차를 훔쳐 타고 거리를 질주하다가 경찰에 잡혀 영창엘 들어간다. 이에 엑시는 메달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엑시를 영창에서 빼낸 갤라하드는 엑시를 스파이로 키우기로 하고 그를 새빌로(런던의 유명한 양복점 거리로 이 때문에 옛날에 한국에서는 신사복을 세비루라고 불렀다) 에 있는 양복점으로 위장한 본부로 데려간다. 
본부장은 아서(마이클 케인-본드 시리즈의 M)이고 아서의 참모는 멀린(마크 스트롱-본드 시리즈의 Q). 이어 멀린은 엑시와 함께 7명의 젊은 남녀 스파이 후보들의 훈련에 들어간다. 엑시를 뺀 다른 후보들은 다 엑시와 계급이 다른 집 자녀들이어서 엑시는 왕따를 당한다. 훈련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스파이가 된다. 그런데 속이 여린 엑시가 마지막 판에 가서 아서의 지시를 수행치 못하는 바람에 퇴교 당한다.
우산과 라이터 모양의 온갖 신무기가 맹활약을 하면서 중간 중간 피바람을 일으키는 액션이 작렬하는데 그 중에서도 그야말로 눈알이 360도로 돌아가는 장면은 미국의 켄터키주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다니는 교회 안에서의 긴 액션 장면. 갤라하드 혼자서 100여명의 신도들을 상대하는데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굉장히 잔인하고 인정사정없이 유혈 폭력적이지만 액션 안무 하나 일품이다. “아이구 이젠 그만 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신사 퍼스와 불량배 에저턴의 콤비가 좋은데 퍼스의 연기도 좋지만 뛰어나게 돋보이는 것은 에저턴의 연기. 화면에서 연기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느낄 정도로 다변한 연기다. 대성할 배우다. R. Fox.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겟, 비비안 암살렘의 재판 (Gett, the Trial of Viviane Amsalem)


비비안(왼쪽서 두 번째)이 남편 옆에서 재판장에게 이혼승락을 간청하고 있다.

“제발 이혼해주세요”5년간의 법정투쟁


중세에나 있을 법한 기막힌 얘기로 남편의 동의 없이는 이혼을 할 수 없는 이스라엘 여자가 이혼을 하기 위해 투쟁한 5년간의 법정 드라마다. 전 내용이 법정과 대기실에서 진행되고 말이 많아 대중용 오락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믿기 힘든 이스라엘 율법에 따른 이혼에 관한 희한한 내용과 뛰어난 연기 그리고 긴장감 가득한 연출과 클로스업을 많이 쓴 촬영 등 여러 모로 훌륭한 이스라엘 영화다. ‘겟’은 이혼장을 말한다. 
법정에서 일어나는 공방전이 마치 실제로 법정에서 있는 실화를 보는 듯 사실감 있는 영화로 매우 검소하고 꾸밈이 없는데 자칫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얘기를 유머와 연민의 정으로 다독여주고 있다. 매우 밀도 짙고 촘촘하게 짜여진 풍성한 드라마로 남매 감독 쉴롬과 로닛 엘카베츠의 장인적 연출 솜씨가 돋보인다. 
비비안 암살렘(감독인 로닛 엘카베츠)과 그의 변호사 카멜(메나셰 노이)은 랍비 솔로몬(엘리 고른스타인)이 재판장인 3인 판사 주재 하의 이스라엘 율법 법정에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남편 엘리샤(시몬 압카리안)로부터 이혼 동의를 얻어내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황소고집인 엘리샤는 자기 형이자 변호사인 교활한 쉬몬(사손 가바이)의 지시에 따라 법정에 출정조차 하지 않으며 지연작전을 쓰면서 비비안이 지쳐 소송을 취하하도록 나름대로 온갖 수단을 쓴다. 엘리샤는 화가 난 재판장이 출정명령을 어기면 위법 처리하겠다는 위협을 받고서야 출정한다. 
영화는 자막으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데 이러기를 5년이 지난다. 그런데 비비안이 왜 이혼을 요구하는지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사연을 알게 된다. 비비안은 사정하고 호소하고 울고불고 화를 내고 또 때로는 미소작전을 쓰면서 재판장에게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나 율법에 어긋나 허락이 안 된다. 나중엔 재판장마저 지쳐 재판을 기피한다.
그런데 아내를 사랑하는 엘리샤는 아내의 간청에 이혼을 허락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오리발을 내밀어 비비안의 속뿐만 아니라 관객의 속도 태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바짝 조여드는 긴장감에 빠지게 된다. 
뛰어난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눈이 큰 로닛 엘카베츠의 섬세하고 민감한 표정 변화가 큰 칭찬감인데 그는 이런 표정의 변화로 자신의 감정과 상대방에 대한 느낌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일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인용. Music Box.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덕수와 나




