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3월 28일 월요일

‘레버넌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지구의 기온을 변화시키고 있는 행위는 미친 짓”



제88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생존과 복수의 드라마‘레버넌트’(The Revenant)로 5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주연상을 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41)와의 인터뷰가 지난 11월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잔 수염을 기른 준수하게 생긴 레오는 농담을 섞어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지적이요 진지한 면을 잃지 않았는데 극히 개인적인 여자문제에 대한 질문에는“노코멘트”라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레오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와의 오랜 인연을 인식해서인지 곧 불쾌한 표정을 지우고 홍조를 띠면서 물음에 자상하게 대답했다. 레오는 이 영화로 HFPA가 주는 골든 글로브상(드라마 부문)을 탔다.

-당신은 영화에서 죽다 살아나다시피 하면서 말로 못할 고생을 하는데 그 경험에 대해 말해 달라.
“난 살면서 여러 번 극단적인 경우에 빠져 봤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혹독한 경험을 하진 못했다. 영화의 인물들인 모피사냥꾼들은 그 당시 혹한을 비롯한 온갖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난 그들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의지와 투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라면 과연 그런 조건 하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 하고 물어도 봤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신에게 큰 영향을 준 영화들은 무엇인가.
“젊었을 때 본 영화 중에서 나를 변화시킨 것은 ‘택시 운전사’다. 난 주인공 트래비스 빅클의 고독과 정신상태에 완전히 휘말려들었었다. 이 영화는 내게 있어 가장 위대한 독립영화 중의 하나다. ‘레버넌트’로 말하자면 유사한 서부영화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연상되나 이 실존적 영화는 그 어느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여태껏 경험할 수 없었던 독특한 여정으로 그래서 출연한 것이다.”

-200년 전에 일어난 주인공의 생존투쟁이 오늘 날에도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가.
“영화의 핵심인 주인공의 생존투쟁과 함께 영화가 얘기하고자 한 또 다른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개인 영리를 위한 자연자원 착취다. 그 때 사람들이 모피를 수집하기 위해 야생동물들을 살해하고 원주민들을 살고 있는 땅에서 몰아낸 일은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나는 기후변화에 관한 기록영화를 만들면서 세계 도처를 다녔는데 요즘에도 소위 선진국 인간들은 기름과 광물 등을 채취하기 위해 자연을 파손하고 또 원주민들을 살고 있는 땅에서 몰아내고 있다. 한 가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알레한드로(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원주민들을 묘사할 때 그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다룬 과거의 할리웃 영화들과는 달리 원주민들 간의 특성과 다양성과 다른 점 등을 가급적 충실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위해 어떻게 예행연습을 했는가.
“대규모 서사극의 틀 안에 인간의 내밀한 얘기가 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몇 달간 연습을 했다. 하루하루가 마치 연극을 위한 리허설과도 같았다. 내 생애 이런 영화 만들기는 처음으로 매일 같이 하루가 끝날 때 쯤 1시간 반가량 마치 마법처럼 태양이 빛을 발할 때 촬영을 해야 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스위스 시계처럼 정확해야 했다.”    
모피 사냥꾼 휴 글래스가 곰의 습격을 받고 있다.

-성공한 배우로서 하고 싶은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뭔가를 더 바란다는 것은 구역질나는 일이다. 나는 지극히 운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를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기온 변화에 대한 각성을 해주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가 지구의 기온을 변화시키고 있는 행위는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다.”

-제작자요 만화책 발행인이었던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나의 아버지는 내게 배우로서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환경보호 문제에 있어서도 함께 일한다. 아버지는 내가 젊었을 때 어떤 영화와 역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조언을 했다. 늘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또 중요한 얘기를 가진 영화를 고르라고 조언했다. 난 늘 아버지와 마주앉아 그의 얘기를 경청하곤 했는데 그것이 내가 받은 가장 훌륭한 교육이었다. 아버지는 매우 박식한 사람으로 내가 17세 때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 역을 맡은 것도 아버지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이 영화는 자연과 신과 함께 하는 영혼의 여정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혹시 영화를 찍으면서 영적인 경험이라도 했는가.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자연 속에서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 영화 만든다는 일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너무 힘들어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위해선 영적인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알레한드로와 나의 실존적 여행이나 마찬가지다.”

-당신이 인조 다이아몬드를 제작하는 연구소에 투자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다. 다이아몬드를 채취하기 위해 지구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다. 땅을 파고 자원을 캐내면서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고 다이아몬드를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자연을 해치면서 동물 모피를 수집하는 영화 속 인물들이나 개인적 산업적 목적을 위해 다이아몬드를 채취하는 사람들이나 다 마찬가지다.”

-조지 클루니도 결혼 안 한다고 말했다가 결혼했는데 당신도 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그런 문제에 대해 얘기를 했다간 터무니없게 과대 포장돼 보도가 되는 바람에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난 환경보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결코 함께 있을 수가 없다.”    

-당신의 인생 여정을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훌륭한 가족과 친구들과 삶을 즐기고 있다. 미안한 말이나 내 개인적 문제에 대해선 과거보다 더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좌우간 난 행복하다.”

