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스튜디오들은 배우들의 이미지와 재능 중 어느 것을 더 소중히 여겼는가.
“먼저 이미지고 재능은 그 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개성으로 스튜디오들은 대중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스타를 제조했다. 따라서 한번 코미디언이라고 여겨지면 그 딱지가 계속해 붙어 다녔다. 다른 역을 주질 않았다.”
-그런 제도 밑에서 일하면서 좌절감을 느꼈는가.
“그렇다. 난 배우로 성장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좋은 역이 주어져야 하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것은 TV의 라이브 드라마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땐 스튜디오가 하라는 대로 안 하면 쫓겨나던 때였다.”
-이제 와서 당신의 인생에서 무언가 바꾸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가.
“나의 어머니는 늘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사물을 네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세상사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난 어머니 말씀대로 산다.”
-명성과 돈이란 무엇인가.
“나는 젊었을 때 그런 것들을 가져 그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서서히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에 따라 살아야 한다. 난 나이를 먹으면서 이를 깨달았다.”
-배우 초년생 때 당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스타는 누구였는가.
“처음에는 전부 다였다. 내가 처음 주연한 영화는 린다 다넬과 공연한 별로 안 좋은 ‘욕망의 섬’이었다. 난 다넬의 팬이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다넬이 나보고 ‘긴장을 풀어요. 난 신인들의 행운이에요’라며 달래줬다. 그는 재주만 있었을 뿐 아니라 우아한 사람이었다. 난 그를 무척 사랑했다.”
-당신은 많은 웨스턴에서 자신의 말을 탔다고 했는데.
“그렇다. 나탈리 우드와 나온 ‘버닝 힐즈’에서도 내 말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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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우드와 공연한 웨스턴 '불타는 언덕' |
-어떻게 가수가 됐는가.
“그 전에 난 교회 성가대원이었다. 나탈리 우드와 내가 영화 홍보 차 전국을 순회하며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그 도시의 유명한 디스크 자키인 히워드 밀러가 내가 노래하는 것을 듣더니 음반 취입을 권유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가 소개한 닷 레코드로부터 내가 부르면 좋을 노래가 있다며 취입한 곡이 ‘영 러브’였다. 금요일에 녹음했는데 월요일에 차를 타고 선셋길을 달리다가 라디오로 들었다. 너무 놀라 팜트리와 충돌할 뻔했다.”
-책에서 자신 얘기하기가 고통스러웠는가 아니면 속 시원했는가.
“속이 시원한 편이었으나 난 사실 내 얘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쓰기가 쉽진 않았다. 쓰게 된 이유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얘기를 쓴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 내 얘기를 쓰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쓸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쓰기로 했다.”
-앤소니 퍼킨스 등 당신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 유족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는가
“아니다. 그냥 있는 사실대로 썼다. 책을 쓰는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은 필름 느와르의 전문가 에디 멀러였다.”
-당신은 ‘버닝 힐즈’에서 공연한 나탈리 우드 앞에서 웃통을 벗고 늠름한 상반신을 자랑했는데 감독이 벗으라고 했는가.
“스튜디오들은 늘 그랬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비프케익’(늠름한 남자)이라고 불렀다. 난 그 영화 뿐 아니라 도로시 말론과 나온 ‘배틀 크라이’에서도 상반신을 벗어 제쳤다. 그러다가 유럽영화의 영향으로 영화에서 사실성을 추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 배우들은 자신의 동성애를 자유롭게 밝히는데 그에 대한 당신의 소감은.
“난 내 동성애에 대해 결코 얘기하지 않았다. 편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에서 얘기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딱지를 붙이기를 좋아하는데 난 그 것이 싫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런 딱지가 아니라 우리는 다 인간이라는 점이다. 요즘에는 배우들이 자신들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나 난 그 것이 별로 좋다고 생각 안 한다 아직도 할리웃은 동성애자 배우를 주연으로 쓰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아가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지 않는가.
“내게 소셜 미디아는 무의미하다. 난 구식 사람이다.”
-당신과 일한 감독들 중에 누가 가장 인상적인가.
“내가 함께 일한 많은 감독들은 라이브 TV로 연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배우들에게 씨를 심어주는 사람들로 그 것을 가꾸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에게 달렸다. 내게 연기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가르쳐준 감독은 시드니 루멧이다. 그 때 우린 뉴욕에서 소피아 로렌과 공연하는 ‘마이 카인드 오브 우먼’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루멧이 내게 오더니 ‘탭 넌 너무 안전하게 연기를 하는데 그러려면 하루 종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침대에서 보내’라고 말 했다. 난 그 뒤로 이 말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요즘엔 어떻게 하루를 지내는가.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그리고 앨란과 함께 개들을 데리고 해변에 가서 산책을 한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아침을 만들고 컴퓨터를 검사한다. 이어 샤워를 하고 옷을 입은 뒤 헛간에 가서 내가 사랑하는 암말을 돌본다. 그리고는 다시 집에 돌아와 독서를 하거나 그냥 소일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다. 매우 덤덤한 삶이다.”
-당신 삶에 있어 어떤 때가 가장 행복했는가.
“난 좋고 행복했던 때가 여러 번이다. 어디로 가는가 하는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앨란을 만난 것이 내겐 매우 중요하다. 그로 인해 난 삶의 방향을 찾게 됐다.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어머니를 비롯한 내 가족과 앨란과 종교다. 난 이들에게 매일 감사한다.”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때는 언제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다. 스키를 타다가 심장마비에 걸려 들 것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그 때 난 ‘이 게 마지막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린 그런 걱정과 염려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난 회복한 뒤에 내가 쓰러졌던 곳엘 찾아가 하늘을 보고 감사한 뒤 다시 스키를 타고 내려갔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가.
“조화 이상이다. 자연은 영적인 것이다.
-배우 초년 시절에 당신의 넋을 앗아간 빅 스타는 누구였는가.
“그 땐 스타들에게 신비감이 있었다. 요즘엔 그 것이 사라졌다. 난 ‘시 체이스’라는 영화에서 존 웨인과 라나 터너와 공연했는데 라나를 만났을 때 내가 그에게 ‘난 어렸을 때부터 당신의 팬이었다’고 말하면서 어쩔 줄 모르게 황홀해했었다. 라나는 참으로 멋진 여자였다.”
-어떻게 그렇게 젊어 보이는가. 비방이 무엇인가.
“비누와 물이다. 그리고 이를 닦고 며칠에 한번 면도를 한다. 그 것이 전부다.”
-아직도 당신의 노래를 듣는가.
“난 내 노래나 영화를 듣지도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내 다른 히트송 ‘애플 블라섬 타임’을 앨란의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아직도 내 노래를 틀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내 노래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캔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