‘국제시장’의 윤덕수는 나보다 나이가 너댓 살 위이긴 하지만 그의 얘기는 나의 얘기다. 그래서 영화가 내겐 더욱 절실히 느껴졌다.
나의 아버지도 덕수의 아버지처럼 함경북도 출신인데 9.28 서울 수복 때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를 하면서 아버지를 납치해 가는 바람에 나도 덕수처럼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졸지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와 함께 덕수네처럼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가 셋방살이를 하면서 고생깨나 했다. 나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다행히 우리는 난리 통에도 헤어지진 않았다.  
나는 덕수처럼 독일이나 월남(군시절 자칫했으면 월남전에 파병됐을 뻔했지만)에는 안 갔지만 그가 산 한 많고 피눈물 나는 인생은 나도 경험해 잘 알고 있다. 아니 덕수의 인생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내 또래 대한민국의 모든 이산가족의 인생이다.
영화에도 나왔지만 부산 피난시절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달리는 군용차에 탄 양키 군인들이 던져주던 허쉬바 초컬릿과 리글리검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허쉬바를 먹을 때면 꼬마 때 맛보던 입맛이 되살아나는 것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달콤한 맛이 변함이 없으니 미제가 좋긴 좋네.
우리 고교 선배 현인이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하면서 노래 부른 국제시장이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며 흥남철수 때 헤어진 여동생 금순이(영화에선 막순이)를 그리워하던 영도다리도 아직까지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나의 피난시절의 기념물들이다.
난 특히 국제시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용두산 꼭대기에서 영화에서처럼 텐트를 친 초등학교엘 다니며 공부를 한데다가 어머니가 한때 국제시장 인근의 남포동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이 동네에 대해선 남달리 애착이 간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부산영화제에 갔을 때 국제시장과 남포동과 광복동 그리고 용두산과 자갈치시장을 헤집고 다닌 것도 꼬마 때의 과거가 내 심장을 찌르며 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국제시장에서 둘이 함께 사 먹은 노천가게 호떡이 꿀맛이었다.
이러니 내가 ‘국제시장’(사진)을 보면서 추억에 흥분하고 감상에 젖으며 눈물을 안 흘릴 재간이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모두들 운다는 소리를 들어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하고 갔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특히 여의도 광장에서 벌어진 이산가족 찾기 장면에선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렀는데 난 구태여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했다. 아마도 내가 헤어진 아버지가 그리워졌던가 보다. 우리 아버진 참 멋쟁이셨다. 그 옛날에 오하이오 주립대를 나오셨는데 난 지금도 내 방에 있는 중절모를 쓰고 짧은 바지에 반소매 상의를 입고 흰 양말에 백구두를 신은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장충단 공원에서 찍은 낡은 사진을 볼 때마다 그와 함께 보낸 짧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곤 한다.
덕수의 삶은 대한민국 역사의 축소도다. 남자들은 독일에 광부로 그리고 여자들은 간호사로 가 외화벌이를 했고 그 뒤로는 베트남과 중동에 가 달러벌이를 했다. 나는 한국의 한국일보 기자시절 김포공항엘 출입했는데 그 때 중동에서 떼를 지어 귀국하던 근로자들이 모두 하나씩 대형 외제 붐박스를 손에 들고 있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덕수는 부산에서 어렸을 때 영화를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부산시절 무성영화부터 본 뒤로 영화광이 되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나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사는 것같다.
영화를 보니 대양극장에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서툴게 그린 ‘로마의 휴일’ 간판이 붙었는데 내 단골극장은 범일동 집 동네 근처의 삼일극장이었다.
지지리도 못살던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모두 덕수들의 탓이다. 대한민국이 1960년대 중반에 가서야 보릿고개를 넘긴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발전은 정말로 기적이다. 그 기적이 ‘아버지’ 덕수들의 피와 땀으로 맺어진 것일진대 그들은 찬양받을 만 하다. 그래서 영화의 영어제목도 ‘나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송가’다.
영화 끝에 가서 덕수는 끝내 만나지 못한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이 고생을 자기 자식들 때가 아니라 자기가 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로 힘들었거든예”라고 고백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참으로 힘들고 슬픈 역사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덕수의 말처럼 아버지들은 자식 대신 고생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덕수들의 모든 자식들이 사서 고생할 것까지는 없지만 자신들의 과거는 간직하고 있었으면 하고 바랄뿐이다. 이 영화를 놓고 이념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연한 일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목소리들 (The Voices)


제리(라이언 레널즈)가 개와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장르 뒤죽박죽·유혈 낭자한 블랙 코미디