-당신은 늘 “나는 행운아”다 라고 말하는데 영화 말고 개인적으로 어떻게 행운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나의 아버지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무엇을 하든지 흥미 있는 인생을 살려고 시도할 것이며 또 네가 어떤 직업을 가지든지 간에 매일 아침에 일어나 바지를 입을 때 행복하다고 느껴야 한다고. 내가 100% 이를 이룬 것은 아니나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그리고 이런 말이 마치 커다란 환상처럼 들릴지 모르나 나는 배우로서나 개인적으로 매일 같이 하루가 끝날 때 마다 내 주위에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당신의 아버지 말고 어머니는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나의 어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더 가차 없이 솔직하다는 점에서 잘 익은 포도주라고 하겠다. 어머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솔직한데 독일계여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솔직하려면 용감해야 한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에누리 없이 솔직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난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얘기한 뒤에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이지를 여러 번 해명해야 할 경우가 있었다. 정말 멋있고 흥미진진하지만 때로는 어머니의 솔직함을 말려야 할 필요가 있다. 난 어머니가 내게 그렇게 가차 없이 솔직할 때면 그냥 웃어넘긴다. 우리 집 사람들은 다 솔직한데 그것은 우리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당신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있기에 편안하게 느끼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여행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의 하나가 아마존 정글이다. 문명에서 떨어진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정수가 그대로 드러난 곳이다. 마치 내가 어릴 때 꿈꾸던 주라기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다른 하나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이다. 난 그렇게 마법적인 곳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아름다운 사원들을 구경하면서 며칠이고 모든 것을 잊고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영화가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 영화의 폭력은 그 시대에 정확하게 맞춰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폭력과 함께 아름다움도 잘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자연의 야만성과 아름다움을 잘 융화시킨 작품이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혹한으로 너무 추워 때론 카메라가 얼어붙어 작동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였으나 난 내가 어떤 영화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견뎌냈다.”

-영화에서 당신은 거의 말을 안 하다시피 하는데 그 것에 대해 말해 달라.
“그 점이 내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난 알레한드로에게 대사를 더 빼 달라고 졸랐다. 주인공의 인물과 성격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대사가 가급적 적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인공의 느낌을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데 과거 말을 많이 하는 영화에 여러 편 나온 나로선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말 대신 주인공의 본능에 의존하려고 했다. 그래서 내 연기는 즉흥적인 것이 많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배트맨 대 수퍼맨: 정의의 새벽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배트맨과 수퍼맨이 일전에 들어가기 전 서로 기를 올리고 있다.

수퍼맨과 배트맨 억지스러운 라이벌 스토리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워너 브라더스가 2억여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해 만든 이 만화가 원전인 수퍼히로 영화는 정말로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소음과 파괴와 특수효과로 뒤범벅을 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추물이다. 끝나는가 하면 또 계속되고 끝나는가 하면 또 쓸데없는 얘기를 하면서 시람 진을 빼놓는다. 상영시간 153분.
배트맨과 수퍼맨을 라이벌로 만들어 싸움을 시키느라 얘기를 억지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원더 우먼(갤 개도)까지 나와 난동에 참여한다. 감독 잭 스나이더가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 화면에 나와 “세계의 모든 팬들이 모두 즐기도록 내용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런 서툰 아이들 장난 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는 것은 실로 재앙이다.
배트맨과 수퍼맨 역의 벤 애플렉과 헨리 캐빌 외에도 하이텍 재벌로 수퍼맨 잡는데 혈안이 된  사악한 렉스 루터 역의 제시 아이젠버그 그리고 에이미 애담스(데일리 플래닛 기자 로이스 레인), 로렌스 피시번(데일리 플래닛의 편집국장), 제레미 아이언스(배트맨의 시종 알프레드), 다이앤 레인(수퍼맨의 인간 어머니 마사 켄트) 및 케빈 코스너(수퍼맨의 인간 아버지)까지 나오는 올스타 캐스트의 졸작이다.
연기마저 볼품 없는데 늘 부어 있는 애플렉과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큰 연기인 캐빌 그리고 오두방정을 떠는 아이젠버그와 광대 같은 피시번 및 ‘내가 여기 왜 나왔는가’하고 의문하는 듯한 아이언스와 소모되다시피 한 애담스 등이 다 그렇다.
수퍼맨이 메트로폴리스의 시민들을 사악하고 파괴적인 침입자들로부터 구하는 과정에서 그에 따른 피치 못할 부수적 파괴가 동반되자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류 구원자로 떠받들던 수퍼맨(인간일 때는 데일리 플래닛 기자요 로이스 레인의 애인인 클라크 켄트)을 두려워하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배트맨(인간일 때는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이 수퍼맨을 위험분자로 간주, 처치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두 수퍼히로의 마찰을 이용해 수퍼맨 나아가서 배트맨을 제거하고 자신이 창조해낸 막강한 파괴력을 지닌 흉물 둠스데이를 이용해 세상을 혼자서 말아 먹으려는 자가 루터. 그래서 눈에서 빨간 광선을 분출하는 케이프를 입은 수퍼맨과 박쥐 가면에 박쥐 옷을 입은 배트맨 간에 사생결단의 결투가 벌어진다. 누가 이길까요. 마지막 둠스데이가 고함을 지르면서 나선 싸움에는 원더 우먼이 끼어들어 여성파워를 과시한다. 한스 짐머의 음악이 소음에 가세한다. PG-13. 전지역.★★(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산하고인(Mountains May Depart)


타오(왼쪽)가 고향을 떠나는 리앙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현대 중국사회를 향한 지아 장케 감독의 메시지



