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2월 18일 수요일

덕수와 나




‘국제시장’의 윤덕수는 나보다 나이가 너댓 살 위이긴 하지만 그의 얘기는 나의 얘기다. 그래서 영화가 내겐 더욱 절실히 느껴졌다.
나의 아버지도 덕수의 아버지처럼 함경북도 출신인데 9.28 서울 수복 때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를 하면서 아버지를 납치해 가는 바람에 나도 덕수처럼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졸지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와 함께 덕수네처럼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가 셋방살이를 하면서 고생깨나 했다. 나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다행히 우리는 난리 통에도 헤어지진 않았다.  
나는 덕수처럼 독일이나 월남(군시절 자칫했으면 월남전에 파병됐을 뻔했지만)에는 안 갔지만 그가 산 한 많고 피눈물 나는 인생은 나도 경험해 잘 알고 있다. 아니 덕수의 인생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내 또래 대한민국의 모든 이산가족의 인생이다.
영화에도 나왔지만 부산 피난시절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달리는 군용차에 탄 양키 군인들이 던져주던 허쉬바 초컬릿과 리글리검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허쉬바를 먹을 때면 꼬마 때 맛보던 입맛이 되살아나는 것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달콤한 맛이 변함이 없으니 미제가 좋긴 좋네.
우리 고교 선배 현인이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하면서 노래 부른 국제시장이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며 흥남철수 때 헤어진 여동생 금순이(영화에선 막순이)를 그리워하던 영도다리도 아직까지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나의 피난시절의 기념물들이다.
난 특히 국제시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용두산 꼭대기에서 영화에서처럼 텐트를 친 초등학교엘 다니며 공부를 한데다가 어머니가 한때 국제시장 인근의 남포동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이 동네에 대해선 남달리 애착이 간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부산영화제에 갔을 때 국제시장과 남포동과 광복동 그리고 용두산과 자갈치시장을 헤집고 다닌 것도 꼬마 때의 과거가 내 심장을 찌르며 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국제시장에서 둘이 함께 사 먹은 노천가게 호떡이 꿀맛이었다.
이러니 내가 ‘국제시장’(사진)을 보면서 추억에 흥분하고 감상에 젖으며 눈물을 안 흘릴 재간이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모두들 운다는 소리를 들어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하고 갔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특히 여의도 광장에서 벌어진 이산가족 찾기 장면에선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렀는데 난 구태여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했다. 아마도 내가 헤어진 아버지가 그리워졌던가 보다. 우리 아버진 참 멋쟁이셨다. 그 옛날에 오하이오 주립대를 나오셨는데 난 지금도 내 방에 있는 중절모를 쓰고 짧은 바지에 반소매 상의를 입고 흰 양말에 백구두를 신은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장충단 공원에서 찍은 낡은 사진을 볼 때마다 그와 함께 보낸 짧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곤 한다.
덕수의 삶은 대한민국 역사의 축소도다. 남자들은 독일에 광부로 그리고 여자들은 간호사로 가 외화벌이를 했고 그 뒤로는 베트남과 중동에 가 달러벌이를 했다. 나는 한국의 한국일보 기자시절 김포공항엘 출입했는데 그 때 중동에서 떼를 지어 귀국하던 근로자들이 모두 하나씩 대형 외제 붐박스를 손에 들고 있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덕수는 부산에서 어렸을 때 영화를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부산시절 무성영화부터 본 뒤로 영화광이 되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나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사는 것같다.
영화를 보니 대양극장에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서툴게 그린 ‘로마의 휴일’ 간판이 붙었는데 내 단골극장은 범일동 집 동네 근처의 삼일극장이었다.
지지리도 못살던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모두 덕수들의 탓이다. 대한민국이 1960년대 중반에 가서야 보릿고개를 넘긴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발전은 정말로 기적이다. 그 기적이 ‘아버지’ 덕수들의 피와 땀으로 맺어진 것일진대 그들은 찬양받을 만 하다. 그래서 영화의 영어제목도 ‘나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송가’다.
영화 끝에 가서 덕수는 끝내 만나지 못한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이 고생을 자기 자식들 때가 아니라 자기가 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로 힘들었거든예”라고 고백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참으로 힘들고 슬픈 역사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덕수의 말처럼 아버지들은 자식 대신 고생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덕수들의 모든 자식들이 사서 고생할 것까지는 없지만 자신들의 과거는 간직하고 있었으면 하고 바랄뿐이다. 이 영화를 놓고 이념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연한 일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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