알록달록한 시리얼 킬러의 블랙 코미디인데 지나치게 피가 많이 흐르고 끔찍해 역겨울 정도다. 젊었을 때의 록 허드슨을 연상케 하는 라이언 레널즈가 정신상태기 불안한 공장 직원으로 나와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데 마치 변종 ‘사이코’를 보는 것 같다.
대부분 오락위주의 영화로 잘 알려진 레널즈는 마치 과격하고 탈선한 영화에 나와야만 진정한 배우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제니퍼 애니스턴이 ‘케이크’에 나온 것과 같은 발상인데 영화가 톤과 스타일이 뒤죽박죽인 데다가 과도하게 잔인성을 낭비해 더러 웃다가도 이맛살을 찌푸리게 된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한 미 중서부의 한 작은 동네(통풍이 제대로 안 되는 미 중서부 마을에 대한 풍자영화이기도 하다)의 버려진 볼링장에서 사는 제리 히크팽(레널즈)은 동네의 욕조제조공장 직원. 그런데 직원들의 제복이 분홍색이어서 바깥세상과 소통이 안 될 것 같은 동네 분위기를 얄궂은 기운으로 채색한다(약간 만화적인 색채도 갖췄다).
제리는 어릴 때 끔찍한 사건을 저질러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됐다가 풀려 나왔는데 그래서 정기적으로 상담여의(재키 위버)를 찾아간다. 제리의 가족은 미스터 위스커라는 이름의 사악한 고양이와 보스코리는 이름의 잡종개. 그런데 이 고양이와 개가 말을 하면서 제리와 대화를 나눈다. 과연 개와 고양이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리의 환상인지는 관객 각자의 관점에 달렸다.
제리가 좋아하는 여자는 회사 회계과에서 일하는 화냥기가 있는 섹시한 영국 여자 피오나(젬마 아터턴). 그런데 제리를 진짜로 좋아하는 여자는 역시 회계과 직원인 현모양처 형의 리사(안나 켄드릭). 이 밖에도 또 다른 회계과 여직원으로 뚱뚱한 앨리슨(엘라 스미스)도 제리를 혼자 좋아한다.
제리의 살육행위는 먼저 자기가 몰던 차에 치인 사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인간 첫 희생자는 피오나인데 제리는 피오나를 살해한 뒤 머리를 잘라 냉장고에 보관하고 이 머리와 대화를 나눈다(영화는 전부 제리의 가공할 핏빛 환상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제리는 피오나의 시신을 고기 썰듯이 썰어 플래스틱 용기에 보관한다.
이런 제리가 리사와 사귀면서 리사의 착한 마음에 감화돼 자신의 살인욕망을 억제하려고 몸부림친다(이런 얘기는 아주 상투적인 것이다). 그러나 리사 역시 제리의 제물이 돼 머리가 절단돼 냉장고에 들어간다.
리사의 머리도 제리와 대화를 나눈다. 이런 제리의 살인행위를 부추기는 것이 미스터 위스커. 이어 앨리슨의 머리도 냉장고에 들어가고 정신상담의는 제리에게 납돼 죽다 살아난다.
레널즈는 제리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와 사슴과 양말 인형의 목소리까지 도맡아하면서 열성을 보이고 있지만 영화가 다양한 장르를 잘 못 섞은데다가 톤이 불규칙하고 또 쓸데없이 피를 흘려 기분이 안 좋다. 마지막에 이런 분위기를 사죄라도 한다는 듯이 주인공들이 정장을 하고 나와 춤추고 노래하는데 이 중에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예수도 있다. 가끔 기발 난 데도 있어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봐도 되겠다. 마제인 사츠라피 감독. R. Lionsgate.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47명의 로닌 (The 47 Ronin·1941)


쇼군의 궁정 복도에서 주군 아사노(오른쪽)가 칼을 뽑아 키라를 살해 하려다 제지당한다.

주군 잃은 47인의 사무라이들 '복수극'


일본의 명장 켄지 미조구치의 대하 사무라이 복수극으로 1부와 2부로 구성된 상영시간 241분짜리 흑백 걸작이다. 일본어 제목은 ‘겐로쿠 추신구라’(Genroku Chushingura)로 이 내용은 그동안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난해에는 키아누 리브스 주연으로 역시 ‘47명의 로닌’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져 개봉됐으나 비평가들의 혹평과 함께 흥행에서도 참패했다.
영화의 내용은 실화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주인의 복수를 하는 47명의 주인 없는 사무라이인 낭인(로닌)의 피비린내 나는 활극으로 이 얘기는 일본의 전설이 되다시피 했다. 체면과 명예를 생명보다 더 중시하는 일본 사람들의 구미에 딱 맞는 내용이다.
미조구치는 1941년 일-중 전쟁 때 군부에 의해 충성과 희생을 강조하는 선전용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으나 인간성을 중시하는 그의 솜씨가 역연하다.
1701년 에도(옛 도쿄)시대. 쇼군의 궁정 복도에서 라이벌 주군들인 타쿠미노카미 아사노와 교활한 키라 간에 싸움이 일어나면서 아사노가 키라를 죽이려고 하다 주위의 만류로 싸움이 끝난다. 이에 노한 쇼군은 칼을 빼어든 아사노에게 할복자살을 선고한다. 그리고 아사노의 땅과 저택도 몰수당한다. 그러나 쇼군은 키라는 처벌 받지 않는다.
이에 아사노의 종들은 모두 뿔뿔이 떠나고 그의 47명의 사무라이들은 낭인이 된다. 이들은 억울하고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당한 주군의 복수를 위해 키라의 집을 공격한 뒤 그를 살해하기로 다짐한다.
그런데 낭인들의 리더인 쿠라노수케 오이시는 처음에는 복수보다 아사노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기 위해 쇼군에게 아사노의 동생 다이가쿠를 주군으로 아사노 가문을 부활시켜 달라고 탄원한다.
그러나 이 같은 탄원이 1년 후 쇼군으로부터 거절당하면서 오이시와 그의 46명의 사무라이들은 키라의 집을 공격, 키라를 살해하고 주인의 복수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쇼군의 명에 따라 모두 할복자살한다. 체면과 명예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사무라이의 불문율인 부시도를 따른 집단자살이다. 초주로 카와라사키, 요시자부로 아라시, 우타에몬 이치가와 공연. 15일 하오 7시 해머뮤지엄 내 빌리 와일더극장(윌셔와 웨스트우드 310-206-8013).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아카데미 단편상 후보작들