급속히 자본주의화 하는 중국사회의 신흥 부르주아와 이런 흐름에 뒤떨어진 서민층의 문제와 함께 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의 혼란 등을 끊임없이 다루는 중국의 지아 장케 감독의 작품으로 이런 변화가 몰고 오는 상실과 후회를 매우 감정적이요 아름답고 또 사실적이며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1999년부터 시작해 2014년과 2025년의 시간대를 통과하면서 부의 추구와 삼각관계와 이별과 그리움 그리고 이민과 부자간의 문화와 세대갈등 등을 상세하게 다룬 멜로드라마로 전반적으로 슬픈 분위기를 지녔지만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결론을 맺는다. 연기와 중국의 팝송을 많이 쓴 음악 그리고 촬영 등이 다 좋은 영화로 한국 사람들에겐 남의 얘기 같지가 않을 것이다.
1999년 신년 전날 중국 북부의 휀양(감독의 고향). 교사인 아름답고 독립심 강한 20대의 타오(감독의 부인 자오 타오)는 함께 자란 두 남자 리앙지(리앙 진 동)와 진쉥(장 이)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다. 과묵한 리앙지는 탄광에서 일하고 주유소를 가진 저돌적인 진쉥은 자동차와 현찰을 지닌 금전만능형.
그런데 타오가 진쉥을 선택하면서 리앙지는 고향을 떠나는데 그와 타오의 이별 장면이 고요하게 가슴을 아픔과 슬픔으로 적신다. 진쉥과 타오는 결혼하고 진쉥은 갓난 아들 이름을 달러라고 짓는다. 상영시간이 50분 정도 지나고 2014년이 되면서 메인타이틀이 나온다. 리앙지는 타향에서 결혼해 아들을 보나 탄광에서 일하다가 암에 걸려 죽으려고 귀향한다.
타오는 이혼해 혼자 주유소를 경영하면서 넉넉하게 사는데 7세난 아들은 상하이에서 이름도 피터로 바꾼 투자가 아버지와 함께 산다. 타오는 아들이 자기보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 멀리서 그리워만 한다.
한편 리앙지와 타오는 리앙지의 아내의 주선으로 재회를 하는데 이 장면 역시 고즈넉하게 곱고 슬프다. 그리고 타오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달러가 장례식에 참석한다. 타오는 며칠 자기와 함께 있던 달러와 같이 기차를 타고 상하이로 가는 비행장까지 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간 소원했던 모자관계가 소생한다.
2025년. 달러는 아버지와 함께 호주에서 산다. 정체성과 문화갈등에 시달리는 18세의 달러(동 지지안)는 정신적으로 파산한 아버지와 격한 대결을 벌인다. 이를 위로하는 여자가 달러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여선생 미아(실비아 챙)로 미아는 달러에게 타오의 대리모 격. 끝 부분은 나이 먹고 혼자 사는 타오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 오는 벌판에서 타오가 미소를 지으면서 혼자 춤을 추는 라스트신에서 모든 갈등과 그리움과 상실과 고독과 후회가 아름다운 타협을 맺는다. 자오 타오의 연기가 빛이 난다. 성인용. 일부 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웨스트월드’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인간 이세돌과의 바둑대결에서 승리하자 사람들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런데 기계는 인간을 상대로 백가몬과 체커스 및 체스게임을 벌여 이긴 지가 이미 오래돼 알파고의 승리는 올 것이 온 것이라고 봐도 되겠다.
알파고의 이세돌 제압이 있기 전에 인간은 이미 기계의 노예가 되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젠 없으면 못 사는 스마트폰을 맘몬처럼 섬기며 살고 있다. 매년 모양을 바꿔 나오는 스마트폰을 사려고 가게 앞에 장사진을 친 사람들을 보면 마치 맘몬에게 경배하기 위해 신전 앞에 모여든 우상숭배자들을 보는 것 같다.
컴퓨터와 로봇은 이미 인간의 활동영역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호텔 심부름꾼과 자동차 조립 같은 단순직에서부터 병원과 금융계를 비롯해 무대와 스크린의 배우 그리고 작곡과 그림을 그리고 소설과 기사도 쓰고 있다. 기자인 내 자리도 위태롭다.    
내가 기계가 사람 잡겠구나 하고 절실히 느낀 것이 스탠리 쿠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빨간 눈동자처럼 생긴 컴퓨터 ‘핼’을 보면서였다.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독순술까지 지닌 ‘핼’은 우주선 디스커버리 1호의 전 기계와 생명보조 체계를 책임지고 있는데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는 ‘핼’이 오류를 범하면서 우주인들이 ‘핼’의 전원을 끊어버리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두 우주인의 대화를 멀리서 독순술로 읽은 ‘핼’은 자기를 죽이려는 인간을 먼저 제거한다. 그런데 ‘핼’의 오류가 과연 진짜 오류인가 아니면 인간을 제거하고 자신이 우주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핼’의 술책인가.
영화는 일찌감치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고 또 그것들이 인간 행세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리츠 랭의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와 채플린의 무성영화 ‘모던 타임스’가 기계화된 인간세계를 묘사한 대표적 작품이다.
공상과학 공포영화 ‘악마의 종자’에서는 A.I. 프로테우스가 인간 모습의 자기 아이를 낳기 위해 자기를 발명한 과학자의 아내 수전(줄리 크리스티)의 세포를 추출한 뒤 정자를 합성해   강제로 임신을 시킨다. 컴퓨터와 인간 사이의 인공수정이다. 스필버그도 ‘A.I.’에서 사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된 로봇소년 데이빗을 통해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공존을 탐색했다.
얼마 전에 합성고무 소재로 인간의 피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성관계가 가능한 인공지능을 갖춘 실제 여자와 같은 섹스로봇 ‘록시’가 출시된다고 해서 ‘인간과 로봇과의 성관계’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반대론자들은 “이것은 남녀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해롭다”고 주장한 반면 찬성론자들은 “인공지능을 갖추면 주인과 대화도 하고 취향까지도 스스로 파악할 수 있어 인간끼리의 관계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 ‘허’(Her)의 테오도어(와킨 피닉스)도 여자의 음성으로 인간화한 지적인 컴퓨터 시스템 새만사(스칼렛 조핸슨)와 사랑의 밀어를 나눈다. 아주 로맨틱한데 육체가 없는 음성과의 사랑의 대화여서 애잔하다. A.I.가 인간지능을 초월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지난해에 나온 ‘엑스-마키나’의 인간과 똑같이 생긴 로봇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더-올해 ‘덴마크 여인’으로 오스카 조연상)가 그렇다. 에이바는 자신에게 A.I.를 준 창조자 인간을 살해하고 자유를 찾아가는데 이야말로 인간의 신에 대한 반역과도 같다.
기계가 사람을 잡는 영화 중에서 진짜로 흥미진진한 것은 소설 ‘주라기 공원’을 쓴 마이클 크라이턴이 각본을 쓰고 감독으로 데뷔한 ‘웨스트월드’(Westworld·사진)다. 공상과학 웨스턴 스릴러인 영화의 무대는 미래의 성인용 위락공원 ‘델로스’. 이 곳에는 사람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로봇들이 사는 ‘웨스트월드’와 ‘중세세계’ 및 ‘로마세계’ 등 3개의 세계가 있어 사람들은 하루에 1,000달러를 내고 셋 중 한 곳을 골라 과거를 실제처럼 체험할 수가 있다.
두 친구 존과 피터가 선택한 곳이 ‘웨스트월드.’ 옛날 서부와 똑같은 세계로 바에서 로봇술꾼들과 싸움도 할 수 있고(물론 인간이 이긴다) 로봇창녀와 섹스를 즐길 수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분되는 것은 로봇건맨(율 브린너-움직이지 않는 눈동자와 무표정한 얼굴이 로봇 같다) 과의 결투. 건맨이 존과 피터에게 시비를 걸어 총격전이 벌어지고 죽는 것은 로봇. 죽은 로봇건맨은 수리 후 이튿날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로봇들에게서 이상이 생기고 이들이 통제실의 말을 안 듣고 제 멋대로 행동하면서 지금까지 자신들을 희롱의 대상으로 즐기던 인간들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로봇건맨에게 다시 결투를 신청한 존이 살해되고 이어 로봇이 피터를 살해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격하면서 피터는 숨이 턱에 차도록 달아난다. 기계의 인간에 대한 역습이요 반란이다. A.I.가 인간을 지배할 날이 멀지 않은지도 모른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3월 22일 화요일

