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베토벤의 ‘스프링’ 소나타를 들어야 할 계절에 LA 필이 연주하는 가을 기운에 흥건히 적셔진 브람스의 교향곡 제3번을 들으러 디즈니 콘서트홀에 갔다. 제3번의 제3악장 포코 알레그레토를 들으러 갔다고 해도 되겠다.
내가 이 곱고 우울한 멜로디를 지닌 교향곡에 연애적 감정을 갖게 된 것은 중년 남녀와 청년의 삼각관계를 그린 로맨스영화 ‘이수’(Goddbye Again·1961) 탓이다. 클래시컬 뮤직이 영화 속 계절과 장소 그리고 분위기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아나톨 리트박이 감독한 ‘이수’는 프랑솨즈 사강의 소설 ‘당신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원작.
가을 파리. 흑백 화면에 비가 내리고 주인공들이 코트를 입어 브람스의 멜랑콜리 무드가 뭉클하다. 40세의 우아한 실내장식가 폴라(잉그릿 버그만)에게는 멋쟁이 사업가 애인 로제(이브 몽탕)가 있지만 로제는 타고난 바람둥이여서 폴라는 소외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런 폴라 앞에 폴라의 미국인 고객의 25세난 아들 필립(앤소니 퍼킨스·사진)이 나타나 폴라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둘은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폴라는 자신이 필립을 사랑과 필요성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음을 깨닫고 로제에게 돌아간다.
영화에서 필립은 폴라에게 “당신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은 뒤 폴라를 브람스 교향곡 제3번 연주에 초청한다. 이 교향곡 제3악장의 아름답고 깊은 한숨과도 같은 멜로디가 영화 내내 갈 곳을 잃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시름시름 앓아 속병 걸리겠다. 이 악장의 주제는 실의에 빠진 필립이 들러 위스키를 마시는 재즈 바의 흑인 여가수(다이앤 캐롤)에 의해 노래로 불려지는데 동경과 체념이 잠긴 멜로디가 풍성한 하모니에 싸여 “라라라, 라라라” 하면서 만보를 하니 우울하다.
특히 제3악장은 시작한지 조금 있다 혼이 연주하는 주제의 첫 소절이 아름답다. 이 날 지휘는 제임스 개피간이 했는데 음악을 리드한다기보다 끌려가는 듯했다. 그의 지휘는 브람스에 어울리지가 않았다.
영화 때문에 세간에 잘 알려진 또 다른 클래시컬 뮤직은 두 중년 기혼 남녀의 못 이룰 사랑을 그린 ‘짧은 만남’(Brief Encounter)에 사용된 로맨틱하고 서러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이다(‘위크엔드’판 ‘엔터테인먼트’면 참조).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감상적일 정도로 로맨틱해 로맨스 영화에 잘 쓰여졌다. 작고한 ‘수퍼맨’ 크리스토퍼 리브와 제인 시모어가 나온 시공을 초월한 상사병의 극치영화 ‘시간 너머 어느 곳에’(Somewhere in Time)서는 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라프소디’가 나오면서 애간장을 태운다.
음악이 영화 때문에 영화제목의 별명이 붙여진 것이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제21번. 스웨덴의 줄 타는 여자와 유부남 장교의 비극적 사랑의 실화를 그린 ‘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에서 이 협주곡의 안단테가 달콤하니 흘러 이 곡에 ‘엘비라 마디간’ 협주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말러의 음악도 영화에 종종 쓰여진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토마스 만의 소설이 원작인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 말러의 교향곡 제5번의 곱기도 한 아다지에토가 영화 전편을 통해 흐르면서 작가 아센바하(더크 보가드)의 미에 대한 동경을 호소한다.
두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절묘하게 이어지는 영화가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Space Odyssey)다. 영화 처음에 우리의 조상인 원숭이가 무기로 삼은 동물의 뼈를 포효와 함께 공중 높이 내던지면서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나오고 이어 이 뼈가 우주를 슬로모션으로 비행하는 우주선으로 모양을 바꾸면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가 월츠를 춘다. 큐브릭은 영화에 클래시컬 뮤직을 많이 썼는데 ‘클라크워크 오렌지’(Colckwork Orange)에서는 인류애를 찬양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의 ‘환희의 송가’를 살인과 파괴를 즐기는 알렉스(말콤 맥도웰)의 폭력성 치료제로 쓴다.
바그너의 음악도 영화에 종종 이용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 나오는 ‘발키리의 기행’. “나는 아침의 네이팜 냄새를 좋아한다”는 미군 중령 킬고어(로버트 두발)가 베트콩을 살육하기 위해 공격용 헬기를 타고 날면서 천지가 진동하도록 틀어대는 것이 바그너의 ‘링’사이클 중 ‘발키리’에 나오는 이 음악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은 ‘멜랑콜리아’에 나온다.
이 밖에도 바흐의 ‘오르간을 위한 판타지와 퓨그 인 G’는 영화 ‘페드라’, 거쉬인의 ‘라프소디 인 블루’는 ‘맨해턴’,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플래툰’ 그리고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은 ‘성난 황소’에서 효과적으로 쓰여졌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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