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4월 12일 화요일

대그우드의 존댓말




부부님 여러분들은 서로 존댓말을 합니까? 또는 반말을 합니까? 아니면 남편은 반말을 하고 아내는 존댓말을 합니까? 우리 부부는 서로 반말을 하는데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반말을 하고 아내는 존댓말을 쓰던 대그우드와 블론디의 말투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대그우드가 낮에는 물론이요 잠자리에서 까지 블론디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번역을 하는데 듣기에 매우 어색하다.
가끔 아내가 보는 한국 연속극을 곁눈질로 봐도 남편이 아내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을 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아내에게 대그우드의 블론디에 대한 존댓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더니 “반말을 할 때가 더 다정한 것 같다”고 대답한다.
1930년 칙 영이 그리기 시작(지금은 칙의 아들 딘)한 이래 지금까지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한국일보에도 연재되고 있는 만화 ‘블론디’(Blondie)의 부부 대그우드와 블론디는 올해로 결혼 83년. 그런데도 대그우드는 지금도 출근과 귀가 때면 블론디를 꼭 끌어안고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하는 잉꼬부부다(사진).
둘은 지금은 매우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그들의 결혼과정은 순탄치가 않았다. 블론디는 처녀시절 골드디거(돈 많은 남자 노리는 여자) ‘후라빠’(flapper)여서 백만장자 집 아들 대그우드가 블론디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그의 아버지가 이를 결사반대 했었다.
이에 대그우드는 단식투쟁에 들어가 투쟁 28일 만에 아버지의 결혼 승낙을 받았으나 아버지는 대그우드를 유산상속에서 빼버렸다. 그래서 대그우드는 성질이 고약해(사실 마음은 착하다) 자기 사원들을 구타하는 디더스 사장의 건설회사에 월급쟁이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실수 연발의 대그우드는 보통 사람 중의 보통 사람으로 잠보요 먹보요 게으름뱅이다. 툭하면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으니 디더스에게 얻어터지는 것이 당연한데 그러고도 해고를 안 당하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디더스의 부하 직원 구타는 어쩌면 공처가인 그가 아내 코라에게 우산으로 얻어맞는 것에 대한 엉뚱한 화풀이인지도 모른다.
대그우드가 블론디 다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마도 샌드위치일 것이다. 수시로 배가 고픈 대그우드는 자다가도 허기가 지면 부엌으로 내려가 냉장고에 있는 먹다 남은 미트로프와 햄과 야채 등을 꺼내 몇 층짜리 샌드위치를 만들어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데 이 잡탕 샌드위치를  일컬어 ‘대그우드 샌드위치’라 부른다. 대그우드는 또 가끔 냉장고에 있는 닭다리도 꺼내 먹는데 나도 그로 인해 닭다리 밤참 버릇이 붙었다. 대그우드는 그렇게 먹어대는 데도 살이 안 찌니 알다가도 모를 일.
대그우드는 철이 덜난 어른 아이 같은데 그런 면에서 자주 대그우드 집에 들러 카우치에서 새우잠 자는 대그우드를 깨워 같이 놀자는 이웃집 꼬마 엘모가 더 어른 같다. 대그우드 하면 못 잊을 사람이 우체부 비즐리. 대그우드는 아침에 “5분만 더”하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출근시간에 늦었다며 상의를 입으면서 문을 열고 쏜살 같이 뛰어나가는데 이 순간 집 앞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던 비즐리와 충돌사고를 내곤 한다. 오죽하면 비즐리가 대그우드 집에 올 때 헬멧을 썼을까.  
만년 아이 같은 대그우드의 가정을 받쳐주는 기둥 구실을 하는 사람은 사실 블론디다. 블론디는 예쁘고 지혜롭고 명랑할 뿐 아니라 건전하고 실제적인 생활인이다. 그래서 가계를 돕는다고 수년 전에 케이터링업을 시작해 대그우드는 먹을 복이 터졌다. 그리고 커브가 진 몸매에 컬을 한 금발의 블론디는 늘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있어 섹시한데 블론디야말로 모든 남자가 바라는 섹시한 가정주부의 표본이다.
이젠 내 이웃 같이 친해진 대그우드와 블론디는 틴에이저가 된 두 남매 알렉산더와 쿠키 그리고 대그우드처럼 잠이 많은 애견 데이지와 함께 잘 살고 있다. 모범 부부요 가정이다.
나는 ‘블론디’와 아주 가까운 사연이 있다. 내가 1974년 서울의 한국일보에 입사, 처음에 외신부에서 근무했는데 그 때 조순환 외신부장(작고)이 종종 내게 신문에 연재하던 ‘블론디’의 번역을 시키곤 했다. 만화 번역은 기사와 달라 미국 서민들의 생활용어와 유머를 알아야 하고 또 말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번역해야 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만화를 들고 자매지인 영자지 코리아타임스의 미국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하곤 했다.
그 때 물론 대그우드는 블론디에게 반말을 하고 블론디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했었다. 이 때문인지 구시대의 유물인 나는 요즘의 대그우드의 블론디에 대한 존댓말이 영 귀에 거슬린다. 이 것이 시쳇말로 ‘폴리티칼리 코렉트’ 때문인가. 그렇다면 영어로 말해 ‘기브 미 어 브레이크’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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