TV인터뷰 통해 트랜스젠더 공개 전직 육상선수 케이틀린 제너




“여성이 된다는 것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뜻”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10종 경기에서 세계기록을 경신하며‘세계 최고의 육상선수’로 치하를 받았던 브루스 제너는 지난해 4월 ABC-TV의‘20/20’에 출연, 다이앤 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여성으로 성전환한 케이틀린 제너라는 사실을 고백해 세계적인 화제가 됐었다. 그 후 케이트(66)는 케이블 TV E! 엔터테인먼트의‘나는 케이트’(I Am Cait)라는 프로를 제작하고 같은 성전환 여성들과 함께 출연, 성전환자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고치는데 노력하고 있다. 케이트와의 인터뷰가 지난 15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긴 갈색머리에 흰 재킷 그리고 베이지색 스커트에 역시 베이지색 하이힐을 신은 케이트는 큰 귀고리에 빨간 립스틱을 비롯해 얼굴에 화장을 하고 손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여성 차림을 했지만 큰 키와 우람한 체격 그리고 굵고 큰 손이나 얼굴은 남성 같았는데 스커트 아래 드러난 맨살 다리는 매우 가늘었다. 케이트는 굵은 남자 음성으로 유머와 위트를 섞어가면서 진지하고 솔직하게 질문에 대답했는데 매우 명랑하고 씩씩한 여자였다. 그의 솔직함과 함께 비로소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터뷰에는 케이트와 함께 다른 성전환 여성 3명이 동석했는데 다음은 케이트의 발언만 기록한 것이다.             

-당신에게 여성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내게 있어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지금 여성적인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데 그것들은 삶의 작은 것들이다. 성이란 모든 사람에게 있어 하나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성과 함께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배우고 있다. 난 평생을 이 여자를 내 안에 더불어 살아왔다. 이제야 말로 이 여자가 밖으로 나와 살 때이고 작은 브루스는 안으로 들어가 살 때이다. 나는 아주 많은 점에서 아직도 같은 사람이다.”