긴 여운 남기는 다채로운 삶의 순간순간들…


#라이브 액션상 후보작

*‘아야'(Aya·이스라엘·40분)-공항에서 사람을 기다리던 젊은 여인이 우연히 피아노경연 대회에 참석차 이스라엘을 찾아온 덴마크 남자 피아니스트를 차에 태우고 예루살렘까지 가면서 대회를 나누는 2인극. 은밀한 스릴마저 느끼게 되는 작품으로 끝이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르바네'(Parvaneh)
*‘부갈루와 그래암'(Boogaloo and Graham·영국·14분)-에이레공화군이 영국군에 대해 테러를 감행하던 어두운 시기 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사람 좋은 아버지가 두 어린 아들에게 병아리를 애완용 선물로 준다. 두 아이는 이 병아리들을 정성껏 돌보며 키우고 사랑하는데 병아리가 커서 닭이 되자 아빠와 엄마가 이 닭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형제의 강력한 반발을 받는다. 따스하며 약간 감상적이다.
 *‘버터 램프'(Butter Lamp·프랑스와 중국·16분)-티베트의 시골 사람들이 떠돌이 사진사가 마련한 디즈니랜드와 베이징 올림픽 등 갖가지 배경사진 앞에서 가족촬영을 한다. 배경사진 중에는 금성(Gold Star)사 로고도 보인다. 단순하고 약간 황당한 코미디.
 *‘파르바네'(Parvaneh·스위스·25분)-스위스의 먼 시골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 아프가니스탄 난민소녀가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을 하기 위해 취리히에 오나 나이가 어려 송금을 못하게 되자 길에서 만난 말괄량이 스위스 소녀에게 부탁한다. 스위스 소녀는 송금액의 10%를 수수료로 받고 송금을 대행하기로 하나 환전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둘이 클럽 등을 돌면서 밤의 취리히를 즐긴다. 고운 작품이다.
 *‘생명의 전화'(Phone Call·영국·21분)-생명의 전화에서 일하는 여자(샐리 호킨스)가 아내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려는 나이 먹은 남자(짐 브로드벤트)의 전화를 받고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남자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 넣어주려고 애쓴다. 
12일까지 뉴아트(11272 샌타모니카) 310-473-8530.

#만화상 후보작

*‘비거 픽처'(The Bigger Picture·영국·7분30초)-자기를 잘 보살피라고 보채는 병상의 나이 먹은 어머니를 돌보는 성격과 차림이 판이한 장성한 두 형제 간에 긴장감이 비등한다. 거의 조야한 그림이 영화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준다. 
*‘댐 키퍼'(The Dam Keeper·미국·18분)-붓과 연필로 그린 만화로 마을의 댐을 지키는 외로운 어린 돼지가 학교의 다른 동물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면서 시달린다. 환경문제와 함께 아동기의 두려움과 후회 그리고 고독과 우정을 다룬 우화. 
*‘잔치'(Feast·미국·7분)-젊은 남자가 길에서 주워 기르는 항상 배가 고픈 귀여운 강아지의 눈으로 본 인간 세상의 이야기. 일종의 ‘개의 일생’이라고 하겠는데 강아지의 주인에 대한 사랑이 주인의 웨이트리스에 대한 사랑을 결혼으로 이끈다. 디즈니 작품으로 재치 있고 귀엽다.
‘나와 나의 물턴'(Me and My Moulton)
*‘나와 나의 물턴'(Me and My Moulton·캐나다·13분)-1960년대. 건축가인 괴짜 아빠와 역시 별난 엄마를 둔 노르웨이의 세 자매가 엄마 아빠에게 자전거를 사 달라고 조른다. 파격적인 가정에서 사는 어린 세 자매의 평범한 삶에 대한 소원을 그린 영화로 선으로 그린 그림과 알록달록한 색깔이 신선하다. 
*‘단순한 삶'(A Single Life·네덜란드·2분18초)-영화 제목의 노래 한 곡이 담긴 바이닐 싱글 레코드를 받은 젊은 여인의 삶이 노래에 따라 과거와 미래를 오락가락하면서 여인의 일생을 엮는다. 인간의 유한한 삶을 악의 없이 놀려댄 기발 난 영화. 12일까지 뉴아트 극장.

#기록영화상 후보작

*‘위기 핫라인: 재향군인은 1번을 누르세요'(Crisis Hotline: Veterans Press 1·미국·41분)-뉴욕주 북부에 있는 재향군인을 위한 위기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온 재향군인들과의 대화를 다룬 감정적으로 충격적인 작품.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자살이나 폭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구원을 호소하는 음성과 이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하려는 상담자 간의 대화가 다시 한 번 전쟁의 값비싼 대가를 상기시킨다. 오스카상을 탈 가능성이 많다. (사진)
‘위기 핫라인: 재향군인은 1번을 누르세요'(Crisis Hotline: Veterans Press 1)
 *‘조안나'(Joanna·폴란드·45분)-불치의 병을 앓는 젊은 어머니가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아들이 배울 것을 남기기 위해 블로그를 쓴다.  
*‘우리의 저주'(Our Curse·폴란드·27분)-치명적인 호흡불규칙 증세에 시달리는 갓난 아들을 키우는 젊은 부부의 양육기.
 *‘백정'(The Reaper·멕시코·29분)-멕시코의 도살장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25년간 일하면서 하루에 500여마리의 소를 도살하는 백정의 일상기. 어둡게 아름답다
. *‘와잇 어스'(White Earth·미국·20분)-노스다코타의 작은 마을 와잇 어스에 오일 붐이 일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이 곳으로 몰려들면서 새 커뮤니티를 구성한다. 이들의 삶 특히 아이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아울러 사회와 환경문제도 다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크리스‘듀크’카일




