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올 해로 개봉 50주년이 되는 ‘졸업’(The Graduate^사진)을 본 것은 뒤 늦게 군에 입대해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 때 장안에 이 영화가 과거 다른 영화들과는 전연 다른 특이한 영화라는 입소문이 무성해 종로3가에 있던 단성사에서 봤다.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상낙원과도 같았던 미국의 상류층이 사는 풀이 있는 저택과 잘 차려입은 그들의 호화스런 삶 그리고 파격적인 섹스와 내용이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졌었다. 이와 함께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르는 사운드트랙의 노래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졸업’은 물질을 대변하는 “플래스틱”이라는 말을 대뜸 신유행어로 만들어 놓은 영화다. 대학을 막 졸업한 어눌한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에게 벤자민의 아버지의 친구가 “너의 장래는 이 것에 달려 있다”면서 조언한 말이다.
이와 함께 또 유명한 대사가 벤자민이 자기를 유혹하는 미시즈 로빈슨(앤 밴크로프트)에게 “미시즈 로빈슨, 당신 지금 날 유혹하려고 하는 거지요”라고 하는 말. 이 때 카메라가 미시즈 로빈슨의 벌린 다리 아래로 당황해하는 벤자민을 잡는다. 미시즈 로빈슨은 후에 벤자민의 애인이 된 일레인(캐서린 로스)의 어머니로 모녀가 한 남자를 놓고 얄궂은 삼각관계를 이룬다.
미국서 개봉되자마자 비평가들의 찬사와 함께 젊은 층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으면서 빅 히트를 한 신 청춘영화의 효시인 ‘졸업’은 미 상류층의 물질주의와 위선 그리고 성적 관행과 세대 차이를 비판하고 풍자한 혁신적인 작품이다.
영화가 개봉된 1967년은 베트남전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히피문화의 절정기였는데 이 영화의 무정부적 분위기는 당시 젊은이들의 불안한 시대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풍자영화치곤 유유자적하는 분위기를 지녔는데 이런 분위기를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르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미시즈 로빈슨’ 및 ‘스카보로 페어’ 등이 부드럽게 다독여주고 있다. 이들의 사운드트랙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했었다.
21세의 벤자민은 대학을 막 졸업하고 LA인근 부촌 패사디나의 집으로 돌아온다. 벤자민은 대학원 진학을 미루고 집에서 떠돌이처럼 겉돌면서 성공한 변호사인 아버지를 비롯한 기성세대에 수동적 반항을 한다.
이런 벤자민이 아버지의 파트너인 로빈슨의 부인의 유혹에 걸려들면서 호된 성인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처음에는 미시즈 로빈슨의 유혹에 저항하던 벤자민은 부인의 무르익은 육탄공격에 항복, 호텔에서 섹스를 즐긴다. 이 호텔이 지금은 중학교가 된 LA 코리아타운에 있던 앰배서더호텔이다.
외톨이인 벤자민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버클리대학생인 일레인. 그러나 일레인은 벤자민이 자기 어머니와 동침했다는 것을 알고 벤자민을 떠나 서둘러 한 때 사귀던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산타바바라의 교회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달려온 벤자민이 “일레인”하고 소리치자 일레인이 “벤”하고 메아리치면서 식장에서 달아난다.
이어 벤자민은 대형 십자가를 휘둘러 추격자들을 물리친 뒤 일레인과 함께 달려오는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벤자민과 일레인은 서로를 보면서 미소를 짓지만 곧 이어 얼굴 표정이 어두워진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졸업’은 당시 29세였던 호프만의 첫 주연영화(출연료는 7,000달러)로 어설프게 보이는 그는 재정적 성공만을 가치 척도의 기준으로 삼는 속물들 사이에서 이들과의 대화 불통으로 인해 애를 먹는 청년의 모습을 어정쩡하게 표현, 일약 청춘문화의 영웅이 됐다. 그런데 제작진은 처음에 벤자민 역으로 금발미남 로버트 레드포드를 쓸 생각이었다.
호프만과 함께 밴크로프트가 섹스에 굶주린 자극적인 중년부인의 연기를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사실적으로 해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 주연상(뮤지컬/코미디)을 탔다. 미시즈 로빈슨 역도 당초 도리스 데이에게 제의됐었다.
영화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으로 당시만 해도 영화계에서는 풋내기였던 마이크 니콜스의 두 번째 감독 작품이다. 신인답지 않게 원숙한 연출력을 발휘, 미 문화비평의 걸작을 내놓았다. 원작은 찰스 웹의 소설. 한편 ‘졸업’ 개봉 50주년을 맞아 오는 23일과 26일 전미 700여개 극장에서 영화의 디지털 프린트 판이 상영된다.
마침 이 달 초 영화의 노래를 부른 아트 가펑클(75-폴 사이먼과의 듀엣은 지난 1970년에 해체됐다)의 공연이 세리토스에서 열려 참석했다. “아직도 내가 노래를 부르다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공연을 시작한 가펑클은 ‘졸업’의 노래들과 ‘박서’ 및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 등 왕년의 자신의 히트곡들을 불러 올드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나이는 못 속인다고 가펑클은 고음에 가서는 다소 힘들어했고 가끔 가사도 잊었다. 내 청춘에로의 뒷걸음질과도 같은 향수에로의 여정이라고 생각하고 들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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