-여성으로 된 이후 세상의 편견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가.
“내가 내 쇼를 만든 이유는 내 평생 함께 살아온 이 여자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난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세 번 결혼에 10남매) 내 삶도 질서정연하며 그리고 내 정체에 대해 하나님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야 말로 내 삶을 솔직하게 살고 또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성전환자들과 동성애자들 그리고 양성애자들(LGBT)에 대한 심각한 문제는 너무나 많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자살하고 또 살해를 당한다. 이 문제는 운동경기를 비롯해 내가 지금까지 한 다른 일들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성전환 이후 참으로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그것에 대해 바른 대응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모든 성전환자들을 위해 옳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나와 함께 쇼에 나오는 여자들은 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인데 난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도전임에는 분명하나 나는 앞으로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LGBT 사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웠다.”    
-브루스에 대해 그리운 점은 무엇인가.
“그는 아직도 내 안에 있다. 세상을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요 또 대인관계도 같다. 나는 아직도 그처럼 비행기를 조종하고 자동차 경주에도 나간다. 난 또 그처럼 모든 재미있는 일들도 즐길 줄 안다. 여자라고 그처럼 못하란 법 없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 이름과 성을 바꾸는 과정은 슬펐다. 그러나 이제 브루스는 갔다. 그가 참 좋은 사람이었기에 그 같은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훨씬 더 편안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음으로써 세상에 다른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의 성전환에 대한 미디어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미디어는 잔인할 수 있다. 나는 다이앤 소이어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2년 이상을 낌새를 알아챈 태블로이드에 매주 시달려야 했다. 늘 대여섯 대의 파파라치 차들이 마켓을 비롯해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들이 팔아먹지 못하도록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 정말 끔찍했다. 나만이 아니라 내 자식들과 어머니와 온 가족에게까지 잔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미디어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우리들은 정당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브루스 제너(왼쪽)와 배니티 페어표지모델 케이틀린 제너.

-사회는 아직도 여자를 2류 계급으로 취급하는 남성위주의 사회다. 여자가 된 이래 그런 취급을 받아 봤는가.
“내 얘기가 배니티 페어지에 나면서 나는 그 즉시 사람들로부터 케이틀린으로 취급됐다. 참으로 극적인 변화였다. 이제 난 더 이상 브루스로 세상에 나설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됐다. 부정적인 면도 없는 것은 아니나 긍정적인 면이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저 행복할 뿐이다. 사람들은 왜 남성의 세력 있는 역을 바꾸려고 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에 할 말은 그것은 내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여성적인 것이 갖고 있는 힘이다. 난 늘 강한 여자들과 함께 있어 왔는데 그들은 여성적인 게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모든 여성들은 이를 배워야 할 것이 다.”

-당신의 새 인생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난 이미 만족과 행복이라는 목표를 이뤘다. 다음은 우리 같은 다음 세대들을 보다 좋은 위치에 올려놓는 일이다. 그 과정은 내 생애에서 채 다 이루지 못할 긴 여정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들의 얘기는 더 이상 감춰진 것이 아니다. 그것만 해도 큰 시작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문제로 이것은 세계적인 문제다.”

-성전환에 대한 당신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모두 훌륭한 아이들이다. 내 아들은 내게 ‘아버지 난 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왔지만 지금보다 더 자랑스러운 때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린 딸들은 처음에 모두 대경실색을 했다. 그러나 내 얘기가 TV로 나가면서 레이디 가가와 엘튼 존 및 제니퍼 로페스 같은 유명 인사들로부터 축하한다는 문자 메시지가 빗발치듯 날아들자 딸들은 그 때야 비로소 내가 할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 같다.”

-성전환 여성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인식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통계에 의하면 성전환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전체의 8%에 지나지 않는다. 우린 이 수치를 높이고 싶은 것이다. 내 쇼에 나오는 여자들은 다 지적이요 멋있고 영리하며 우습고 근면하고 또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난 세상이 이들을 제대로 보게 하려고 쇼를 만든 것이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느낀 심정이 기억나는가.
“난 어려서부터 성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리고 난 학생 때 난독증자로 열등감에 빠졌었는데 스포츠에 능해 그것으로 열등감을 해소하고 나에 대한 가치관을 얻었었다. 올림픽 선수가 될 줄은 몰랐다. 몬트리올에서 세계기록을 깨고 금메달을 탄 다음 날 나체로 금메달을 목에 건채 거울을 보면서 ‘자 이제 다음 할 일은 무엇이지’하고 생각했었다. 난 늘 일에 매달리면서 내 성적인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성전환을 하려고 결심했으나 하지 못했다. 그 때부터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에 비로소 나이 65세에 그 문제에 심각하게 맞부딪치면서 내 정체를 찾기로 한 것이다.”

-데이트에 대해 생각해 봤는가.
“난 이미 가족이 있고 또 아이들이 있어서 내 중요한 일은 아이들 돌보는 것이다. 그래서 데이트는 내게 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데이트는 쉬운 일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요리 잘 하는가.
“어느 정도 하지만 잘 하진 못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의 황금시절(My Golden Days)


폴(왼쪽)이 여고생 에스테르에게 다가가 구애하고 있다.