8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전쟁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사진)가 3주 전 캐나다를 포함한 전 북미에서 확대 개봉된 이래 지금까지 연속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다. 1일 현재 총수입은 2억4,890만달러로 이 영화는 작품과 남우주연상 등 총 6개 부문에서 올해 아카데미상(시상식은 2월 22일에 있다) 후보에 올랐다.
영화는 9.11테러가 일어나자 ‘하느님과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해군특공대(SEAL)에 자원입대해 이라크 전선에서 무려 160여명(공식 집계)의 적을 사살, ‘전설’이라 불린 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실화다.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한 장인적 연출과 체중을 늘린 카일 역의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가 좋은 작품으로 재미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 호전성과 함께 살인과 총기를 예찬한 내용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칭 반전주의자인 ‘더티 해리’ 이스트우드의 취향에 딱 맞는 영화다.  
영화가 여러 개의 흥행기록을 깨면서 공전의 빅 히트를 하자 연예인들과 정치인들이 편을 갈라 영화에 대한 치열한 찬반론을 펼친 것도 바로 이런 영화의 내용 탓이다. 김정은 암살을 다룬 ‘인터뷰’에 나온 세스 로건과 마이클 모어 같은 진보파 영화인들은 영화를 전쟁 찬미라 비판한 반면 새라 페일린과 뉴트 깅그리치 같은 보수파 정치인들은 카일을 영웅이라고 찬양했다.
모어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저격수는 영웅이 아니다. 그리고 침략자들이 더 나쁘다”라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비판하자 페일린은 “너 같은 자는 크리스 카일의 군화도 닦을 자격도 없다”고 대응했고 깅그리치도 “마이크 모어는 몇 주간 이슬람국가와 보코하람과 함께 있어 봐야 한다. 그제야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카일은 영웅인가. 유명 방송인 빌 마어는 그를 ‘사이코’라고 지칭했는데 내게는 카일이 전쟁과 살인 중독자로 보인다. 카일은 한 차례 이라크전 복무가 끝나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에 돌아와서도 가정에 적응 못하고 전선의 전우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참전하는데 그에겐 전장이 가정인 셈이다.
나는 카일을 존 웨인이라고 본다. 별명이 ‘듀크’(자기 집 개 이름)였던 웨인은 많은 웨스턴에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면서 살육했는데 카일도 이라크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면서 사살했다. 웨인이 인디언들을 살육하면서 그들의 땅을 빼앗은 것이나 카일이 ‘그 곳에는 악이 있어 우리는 그 것을 제거해야 한다’면서 이라크를 침략한 것이나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인가. 슈펭글러의 말처럼 역사는 반복한다.
카일의 옹호론자들은 이라크전을 침략이 아닌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십자군식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MIT 교수인 석학 놈 촘스키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9.11 사태가 일어났을 때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라고 촌평한 촘스키는 최근 파리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후 유럽에서 번진 반무슬림 정서에 대해 “이는 서방의 위선”이라고 평했다.
그는 서방을 겨냥한 공격은 테러로 규정돼 비난 받지만 비슷한 인명피해를 낸 서방에 의한 공격은 비난 받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역사는 늘 강자가 쓰는 것이어서 사실 서방의 이런 논리는 별로 놀랄 것도 못 된다. 
미국 사람들은 영웅과 애국심을 신봉한다. 10여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전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전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미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이야 말로 카일과 같은 영웅이다. 이것이 영화가 빅 히트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또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호전적인 국가다. 1일 열려 무려 1억1,400여만명이 TV로 시청한 수퍼보울의 풋볼경기야 말로 미국인들의 이런 호전성을 잘 보여주는 운동이다. 서로 편을 갈라 치고받으면서 땅을 빼앗고 이를 지키려는 이 경기는 옛날에 서부 개척자들과 인디언들의 싸움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다. 
이스트우드의 말대로 인류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은 우리의 유전인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 수호라는 명목 하에 계속해 해외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스트우드의 말처럼 역사는 평화의 편이 아님에 분명하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카일의 전쟁에 관한 회의와 그와 아내와의 갈등을 비롯한 가정문제 그리고 살인이 인간 영혼과 정신에 미치는 값비싼 대가에 대해서도 언급은 하고 있으나 그것은 킬러영화의 이미지를 무마시키기 위한 양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올해 아카데미 단편 기록영화상 후보작인 ‘위기 핫라인: 재향군인은 1번을 누르세요’(Crisis Hotline: Veterans Press 1)의 관람을 권한다. 뉴욕주 북부에 있는 재향군인 상담센터의 상담원들과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자살과 폭력행위를 생각하는 재향군인들과의 전화상담을 다룬 작품이다. 살육을 구사하는 전쟁이 인간의 내면에 남긴 깊은 상처에 전율하게 되는 작품으로 감정적으로 강펀치를 맞는 느낌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2월 2일 월요일

흑이냐 백이냐 (Black or White)

엘리옷(오른쪽)이 손녀 엘로이즈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다.

