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훈련 불평한 적 없어… 자기 일에 정열 있어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 7번 10점 만점
아들 하루하루 돌보는 일, 내 인생의 금메달 꿈
14세 때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에서 7차례나 10점 만점을 받으면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1개 그리고 동메달 1개를 탄 루마니아의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54)와의 인터뷰가 지난달 15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나디아’로 불리며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은 코마네치는 이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도 2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을 땄다. 코마네치는 지난 1996년 미국 올림픽 체조챔피언 바트 카너와 결혼, 9세난 아들을 두고 있다. 두 사람은 현재 오클라호마에서 살면서 바트 카너 체조아카데미를 경영하고 있으며 체조잡지 발행과 함께 TV 제작사 및 체조용구 공급사를 운영하고 있다. 단발에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는 코마네치는 처음에는 다소 굳은 표정을 지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액센트 있는 영어로 더러 유머도 섞어가면서 침착하고 진지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홍조를 띨 때는 예쁜 소녀 같았다. 코마네치는 인터뷰 후 하이힐을 신은 채 물구나무를 서면서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선수 때 고도의 힘든 훈련을 받았을 텐데 무슨 후유증이라도 있는가.
“없다. 난 훈련을 잘 견디어낸 편이다. 난 6세반 때부터 체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1984년에 은퇴했다. 몸 여기저기에 약간의 통증이 있고 발목을 삐기도 했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내 몸을 잘 조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운동선수들은 약물복용으로 문제가 많은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법을 어기면 책임을 져야 한다. 난 어렸을 때 무작위로 여러 가지 약물 테스트를 받았지만 그 땐 너무 어려서 약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 트레이너를 증오하기라도 했는가.
“아니다. 난 한 번도 고된 훈련에 불평한 적이 없다. 성공하려면 불편하나 아침 5시에 일어나 고된 훈련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정열이 있어야 한다. 난 사실 어떤 땐 충분히 연습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는가.
“그는 내가 자랄 때 우리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정부는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따라서 내 승리도 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조국을 떠난 것은 무언가 내 인생에 있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지금도 매년 대여섯 차례 루마니아에 간다. 가족도 있고 또 재단도 있기 때문이다.
-무슨 재단인가.
“스포츠를 할 능력이 있는데도 사정이 허락지 않아 못하는 아이들을 돕는 일이다. 그 일에 행복감을 느낀다.”
-지금의 당신에게 10점 만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스포츠와 나의 조국과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 인생을 바꾼 것이다. 난 14세 때 그것을 몰랐다. 내가 경기장에 나섰을 때 난 역사를 만들기 위해 경기에 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점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내겐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14세의 나디아 코마네치가 몬트리올 올림픽 경기에서 체조 묘기를 보이고 있다. |
-당신의 루마니아에서의 결혼식은 하나의 국가적 행사처럼 화려했는데 그에 대해 말해 달라.
“매우 감동적이었다. 내 나라와 함께 내 삶의 한 순간을 나누고 싶어 조국에서 결혼했다. 정부가 내 결혼식 날을 공휴일로 선포해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 안 가고 날 축하해 주었다. 내 결혼은 10점 만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에 관한 기록영화를 케이트 홈즈가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 말해 달라.
“어느 날 홈즈(탐 크루즈의 전처)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나에 관한 30분짜리 기록영화를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난 할리웃 사람이 나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신기해 응낙했다. 그래서 홈즈가 오클라호마에 와 사흘간 찍었는데 우린 그 때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영화 제목은 ‘영원한 공주’로 홈즈가 선정했는데 좋은 영화라고 본다.
-왜 오클라호마에서 사는가.
“내 남편은 젊었을 때 시카고에서 오클라호마의 코치에게 체조를 사사하려고 갔다. 그도 1976년 게임에 출전했는데 1984년 게임에서 2개의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는 오클라호마의 대학촌인 노만에 정착했다. 남편은 은퇴 후 자신의 코치와 함께 체조아카데미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거기 살게 된 것이다. 우린 LA 인근 베니스비치에도 집이 있지만 그것은 휴가용이다.”
-체조 외에 당신 인생에 있어 금메달 꿈은 무엇인가.
“아들의 하루하루를 돌보는 것이다. 아들은 지금 여러 가지 스포츠를 하고 있다. 우린 아들이 네 살 때까지 우리의 얘기를 안 해줬는데 어느 날 아들이 유치원에 갔다 오더니 ”엄마, 아빠 둘이 다 유명한 줄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리고나서 아들은 체조를 시작했다. 아들은 그밖에도 축구와 테니스도 즐긴다.”
-당신에게 승리란 무엇을 뜻하는가.
“난 매우 경쟁적이긴 하나 이기기 위해서 일을 하진 않았다. 내 첫 승리는 5세 때 유치원의 세발자전거 경주에서였다. 그 때부터 남보다 잘 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 같다. 승리란 매일 누군가에 의해 격려를 받고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나는 내 가족과 팀메이트들로부터 고무를 받는다.”
-어떻게 해서 체조를 시작했는가.
“6세 때 난 에너지가 넘쳐흘러 끊임없이 뛰고 움직였는데 내 어머니가 그런 나의 에너지를 발산하라고 체육관엘 데려갔다. 체조선수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트램폴린 위에서 실컷 뛰면서 집안의 가구를 부수지 말라는 뜻에서였다. 그 때 코치가 후에도 날 지도했다.”
-아들에게서도 당신의 재질을 보는가.
“그렇다. 또 아들은 나 같이 고집불통이고 경쟁심이 강하다.”
-선수 때 식사조절은 어떻게 했는가.
“영양사가 있어 고기와 샐러드와 과일을 기본으로 한 식단을 마련해 주었다.”
-아직도 그런 식으로 먹는가.
“그렇다. 그리고 난 매일 30분씩 운동을 한다. 15분간 달리고 역기를 들고 몸을 푼다. 몸에 맞게 하지 무리하진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체조선수가 당신의 평생의 직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내가 좋아 체조를 했는데 한 때는 어른이 되면 외과의사가 될 생각이 있었다.”
-남편과 어떻게 만났는가.
“우리 둘이 다 1976년 3월28일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아메리칸컵 대회에 나갔을 때 만났다. 난 14세 바트는 18세로 우리 둘이 다 승리했다. 그리고 우리 둘이 상을 받으러 단에 올라갔을 때 바트가 내 볼에 키스를 했는데 그것은 뉴욕타임스의 기자가 시켜서 한 일이다. 그 때 찍은 사진은 그 후 유명해졌다. 그리고 나와 바트는 모두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그와의 만남은 순전히 체조경기를 통해서였다. 그로부터 수년 후 내가 루마니아를 떠나 미국에 왔을 때 한 TV쇼에 나갔는데 그 때 바트가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것이 우리 결합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 같다.”
-메달들은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가.
“올림픽과 세계대회의 메달들은 오클라호마에 있고 그 밖의 메달들은 루마니아에 있다.”
-팬들이 당신을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대부분 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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