순수한 청춘의 사랑이 보내는 추억의 편지


청춘의 사랑은 아름답고 달콤하고 황금빛으로 빛나며 또 그 이별은 쓰라리고 슬프다. 내용과 외양 그리고 젊은 두 주인공의 절묘한 화학작용과 연기를 비롯해 모든 것이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이 영화는 청춘의 사랑에 열병을 앓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추억의 편지와도 같다.
로맨틱하면서도 사실적이요 진지하며 또 아주 밀접하고 내밀한데 회상식으로 서술되는 지나간 뜨거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여서 노스탤지어와 우수와 옅은 회한이 가득하다. 청춘의 사랑이란 맹목적이요 영육을 불사르는 것이어서 그런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폴과 에스테르를 보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달아오른다.
그리고 그들의 이별마저 미몽과 같은 아쉬움 속에서 아름답게 받아들이게 된다. 미치도록 사랑했으니 헤어짐마저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풍성한 사랑의 얘기는 신인인 두 젊은 배우 캉탕 돌메어와 루 로이-르콜리네의 완벽한 콤비에 의해 화폭을 가득하니 메운다. 과연 청춘은 이름답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시대의 변화 그리고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도한 이 영화는 ‘어린 시절’과 ‘러시아’ 그리고 ‘에스테르’ 등 3부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회상되는 ‘에스테르’ 부분이 90분으로 가장 길다. 성장한 인류학자 폴(마티외 아말릭)이 오랜 외유 끝에 타지키스탄에서 관리직을 맡기 위해 파리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러시아’ 부분은 마치 냉전시대 스파이영화 스타일로 진행된다. 학창시절의 폴(돌메어)이 필드트립 차 소련에 가면서 소련을 탈출하려는 자기 또래의 유대인에게 자기 여권을 주면서 폴은 무국적자가 된다. 이 사건은 폴의 그 후의 삶에까지 오래도록 잔영을 드리우게 된다.
영화의 가장 핵심은 회상되는 ‘에스테르’ 부분. 10대의 내성적이요 내면에 더러 빈 곳이 있는 폴이 작은 마을 고향 루베의 고교생인 탐스럽게 익은 아름다운 에스테르(로이-르콜리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자기감정을 드러낸다. 도도하고 자신만만한 에스테르는 구애하는 남자들이 많고 또 그렇게 호락호락할 여자는 아니지만 폴의 순수함에 이끌려 둘은 관계를 시작한다. 둘의 첫 대면이 가슴의 희롱처럼 아질아질하니 마음에 다가온다.
그런데 폴이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나면서 둘은 이별을 하게 되는데 때는 인터넷 이전의 시대여서 둘은 전화와 편지로 그리움을 보내고 받는다. 때로 그들이 카메라를 보고 읽는 사랑의 글들이 구구절절이 시인데 둘이 서로 그리워 애를 태우고 호소하고 만나서 희열하고 다시 헤어지면서 아파하고 슬퍼하는 모습에서 사랑의 노골적인 얼굴을 읽게 된다. 이러기를 10년. 그동안 둘 사이에는 수많은 편지가 오고 간다. 사랑의 현실이 심금을 울린다.
둘 다 아름답고 백지처럼 순수한 모습의 돌메어와 로이-르콜리네가 사랑하는 청춘의 불안과 초조, 그리움과 고통과 희열 그리고 흥분과 철부지 같은 순진성을 참으로 자연스럽게 묘사하는데 이들의 이런 연기와 잘 배합된 화학작용이 영화에 서술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둘 외에도 그들을 둘러싼 주변 젊은이들도 다 연기를 잘 한다. 촬영도 황금빛처럼 아름답고 풍성하니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아르노 데스플르샹(‘크리스마스 이야기’ ‘왕들과 여왕’) 감독. 성인용.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길다(Gilda)


요염한 길다가 선정적인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다.

‘섹스의 여신’리타 헤이워드 스타로 만든 영화


 ‘섹스의 여신’이라 불린 리타 헤이워드를 수퍼스타로 만들어준 1946년 작 흑백 필름느와르로 ‘최고급의 쓰레기’ 같은 영화라는 평을 들었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난 이브닝가운을 입은 클럽 여가수 길다(헤이워드)가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풍만한 허벅지를 노출한 채 어깨까지 오는 긴 장갑을 천천히 벗어던지며 느린 템포의 음악에 맞춰 온 몸을 뒤틀면서 ‘풋 더 블레임 온 메임’이라고 노래 부르는 장면 하나로 할리웃 영화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다.
삼각관계와 범죄와 살인 그리고 뜨거운 정열이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떠돌이 도박꾼 자니(글렌 포드)는 카지노 클럽 주인 밸린(조지 매크레디)에게 고용돼 클럽의 매니저가 되고 아울러 그의 심복이자 친구가 된다. 
여행을 떠났던 밸린은 관능적인 길다를 데리고 돌아오는데 운명의 장난이랄까 길다는 과거 자니의 애인. 아직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자니와 길다는 간절한 눈길을 나누는데 밸린은 자니를 자기 아내가 된 길다의 바디가드로 만든다. 
나치가 조종하는 범죄조직과 연루된 밸린은 조직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경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다가 바다에 추락한다. 의리의 사나이 자니는 자기를 떠났던 길다가 다시 사랑의 불길을 점화시키려고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는데 이 때 죽은 줄 알았던 밸린이 나타나 배신녀 길다와 자니를 처치하려고 달려든다.
이 영화는 헤이워드를 위해 만든 영화로 그는 이 영화로 인해 세상의 뭇 남자들로부터 ‘요부 길다’로 여겨지면서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리타는 중동의 왕족 알리 칸의 아내였는데 결국 이들의 관계도 아내에게서 길다를 찾는 남편 때문에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컬럼비아사 작품으로 감독은 찰스 비더. 22일 하오 1시 LA카운티 뮤지엄(윌셔와 페어펙스) 내 빙극장. 
한편 29일 하오 1시에는 역시 헤이워드가 당시 남편이었던 오손 웰즈(감독 겸)와 공연한 흑백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자’(The Lady from Shanghai·1948-★★★★)가 빙극장에서 상영된다. 아일랜드 태생의 항해자요 모험가인 마이클(웰즈)이 나이 먹은 백만장자 배니스터(에버렛 슬로에인)와 그의 탐스러운 아내(헤이워드)와 함께 배니스터의 태평양 요트(할리웃 황금기의 수퍼스타 에롤 플린의 요트 ‘자카’) 항해에 동행하면서 복잡하고 괴이한 살인사건에 휘말려든다. 촬영이 눈부신 특이한 스릴러로 영화로 클라이맥스의 ‘거울의 방’에서의 총격장면이 아찔하다.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교사형’