7세 혼혈소녀 양육권 둘러싼‘흑백 갈등’


자녀 양육과 가족애 그리고 흑백문제를 다룬 감상적인 드라메디로 옛날 영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매우 선의적인 온 가족용 영화로 각본을 쓰고 감독한 마이크 빈더의 가족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아주 온화한 작품으로 흑백문제를 비록 충돌과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긴 했으나 결국 흑이냐 백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모두 착한 인간성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얘기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의 결론인데 그래서 영화가 재미도 있고 구겨진 데가 없이 잘 만들긴 했으나 극적 충격이나 추진력이 다소 모자라고 또 드라마의 파고도 잔잔하다. 그러나 어린 손녀를 놓고 흑백 맞대결을 하는 두 주인공 옥타비아 스펜서와 케빈 코스너의 강렬한 연기 대결이 볼만하고 언제나 시의에 맞는 얘기여서 관람을 적극 권한다.
LA의 부유한 변호사인 엘리옷 앤더슨(코스너)은 최근에 사랑하는 아내 캐롤(제니퍼 엘)을 자동차 사고로 잃고 슬픔과 실의를 스카치로 달랜다. 그에게 유일한 삶의 기쁨이 남았다면 아내와 함께 갓 나았을 때부터 키운 7세난 흑백혼혈의 손녀 엘로이즈(질리안 에스텔-신인인데 깜찍하게 연기를 잘 한다).
엘로이즈는 엘리옷의 딸이 17세에 출산한 딸로 엄마는 아기를 낳다가 사망했다. 엘로이즈의 흑인 아버지 레지(안드레 홀랜드)는 마약중독자로 감옥에 수감 중이다. 엘리옷은 온 정성을 다해 엘로이즈를 키우는데 그는 겉으로는 무뚝뚝한 할아버지이지만 가슴은 손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이런 모습을 코스너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표현한다.
이 집에 엘리옷이 손녀의 수학 가정교사로 남의 집 가정교사 겸 일종의 집안 비서로 실력이 넘치고 재치 있는 흑인 두반(엠포 코아호)을 고용하면서 심각한 가정 분위기에 코믹 터치가 스며든다.
그런데 느닷없이 엘로이즈의 친 할머니 로웨나(스펜서)가 엘리옷을 찾아와 남자 혼자서 어린 손녀 키울 수가 없으니 엘로이즈를 내놓으라고 선언한다. 엘리옷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데 그가 로웨나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 
LA의 캄튼 흑인 동네에 사는 강철 같은 의지와 불같은 성격을 지닌 황소 눈알을 한 로웨나는 이어 LA 다운타운에서 잘 나가는 조카 변호사 제레마이아(앤소니 맥키)를 시켜 엘리오즈에 대한 양육권 소송을 제기한다. 
여기서부터 엘로이즈를 둘러싼 엘리옷과 로웨나의 감정싸움을 곁들인 치열한 대결이 일어나는데 여기에 한 수 더 떠 엘리옷이 사갈시하는 레지가 나타나 뒤늦게 딸과 관계를 연결하겠다는 바람에 엘리옷은 속을 팍팍 썩이며 스카치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그리고 영화는 법정 드라마 모양을 갖추는데 엘리옷이 홧김에 어쩌다 ‘N’(깜둥이) 단어를 내뱉는 바람에 이 말이 법정에서 엘리옷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클라이맥스에 엘리옷이 자기 발언에 대해 사과하면서 오랫동안 엘로이즈에 대한 사랑과 흑백문제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코스너와 함께 볼만한 것은 ‘헬프’에서 하녀 역으로 오스카 조연상을 탄 스펜서의 뚝심 좋은 연기다. 그의 큰 눈은 천군만마도 물리칠 수 있는 강함 힘을 발산하는데 단단한 모습과 표정으로 강직하면서도 이해심 있고 선한 근성을 지닌 훌륭한 여인의 연기를 감탄스럽게 해낸다. PG-13. Relativity.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팀북투 (Timbuktu)

사티마와 키다네와 토야가 텐트집에서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회교 근본주의 횡포-가족애 대비


