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7월 13일 월요일

두 번 죽은 사나이



영국 작가 그래엄 그린이 각본을 쓰고 영국 감독 캐롤 리드가 연출한 범죄와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1949)는 모든 것이 완벽한 불길한 분위기의 필름느와르다. 수수께끼 같고 유령과도 같은 주인공 사나이 해리 라임과 비엔나 지하 하수구 안에서의 음습하고 드러매틱한 도주와 추격,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명암을 뚜렷이 이용한 삐딱한 각도의 흑백촬영 및 부추기듯 몰아대다가 때로 비탄조로 숨을 죽이는 지터음악 등이 절대적 조화를 이룬 빼어난 영화다. 
흥미진진한 내용과 플롯과 화면의 완벽한 구성과 멋있는 연기 그리고 인물들만큼이나 중요한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전후 비엔나의 모습(6.25 후의 서울이 생각난다)과 함께 영화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못 이룰 사랑이 있는 작품으로 한 번을 보나 열 번을 보나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명화다.
나는 최근에 이 영화의 각본을 읽었는데 냉소적인 대사가 많은 글이 마치 하드보일드 형사소설처럼 간결 명확하면서도 강건하다. 어둡고 운명적인 로맨틱한 분위기가 작품의 때인 으스스하고 흐린 2월의 날씨처럼 몸 안으로 스며드는 영화는 캐롤 리드의 해설로 시작된다. 이와 함께 안톤 카라스가 작곡하고 연주하는 지터음악이 마치 이야기의 등을 떠밀듯이 맹렬하게 현을 뜯는다.
‘오클라호마 키드’와 ‘샌타페의 외로운 기수’ 같은 싸구려 웨스턴 소설작가로 무일푼의 술꾼이요 백수건달 스타일의 할리 마틴스(조셉 카튼)가 죽마고우인 해리 라임(오손 웰스-해리는 그린이 알고 지내던 영국인 소련 첩자 킴 필비를 모델로 했다-사진)의 초청을 받고 비엔나에 도착한다. 비엔나는 전승국들인 미·영·불 및 소련이 4개 지구로 분할해 관리하고 있다. 
할리는 도착 당일 해리의 아파트 관리인으로부터 해리가 며칠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오늘이 장례일이라는 말을 듣고 장례식이 열리는 중앙묘지로 간다. 그는 여기서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은 해리의 애인으로 신비감이 감도는 체코 태생의 연극배우 안나(알리다 발리)의 옆모습을 훔쳐본다.           
그리고 할리는 역시 장례식에 온 영국군 경찰 캘로웨이 소령(트레버 하워드)으로부터 해리가 군수물자 암거래상으로 희석한 페니실린을 팔아 이를 사용한 병든 아이들이 죽거나 불구가 되게 한 사악한 범죄자라고 알려준다. 이에 할리는 친구의 누명을 벗기기로 결심하고 해리의 사고사를 파 들어가다가 교통사고 직후 쓰러진 해리를 옮긴 세 명의 남자 중 신원이 불분명한 제3의 사나이가 누구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생전 해리를 알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 심문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안나로 할리는 안나와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서서히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 영화는 필름느와르의 특징 중 하나인 그늘진 사랑의 흔적이 역연한데 가망 없는 사랑을 막연한 그리움의 눈길과 텅 빈 얼굴 표정으로 표현하는 할리의 측은한 러브스토리라고 해도 되겠다. 결국 할리는 악에 대한 응징과 함께 안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해리는 영화가 시작된 지 1시간 후에야 나타난다. 모자를 쓴 채 두꺼운 외투의 깃을 올리고 장난기 있는 음모자의 미소를 띠며 남의 집 문간에 불쑥 나타난 해리를 빛과 어두움을 교차해 가며 찍은 촬영이 아찔하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클라이맥스는 비엔나의 지하 미로 같은 하수구에서 벌어지는 연합군 경찰과 해리 간의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 첨벙첨벙 소리를 내면서 하수를 밟고 뛰어 달아나는 해리의 실물보다 훨씬 큰 그림자와 땀 흘리듯 물이 흘러내리는 하수구 벽을 급작하게 비추는 플래시라이트 그리고 무거운 코트를 입은 채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도주하는 해리의 불안한 눈동자와 안면근육 및 맨홀 뚜껑을 필사적으로 들어 올리려는 해리의 손가락 등을 찍은 로버트 크래스커의 표현주의적 촬영은 조명을 신의 솜씨로 다룬 시각적 경이다. 그는 이 영화로 오스카상을 탔다. 그런데 비엔나에서는 현재 이 영화를 본 딴 ‘제3의 사나이’ 하수구 관광이 인기라고 한다. 
영화의 라스트 신은 영화사상 가장 멋 있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두 번 죽은 사나이 해리의 두 번째 장례 후 수레에 기대 선 할리를 본 척도 안 하고 나신의 떡갈나무가 길 양옆으로 늘어선 중앙묘지의 길을 안나가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 지나 간다. 카메라가 안나를 멀리서부터 가까이까지 따라가면서 찍은 이 장면은 우수가 가득히 배인 로맨틱한 라스트 신이다.  원래 그린이 쓴 각본의 마지막은 할리와 안나가 결합되는 해피 엔딩이었으나 영화의 미국측 제작자인 데이빗 O. 셀즈닉이 우겨 행복과 거리가 멀게 고쳤다. 그런데 중앙 묘지에는 해리와 함께 베토벤과 브람스와 슈베르트도 묻혀 있다.
나더러 무인도에 표류할 경우 영화 딱 한 편을 가지고 간다면 어느 것을 고르겠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제3의 사나이’를 고르겠다. ‘제3의 사나이’가 웰스의 출생(5월6일) 100주년을 기념해 4K로 복원돼 9일 까지 뉴아트극장(11272 샌타모니카)에서 상영된다. (310-473-8530)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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