‘극동의 고다르’라 불린 일본 감독 오시마 나기사(1932~2013)는 유난히 차별 받는 재일 조선인에 대해 연민하고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오시마의 영화로 잘 알려진 것은 성(욕)의 본질을 집요하게 캐들어 간 ‘감각의 제국’과 데이빗 보위가 나온 전쟁포로 드라마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그러나 그가 1960년대 만든 재일동포와 한국인들에 관한 몇 편의 영화와 TV 작품은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오시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죄책감 불감증에 걸린 일본을 비판하고 아울러 만행의 피해자인 재일동포 그리고 나아가서 일한관계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1960년대 한국을 방문, 3편의 TV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일본군으로 참전한 재일동포 부상군인들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대우를 고발한 ‘버려진 황군’과 ‘청춘의 비석’ 그리고 가난한 한국 소년들의 모습을 담은 ‘윤복이의 일기’.
오시마가 재일동포 위안부와 불우 청소년을 비롯해 전반적인 동포들의 문제를 다룬 두 극영화는 ‘일본 춘가고’와 ‘교사형’(Death by Hanging·1968). ‘교사형’(사진)은 1958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한국인 고교생 이진우의 일본 여고생 강간 살인사건을 다룬 것으로 이진우는 유죄선고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이진우의 사후 그의 편지들이 책으로 발간돼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이진우는 청춘의 컬트우상이 되었다.
사형을 전쟁행위로 간주하면서 이의 폐지와 함께 일본 관료체제의 희극성 그리고 재일동포에 대한 부당대우와 차별을 신랄하게 비판한 ‘교사형’은 심각하고 진지한 드라마이자 황당무계한 블랙코미디로 마치 연극과 기록영화를 섞어 놓은 듯한 흑백작품이다.
내레이션으로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중 71%가 사형제 폐지를 반대한다는 설명으로 시작된다. 이어 재일동포 사형수 R(윤융도 분)이 수감된 교도소의 안팎이 크기와 규모를 비롯해 자세하게 설명되고 카메라가 사형장 내로 들어가면서 R의 사형집행 전의 마지막 절차와 교수장비를 보여준 뒤 참관인들이 보는 가운데 R의 사형이 집행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R이 의식은 잃었으나 그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아연실색한 참관인들인 교도소장, 가톨릭 신부, 검사와 의사 및 교도소 고위 관리들이 R에 대한 처리를 놓고 갑론을박에 들어간다.
R을 소생시켜 사형을 재집행할 것인가, 한 번 죽인 사람을 어떻게 다시 죽일 수가 있는가, R의 영혼은 이미 그를 떠났으니 영혼 없는 자를 어떻게 죽일 수가 있는가를 놓고 법석들을 떨어댄다. 그리고 이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R의 범행을 재연하면서 광대극을 연출한다.
이어 이들은 R을 소생시킨 뒤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목석같은 표정을 한 R에게 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범행 사실을 얘기하는데 이 과정에서 참관자들이 R과 함께 배우가 돼 R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설극장 연극식으로 보여준다.
‘조센징’이라는 말이 계속해 쏟아지면서 재일동포와 한국인의 생활습관과 태도 및 유교사상까지 닥치는 대로 조롱 받고 비하되는데 이런 희극 속에 아울러 영적, 정치적, 종교적 및 의학적 논제들이 토론된다. 이율배반적 양상을 갖추었다.
해저탄광의 노역자로 강제로 일본에 끌려온 R의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식구가 신문지로 도배한 단칸방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는 모습이 신파극식으로 묘사되면서 ‘조센징’의 각박한 현실이 가차 없이 드러난다.
영화는 1시간 정도 교도소 안에서 진행되다가 그 후 잠시 R의 범행현장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가 R과 참관자들은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사는 아이스크림 가게에도 들른다. 이어 R 일행은 다시 교도소 내로 들어오면서 얘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느닷없이 흰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고야마 아끼꼬)가 나타나 R의 누나라며 일본의 재일동포에 대한 부당대우에 맹공을 가한다. 그러나 실제 R에겐 누나가 없는데 그럼 이 여자는 누구인가. R이 살해한 여고생인가 또는 일본에 의해 핍박받는 한민족인 재일동포의 대변자인가.  여기서 오시마는 유치환의 시를 읊고 그가 한국서 찍은 판자촌의 더럽고 가난한 아이들의 스틸사진을 보여주면서 한국의 길고 고통스런 500년 역사와 함께 36년간에 걸친 일제의 한국점령 그리고 일한관계와 남북한 통일문제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어 술 파티가 벌어지고 교도소장을 비롯한 참관자들은 큰 일장기를 덮고 누운 R과 그의 누나를 둘러싸고 앉아 주정을 겸한 대화를 나누면서 사형제 폐지와 일본의 제국주의적 근성 그리고 재일동포 차별 등이 얘기된다. 영화 끝 부분에 R의 누나가 R을 안고 있는 ‘피에타’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왜 R은 안 죽었을까. R은 갖은 핍박과 간난과 역경 속에서도 결코 멸하지 않는 한국인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가. 보통 영화의 형식을 파괴한 아방가르드식의 작품으로 지와 감성을 강력히 요구하는 ‘교사형’이 Criterion에 의해 DVD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3월 15일 화요일

하늘의 눈(Eye in the Sky)


캐서린 대령(헬렌 미렌)이 드론기 공격에 대한 상부 지시를 촉구하고 있다.