사막에서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살고 있는 가정의 평화를 가차 없이 유린하는 회교 근본주의의 횡포와 공포 그리고 우행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아울러 가족애와 단결을 찬양한 아프리카국가 모리타니아의 작품으로 올 해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이다.
영화의 톤이 고르지 못하고 서술도 다소 일관성이 없어 감정적 충격이 약하긴 하나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회교 근본주의의 현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 시의에도 맞고 또 그것에 대해  배우는 바도 있는 매우 재미있는 드라마다.   
다소 단점은 있지만 인물들의 성격 개발과 묘사가 뚜렷하고 연기도 좋고 또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사막과 원주민들의 삶과 새빨간 진흙집을 비롯해 밝고 다채로운 의상 등 화면을 시적으로 가꾸어놓는 촬영이 아주 훌륭하다.
아프리카 말리의 팀북투는 최근에 회교 근본주의자들이 점령했다. 총을 멘 근본주의자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스피커로 각종 금기사항을 발표한다. 흡연과 축구와 음악이 금지되고 여자들은 뜨거운 낮에도 양말과 장갑을 껴야 한다. 
영화는 이렇게 심각하고 어두운 부분을 자주 유머로 다독이고 있는데 금기사항을 발표하는 사람의 언어가 지역 언어가 아니어서 불어와 영어로 통역해야 한다. 그리고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여자가 근본주의자들의 장갑을 끼라는 지시에 “아니 어떻게 장갑을 끼고 생선을 팔라는 말이냐”고 대어든다. 영화는 근본주의자들을 무기 좋아하는 꼭두각시처럼 그렸다. 
마을 밖의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소 몇 마리를 키우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키다네(이브라힘 아메드)는 아내 사티마(툴루 키키)와 12세난 총명하고 독립심 강한 딸 토야(레일라 월랫 모하메드가 예쁘고 연기도 똘똘하게 잘 한다)와 함께 근본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지배 밖에서       기타도 치고 머리를 가리지도 않고 다소 자유롭게 산다. 이 집의 마지막 식구는 소떼를 돌보는 고아 소년 이사. 키다네 집의 이런 행동은 동네에서 했다가는 공개 매질감으로 영화는 셀폰을 쓰는 현대의 암흑기를 고발하고도 있다.  
그런데 키다네의 소가 동네 어부가 쳐놓은 그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키다네와 어부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이 하찮은 분쟁 때문에 키다네 가족은 비극을 맞으면서 전연 기대치 않던 결말에 다다른다.  
보면 볼수록 피부로 직감하게 되는 감각적인 촬영과 아름다운 열사의 사막 그리고 토속적인 음악을 비롯해 월랫 모하메드의 연기 등이 좋은 볼만한 영화다. 아데라마네 시사코 감독. 
PG-13 정도. Cohen Media. 일부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켄지 미조구치의 흑백명작 2편

오하루의 인생 (Life of Oharu·1952)
마지막 국화 이야기 (The Story of the Last Chrysanthemum·1939)

오하루의 인생
(Life of Oharu·1952)


17세기 에도시대 자기 집 하인(토시로 미후네)과 사랑을 하다가 집에서 쫓겨난 뒤 귀족의 후처와 창녀와 시녀 노릇을 하면서 당시 남성위주의 일본사회의 계급과 신분의 엄격한 차별의 틀에 갇혀 평생을 불행하게 산 오하루(키누요 타나카)의 한 많은 일생을 그린 심오하고 아름답고 비극적인 드라마. 롱 테이크를 잘 쓰는 미조구치의 촬영이 눈부신 흑백명작.
얼굴과 몸이 모두 고운 오하루는 집에서 쫓겨나 군주의 씨받이로 팔려가 아들을 낳으나 다시 쫓겨나 집으로 돌아온다. 오하루의 아버지는 딸을 다시 창녀로 팔아먹으나 오하루는 여기서도 실패, 이번에는 남의 집 하녀로 팔려간다. 그러나 여기서도 쫓겨난 오하루는 부채 만드는 사람과 결혼하나 남편은 결혼 직후 강도에 피살된다.   
오하루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려고 하나 여기서도 남자문제 때문에 쫓겨난다. 이어 자기가 아들을 낳아준 군주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고 집안의 비밀유지를 위해 연금 상태에 처해진다. 오하루는 아들을 찾아 탈출하나 거지가 되고 만다. 148분. 30일 하오 7시30분. 해머 뮤지엄 내 빌리 와일더 극장(윌셔와 웨스트우드 310-206-8013)) ★★★★½(5개 만점)

마지막 국화 이야기 (The Story of the Last Chrysanthemum·1939) 

남편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여인의 감동적인 드라마. 1885년 도쿄. 유명한 카부키 배우의 양자인 키쿠노수케 오노에(연극배우 쇼타로 하나야기)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배우로서 성공하려고 노력한다. 아직 실력이 모자라는 오노에에게 솔직하게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은 오노에 가문의 갓난아기의 유모 오토쿠(카쿠코 모리).
그러나 키쿠노수케의 아버지가 아들과 유모 간의 스캔들을 염려해 오토쿠를 해고하면서 분노한 키쿠노수케는 혼자 연기 수업을 하려고 도쿄를 떠난다. 그리고 오노에를 내연의 처로 맞는다. 키쿠노수케는 아내의 격려를 받으며 연기를 연마, 마침내 도쿄의 유명한 카부키 단체에 입단할 기회를 맞는다. 이에 오노에는 남편을 위해 내연의 처 관계를 단절한다. 
그리고 마침내 키쿠노수케의 아버지도 오토쿠를 아들의 처로 인정하나 오토쿠는 폐병으로 죽음에 이른 처지다. 마치 늦가을 국화처럼 시든 오토쿠는 남편이 무대에서 명연기로 배우로서 승리하는 순간 숨을 거둔다. 흑백. 142분. 2월6일 하오 7시30분. 빌리 와일더 극장.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아니타의 분수



