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7월 13일 월요일

‘킬러즈’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1927년에 쓴 살벌할 정도로 직설적인 단편소설 ‘킬러즈’(The Killers)는 삶을 포기한 남자가 묵묵히 체념적으로 죽음을 맞는 운명적인 이야기다. 이 소설은 도대체 왜 이 사나이가 자기를 죽이러 온 살인자들을 환영하다시피 맞았는지를 캐어 들어가는 연역법적인 내용이다.      
이 글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이 독일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로버트 시오드마크 감독의 동명영화(1946)다. 살인과 강도와 남자를 유혹해 죽음으로 유인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필름 느와르의 장르를 정립해준 작품이다. 잔뜩 잡아당긴 활시위처럼 간장감이 팽팽하고 거칠면서도 시적인 감수성을 지닌 멋있는 영화다.
영화는 당시 무명씨였던 곡마단 곡예사 출신의 버트 랭카스터(32)의 스크린 데뷔작으로 그는 여기서 실존주의적 짐승과도 같은 역량을 과시, 대뜸 스타가 되었다. 랭카스터는 이 암담한 분위기의 영화에서 내면에 잠복한 힘을 지닌 어두운 남성미를 보여주는데 신선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랭카스터는 헤밍웨이의 팬으로 그의 소설은 다 읽어 더욱 주인공 스위드의 내면 연기를 묵직하면서도 차분하게 해낼 수 있었다고 후에 술회했다. 둘 다 터프 가이의 이미지를 지녔던 헤밍웨이와 랭카스터가 화면에서 호흡을 함께 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두 킬러가 간이식당에서 스위드의 숙소를 묻는 빛과 그림자의 대조가 강렬한 첫 장면부터 보는 사람을 영화 안으로 깊이 잡아끈다. 후에 ‘벤-허’의 음악을 작곡한 헝가리 출신의 미클로스 로자의 음악이 시종일관 운명을 재촉하는데 싸구려 호텔방에 드러누워 있던 스위드는 체념한 상태로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킬러들의 총알을 빗발처럼 맞으며 숨진다.
여기서 이야기는 스위드의 생명보험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보험회사 수사관(에드몬드 오브라이언)이 스위드의 과거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과거로 돌아간다. 전직 권투선수였던 스위드는 손을 다쳐 링에서 일찍 은퇴한 뒤 범죄세계 속에 발을 디디면서 현금수송차 강탈에 참여한다. 그를 범행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치명적인 여자(femme fatale)가 범죄단 두목의 요염한 정부 키티(에이바 가드너).
스위드는 검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담배연기를 자욱이 내뿜으면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허스키한 음성으로 ‘사랑을 더욱 알게 될수록’(The More I Know of Love)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키티를 보고 첫 눈에 마음을 빼앗긴다(사진). 키티는 스위드에게 현금수송차를 턴 뒤 현금을 챙겨 둘이 함께 먼 곳으로 튀자고 제의, 봉 같은 남자는 요부의 간계에 넘어간다. 그러나 돈과 보석에 눈이 먼 키티는 스위드를 배신하는데 결국 악인들은 다 지옥으로 간다.   
이 영화는 그 때까지 섹스 심벌로만 알려졌던 가드너가 처음으로 극적인 역을 맡아 연기력을 과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매우 육감적인 작품으로 각본은 모두 감독인 리처드 브룩스와 존 휴스턴이 썼으나 크레딧에는 앤소니 베일러가 올랐다.
‘킬러즈’는 1964년 단 시겔 감독(그는 원래 1946년도 영화의 감독으로 선정됐었으나 계약문제로 불발됐다)에 의해 새디스틱한 총천연색 영화로 리메이크 됐다. 두 영화는 20년의 사회변화를 뚜렷이 반영하듯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 모든 면에서 흑백판이 낫지만 신판도 속도감 있고 날카롭고 흥미 있다.
당초 이 영화는 NBC-TV에 의해 네트웍 사상 최초의 TV 영화로 제작됐으나 매우 폭력적인 데다가 케네디 암살 이후여서 극장용으로 나왔다. 나는 이 영화를 중앙극장에서 봤는데 리 마빈, 존 캐사베티즈, 로널드 레이건 및 앤지 디킨슨 등 호화 캐스팅과 긴장감 있고 빠른 진행 그리고 음모와 배신과 죽음의 얘기가 화려한 신파극 못지않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전직 자동차 경주선수 자니를 총으로 살해한 찰리(마빈)와 그의 동료 킬러 리(클루 구래거)가 태연히 죽음을 맞은 자니의 태도가 궁금해 그 까닭을 캐들어 가면서 자니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신판은 레이건의 할리웃과의 고별작품으로 그가 냉정한 범죄단 두목이라는 최초의 악역을 맡은 영화다. 그런데 레이건은 후에 악역을 맡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하는데 영화 개봉 2년 후 가주 지사로 당선됐다. 
레이건은 범죄 후 도주용 운전사로 쓰려고 자니(캐사베티즈)를 유혹해 범죄에 끌어들이는 요부 쉴라(디킨슨)의 남편 잭으로 나오는데 디킨슨은 자기 혼자 살아남으려다가 레이건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는다. 레이건은 끝에 자기가 고용한 킬러 찰리의 총알을 맞고 황천으로 간다.
마빈의 위풍당당한 자태와 냉소적인 대사가 일품인데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가 잭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쉴라에게 내뱉는 “숙녀씨, 나 시간 없어요”라는 대사가 기차게 멋있다. 크라이티리언(Criterion)이 두 영화를 함께 묶은 Blu-ray와 DVD를 출시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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