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2월 2일 월요일

아니타의 분수



로마에 가면 동전 몇닢은 꼭 준비해야 한다. 레스피기와 포 에이시즈가 교향시와 노래로 찬미한 트레비 분수에 던지기 위해서다. 던질 땐 분수에 등을 대고 뒤로 던지면서 로마에 다시 올 것을 기원하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나도 몇 년 전에 로마에 갔을 때 트레비 분수에 두 번에 걸쳐 매번 1유로짜리 동전을 던졌으면서도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인파에 밀려 소원을 깜빡 잊었었다. 생각하면 지금도 아쉽기 짝이 없다.
콜러시엄과 스패니시 계단만큼이나 유명한 트레비 분수는 영화에도 많이 나온다. ‘로마의 휴일’에서는 로마 주재 미 신문기자 그레고리 펙이 평상복 차림으로 숙소를 빠져나온 공주 오드리 헵번의 사진을 찍으려고 이 분수에 견학차 온 어린 여학생이 목에 건 카메라의 끈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면서 빌려달라고 하다가 수행 여선생의 눈총을 받았다.
그리고 애천(Three Coins in the Fountain)에서는 로마에 사는 세 미국인 처녀들이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서 로맨스를 기원, 정말로 꿈이 이뤄진다. 오스카상을 받은 이 영화의 주제가는 프랭크 시내트라와 카니 프랜시스 및 포 에이시즈 등 유명 가수와 보컬그룹 등이 노래해 빅 히트를 했다.
그러나 트레비 분수 하면 대뜸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영화는 이탈리아의 명장 페데리코 펠리니가 감독한 흑백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1960)이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걸어 나온 여전사 아마존과 같은 풍만한 육체의 아니타 에크버그가 옷을 입은 채로 분수 안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슬로 댄스를 추는 모습이야말로 저 세상의 것처럼 몽환적이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아니타의 경악할 지경으로 거대하고 탐스러운 육체가 휘저어대는 율동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난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금발에 젖무덤의 절반이 훤히 드러나고 옆이 길게 찢어진 검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아니타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분수 속에서 긴 두 팔을 각기 아래위로 쭉 뻗은 채 눈을 감고 천천히 춤을 추는 모습(사진)은 몸 둘바를 모르게시리 유혹적인 제스처다. 이 장면 때문에 사람들은 트레비 분수를 지금도 아니타의 분수로 생각하고 있다.
옆에 있다간 다칠 것 같은 위험감을 느끼게 하는 폭발 직전의 힘차게 솟아 오른 거대한 두 개의 활화산과도 같은 젖가슴을 지녔던 스웨덴 태생의 배우 아니타 에크버그가 이달 11일 로마에서 83세로 타계했다.
39-22-37의 몸매를 지녔던 아니타는 20세에 미스 스웨덴에 뽑혀 부상으로 미국에 왔다가 할리웃에 들어섰다. 그러나 존 웨인이 나온 ‘블러드 앨리’와 딘 마틴과 제리 루이스가 나온 ‘화가와 모델’ 및 프랭크 시내트라와 딘 마틴이 공연한 ‘텍사스의 4인’ 등 아니타의 할리웃 영화들은 대부분 그의 육체미를 내세운 것들이었다. 그 중 그래도 나은 것이 ‘전쟁과 평화’에서의 헨리 폰다의 부정한 아내 역이지만 영화가 외화내빈이다.        
바이킹의 유전인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아니타는 영화의 질과는 무관하게 1950년대 할리웃의 섹스심벌로 군림했는데 이런 그를 대뜸 국제적 스타로 만들어준 감독이 펠리니다. 펠리니는 아니타의 강력한 아름다움과 가득한 육체와 함께 그의 위풍당당한 태도와 귀족적 자세에서 프리 마돈나의 자질을 포착하고 아니타를 ‘달콤한 인생’에 전격 발탁했다.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가십기자로 나온 ‘달콤한 인생’은 당시 로마의 옐로 저널리즘과 사회적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고 풍자한 작품으로 ‘파파라치’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아니타는 이 영화 이후로도 ‘보카치오 70’과 ‘광대들’을 비롯해 ‘인터비스타’ 등 펠리니의 영화에  나오면서 199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친구관계를 유지했었다.
뭇 남성들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아니타를 놓고 밥 호프는 “스칸디나비아식 전채 이후 스웨덴에서 나온 가장 훌륭한 산물”이라면서 “아니타의 부모는 이로 인해 노벨 건축상을 받았다”고 농담을 했다. 이 보다 한 수 더 뜬 농담은 유명 가수이자 배우였던 에셀 머맨의 것. 머맨은 “아니타는 생각하는 남자의 던스 캡(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벌로 씌우는 원추형 모자)이다-합이 두 개”라고 아니타의 벅찬 가슴을 찬양했다.     
그런데 아니타는 할리웃 활동 때 별명이 ‘아이스버그’(빙산)였다. 아니타가 할리웃의 절대군주들과 같았던 제작자와 감독들에게 대놓고 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니타는 섹스심벌답게 할리웃의 숱한 빅 스타들과 로맨스를 불태웠는데 타이론 파워, 게리 쿠퍼, 에롤 플린, 율 브리너 및 프랭크 시내트라 등이 아니타의 연인들이었다.     
아니타는 결혼을 두 번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사망할 때까지 로마 교외에 있는 집에서 혼자 살았다. 이 집은 ‘인터비스타’에서 나온다. 
나는 아니타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스웨덴 동료기자 마그너스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 내 엄마와 아빠가 스웨덴을 벗어나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린 아니타를 크게 칭찬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면서 “그러나 어린 나에겐 아니타는 겁나게 생긴 괴이하고 나이 먹은 여자였다”고 회답했다. 활화산 아니타는 이제 사화산이 됐지만 늘 검은 드레스를 입고 트레비 분수 안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슬로 댄스를 추고 있을 것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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