로마에 가면 동전 몇닢은 꼭 준비해야 한다. 레스피기와 포 에이시즈가 교향시와 노래로 찬미한 트레비 분수에 던지기 위해서다. 던질 땐 분수에 등을 대고 뒤로 던지면서 로마에 다시 올 것을 기원하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나도 몇 년 전에 로마에 갔을 때 트레비 분수에 두 번에 걸쳐 매번 1유로짜리 동전을 던졌으면서도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인파에 밀려 소원을 깜빡 잊었었다. 생각하면 지금도 아쉽기 짝이 없다.
콜러시엄과 스패니시 계단만큼이나 유명한 트레비 분수는 영화에도 많이 나온다. ‘로마의 휴일’에서는 로마 주재 미 신문기자 그레고리 펙이 평상복 차림으로 숙소를 빠져나온 공주 오드리 헵번의 사진을 찍으려고 이 분수에 견학차 온 어린 여학생이 목에 건 카메라의 끈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면서 빌려달라고 하다가 수행 여선생의 눈총을 받았다.
그리고 애천(Three Coins in the Fountain)에서는 로마에 사는 세 미국인 처녀들이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서 로맨스를 기원, 정말로 꿈이 이뤄진다. 오스카상을 받은 이 영화의 주제가는 프랭크 시내트라와 카니 프랜시스 및 포 에이시즈 등 유명 가수와 보컬그룹 등이 노래해 빅 히트를 했다.
그러나 트레비 분수 하면 대뜸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영화는 이탈리아의 명장 페데리코 펠리니가 감독한 흑백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1960)이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걸어 나온 여전사 아마존과 같은 풍만한 육체의 아니타 에크버그가 옷을 입은 채로 분수 안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슬로 댄스를 추는 모습이야말로 저 세상의 것처럼 몽환적이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아니타의 경악할 지경으로 거대하고 탐스러운 육체가 휘저어대는 율동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난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금발에 젖무덤의 절반이 훤히 드러나고 옆이 길게 찢어진 검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아니타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분수 속에서 긴 두 팔을 각기 아래위로 쭉 뻗은 채 눈을 감고 천천히 춤을 추는 모습(사진)은 몸 둘바를 모르게시리 유혹적인 제스처다. 이 장면 때문에 사람들은 트레비 분수를 지금도 아니타의 분수로 생각하고 있다.
옆에 있다간 다칠 것 같은 위험감을 느끼게 하는 폭발 직전의 힘차게 솟아 오른 거대한 두 개의 활화산과도 같은 젖가슴을 지녔던 스웨덴 태생의 배우 아니타 에크버그가 이달 11일 로마에서 83세로 타계했다.
39-22-37의 몸매를 지녔던 아니타는 20세에 미스 스웨덴에 뽑혀 부상으로 미국에 왔다가 할리웃에 들어섰다. 그러나 존 웨인이 나온 ‘블러드 앨리’와 딘 마틴과 제리 루이스가 나온 ‘화가와 모델’ 및 프랭크 시내트라와 딘 마틴이 공연한 ‘텍사스의 4인’ 등 아니타의 할리웃 영화들은 대부분 그의 육체미를 내세운 것들이었다. 그 중 그래도 나은 것이 ‘전쟁과 평화’에서의 헨리 폰다의 부정한 아내 역이지만 영화가 외화내빈이다.        
바이킹의 유전인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아니타는 영화의 질과는 무관하게 1950년대 할리웃의 섹스심벌로 군림했는데 이런 그를 대뜸 국제적 스타로 만들어준 감독이 펠리니다. 펠리니는 아니타의 강력한 아름다움과 가득한 육체와 함께 그의 위풍당당한 태도와 귀족적 자세에서 프리 마돈나의 자질을 포착하고 아니타를 ‘달콤한 인생’에 전격 발탁했다.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가십기자로 나온 ‘달콤한 인생’은 당시 로마의 옐로 저널리즘과 사회적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고 풍자한 작품으로 ‘파파라치’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아니타는 이 영화 이후로도 ‘보카치오 70’과 ‘광대들’을 비롯해 ‘인터비스타’ 등 펠리니의 영화에  나오면서 199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친구관계를 유지했었다.
뭇 남성들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아니타를 놓고 밥 호프는 “스칸디나비아식 전채 이후 스웨덴에서 나온 가장 훌륭한 산물”이라면서 “아니타의 부모는 이로 인해 노벨 건축상을 받았다”고 농담을 했다. 이 보다 한 수 더 뜬 농담은 유명 가수이자 배우였던 에셀 머맨의 것. 머맨은 “아니타는 생각하는 남자의 던스 캡(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벌로 씌우는 원추형 모자)이다-합이 두 개”라고 아니타의 벅찬 가슴을 찬양했다.     
그런데 아니타는 할리웃 활동 때 별명이 ‘아이스버그’(빙산)였다. 아니타가 할리웃의 절대군주들과 같았던 제작자와 감독들에게 대놓고 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니타는 섹스심벌답게 할리웃의 숱한 빅 스타들과 로맨스를 불태웠는데 타이론 파워, 게리 쿠퍼, 에롤 플린, 율 브리너 및 프랭크 시내트라 등이 아니타의 연인들이었다.     
아니타는 결혼을 두 번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사망할 때까지 로마 교외에 있는 집에서 혼자 살았다. 이 집은 ‘인터비스타’에서 나온다. 
나는 아니타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스웨덴 동료기자 마그너스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 내 엄마와 아빠가 스웨덴을 벗어나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린 아니타를 크게 칭찬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면서 “그러나 어린 나에겐 아니타는 겁나게 생긴 괴이하고 나이 먹은 여자였다”고 회답했다. 활화산 아니타는 이제 사화산이 됐지만 늘 검은 드레스를 입고 트레비 분수 안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슬로 댄스를 추고 있을 것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