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4월 3일 월요일

‘나우 보이저’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편의 연애영화의 여자 주인공들의 눈은 모두 매우 크다. 데이빗 린이 감독한 ‘짧은 만남’의 실리아 존슨과 어빙 래퍼가 연출한 ‘나우, 보이저’의 베티 데이비스의 눈은 다 크고 수심이 깊어 그들의 영화 내용처럼 이루지 못할 사랑에 걸 맞는다.
둘 중에서도 도톰한 눈두덩 아래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를 지녔던 데이비스의 눈은 사이렌의 노래 소리와도 같은 치명적인 흡인력을 지녔다. 그래서 킴 칸즈는 ‘베티 데이비스 눈’이라는 노래를 불렀고 데이비스는 내가 흠모하는 여배우가 되었다.
데이비스는 할리웃 황금기인 1930년대와 40년대 탑 박스 오피스 스타로 시대를 군림했던 신경 과민한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성질이 불같아 자기에게 주어지는 각본이 나쁘다고 당시 할리웃의 제왕과도 같았던 전속 사 워너 브라더스의 잭 워너 사장을 상대로 법정소송을 벌였던 시대를 앞서간 여권운동의 선봉자이기도 했다.
데이비스는 또 경쟁심도 강해 자기와 같은 시대의 또 다른 스타 조운 크로포드와 벌였던 스크린 주도권 쟁탈전은 할리웃의 전설적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모두 오스카 수상자들인 이들은 나이 먹어 퇴물 취급을 받을 때 괴이한 드라마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1962)에 처음으로 공연하면서 치열하게 대결, 영화가 히트하고 데이비스는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둘이 이 영화를 만들 때의 얘기는 최근 FX-TV에 의해 ‘불화’(Feud)라는 시리즈로 만들어져 방영됐다. 데이비스 역은 수잔 서랜든이 크로포드 역은 제시카 랭이 각기 맡았다.
데이비스는 ‘여성 영화’에 강했다. ‘제저벨’(Jezebel^1938) ‘다크 빅토리‘(Dark Victory^1939) ’편지’(The Letter^1940) ‘작은 여우들’(The Little Foxes^1941) 및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1950) 등에서 모두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줬는데 그 중에서도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나우, 보이저’(Now, Voyger^1942)다.
이 영화는 어빙 래퍼가 올리브 히긴스 프라우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감독한 화사한 흑백 멜로드라마다. 소설 제목은 월트 위트맨의 시 ‘풀잎’ 중 ‘자, 항해자여 구하고 찾기 위해 돛을 올리세’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샬롯 베일(데이비스)은 보스턴 상류층의 폭군적인 어머니(글래디스 쿠퍼)의 가혹한 통제 밑에서 자란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혼기를 놓친 여자. 샬롯이 가정의 정신과의사 자퀴즈(클로드 레인즈)의 권유에 따라 남미 행 여객선을 탄 뒤 동승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제리 던스(폴 헨리드-레인즈와 함께 데이비스가 가장 좋아한 남자배우)를 만나면서 생애 처음으로 사랑의 희열에 젖는다.
둘은 짧은 로맨스를 남긴 채 헤어지는데 샬롯은 이 사랑으로 미운 오리새끼로부터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로 화사하게 변신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재회,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하나 결합하지 못하고 둘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
영화에서 샬롯이 말하는 마지막 대사는 할리웃이 남긴 최고의 대사 중 하나로 남아있다. 샬롯이 제리에게 “오, 제리, 우리 달을 요구하지 말아요. 우리에겐 별들이 있잖아요.”라고 말하면서 카메라가 서서히 별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영화에서의 ‘담배 두 개비’장면(사진)은 영화의 그 어느 면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이다. 제리가 담배 갑에서 담배 두 개비를 꺼내 자기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이어 제리가 건네준 담배 한 개비를 샬롯이 입에 무는데 두 입술의 뜨거운 접촉을 실제의 키스를 대신해 아름답게 상징한 장면이다. 이 제스처는 헨리드가 생각해낸 것이다.
영화는 빅 히트를 했고 데이비스와 쿠퍼가 각기 오스카 주^조연 상 후보에 오르고 풍성하고 로맨틱한 맥스 스타이너의 음악이 오스카상을 탔다. 이 영화는 고도의 오락성과 로맨티시즘 그리고 당시 시대상황에 거역하는 여성의 힘이라는 주제를 지닌 주옥같은 명화다.
데이비스는 반세기간의 연기생애를 통해 ‘데인저러스’(Dangerous^1935)와 자기 애인이었던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고 자기를 스타로 만들어준 ‘제저벨’로 두 차례 오스카 주연상을 탔다. 그리고 ‘다크 빅토리’ ‘편지’ ‘작은 여우들’ ‘미스터 스케핑턴’(Mr. Skeffington^1944) ‘이브의 모든 것’ 및 ‘스타’(The Star^1952) 등으로 모두 여덟 차례 주연상 수상후보에 올랐었다. 데이비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브의 모든 것’의 베테런 연극배우 마고 채닝 역으로 오스카상을 탔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카데미상의 작은 남자상에 오스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은 데이비스 때문이다. 데이비스는 이 남자상을 보고 그 뒷모습이 미들 네임이 오스카인 자기 첫 남편의 것을 닮았다고 말해 그 뒤로 오스카로 불리고 있다.
렘리극장은 ‘나우, 보이저’ 개봉 75주년을 맞아 오는 4월 4일 이 영화와 역시 데이비스가 주연하고 험프리 보가트가 공연한 갱스터 드라마 ‘마크트 우먼’(Marked Woman^1939)을 화인아츠(8556 윌셔)와 노호7(노스 할리웃) 및 플레이하우스7(패사디나)에서 동시상영 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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