테러전쟁 피해자를 둘러싼 드론 부대의 딜레마


전쟁 액션 드라마이자 심리 스릴러의 스타일을 혼용한 이 영화는 현재 미국이 테러리스트들을  살해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드론기의 공격에 의해 살해될 수도 있는 부수 피해자를 둘러싼 도덕극이기도 하다. 매우 사실적이요 현실적이어서 극중의 인물들과 함께 초조하고 긴장된 심장으로 내용에 함몰케 된다.
엉뚱한 사람의 피해를 염려해 드론기의 공격을 미루는 조종사와 공격을 주장하는 지휘관 그리고 최종 결정권을 지닌 정부의 고위 관리들의 갈팡질팡하는 거의 코믹한 탁상토론이 3중으로 교직되면서 보는 사람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다.
영국의 각료 상황보고실에 모인 각 부처에서 참석한 고위관리들과 프랭크 벤슨 장군(알란 릭크만의 유작) 등이 보는 가운데 영상으로 영국이 잡으려고 혈안이 된 무슬림 극단주의 단체에 합류한 영국 여자 테러리스트의 나이로비 은둔처가 포착된다. 테러리스트 체포작전을 총괄하는 사람은 영국군 여자 대령 캐서린 파웰(헬렌 미렌).
은둔처에 대한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미국에서 드론기를 원격 조종하는 공군 조종사 스티브 와츠(아론 폴-TV 시리즈 ‘브레이킹 배드’). 그가 화면으로 드론기를 몰아 테러리스트들의 은둔처를 조준하는 장면이 마치 비디오 게임을 보는 것 같다. 한편 캐서린은 은둔처 내부를 살피기 위해 현지의 협조자(바카드 압디)를 시켜 장난감 같은 소형 드론기를 띄워 집 밖과 안의 상황을 포착한다.
이 소형 드론기에 의해 각기 미국인과 영국인인 두명의 젊은 극단주의자들이 몸에 자살폭탄 조끼를 입는 것이 포착되면서 캐서린은 정부 관리들에게 은둔처에 대한 드론기 공격명령을 촉구한다. 문제는 은둔처 바로 밖에서 어린 소녀가 빵을 팔고 있는 것. 드론기가 공격을 하면 이 소녀가 부수적으로 살해될 것이 필연적이어서 관리들은 공격명령을 놓고 서로들 갑론을박하면서 자신들의 상관의 최종 결정과 함께 미 국무부의 의견을 묻는다.
자살폭탄 준비가 거의 끝나고 두 테러리스트들이 임무를 수행할 시간이 임박하자 캐서린은 소녀가 부수 피해자가 될 확률까지 속여가면서 정부의 결정을 다그친다. 여전히 결정을 못하고 서로 미루는 관리들. 이에 캐서린은 연합군인 스티브에게 은둔처를 폭격하라고 지시하나 스티브는 부수 피해자가 있을 경우 공격을 금한 군의 규칙을 내세우면서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인간 살상에 대한 양심과 책임감과 결과 그리고 이를 둘러싼 결정권 등을 심리적으로 무게 있고 심각하게 다룬 작품으로 연기들이 좋다. 미렌의 단단한 연기도 좋지만 특히 폴의 고뇌하는 양심의 갈등이 비쳐진 강렬한 눈동자 연기가 매우 훌륭하다. 아주 시의에 맞는 작품이다. 개빈 후드 감독. R. Bleecker Street. 아크라이트(323-464-4226), 랜드마크(310-470-0492).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그림스비 형제(The Brothers Grimsby)


노비(왼쪽)와 세바스티안이 폭발하는 건물에서 도주하고 있다.


고아시절 헤어진 두 형제의 액션 코미디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해괴망측한 저질 코미디로 요절복통할 코미디 ‘보랏’을 만든 영국 코미디언 사샤 배론 코엔이 제작하고 각본 쓰고 또 주연한 난장판 스파이 액션 코미디다. 대사와 행동이 음탕하기가 짝이 없는데 특히 코끼리 항문이 동원된 장면에서는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내 생애 처음 보는 음담과 욕설과 온갖 형태의 성행위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성기를 비롯해   에이즈와 아동 성추행 및 배설물 등이 총동원된 막가파식의 영화다. 영화에 ‘강남 스타일’이라는 말과 함께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칠레의 경기장에 대형 태극기가 나온다. 왜 유독 태극기를 썼는지 궁금해 인터뷰 때 배론 코엔에게 물어봤는데 “세계적인 경기이기 때문”이라는 애매모한 대답이다. 어쨌든 웃지 않을 수 없는 영화로 영화를 보고나서 눈과 귀를 비누로 열 번 씻어야 할 것을 조언한다. 
런던 북쪽에 있는 그림스비의 달동네에 사는 노비(배론 코엔)는 백수건달로 뚱보 아내(레벨 윌슨)와의 사이에 ‘강남 스타일’을 비롯해 ‘쟁고 언체인드’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를 10여명을 두었다. 부모와 아이 할 것 없이 술 마시고 담배를 태운다.
노비는 어렸을 때 고아시절 동생 세바스티안과 헤어진 뒤로 늘 동생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28년 후 우연히 노비와 스파이가 된 세바스티안(마크 스트롱)이 재회를 하면서 둘이 지구를 돌면서 난리법석을 떨어댄다. 영국에서 사우스아프리카를 거쳐 칠레 등지를 돌면서 터무니없는 액션과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남자 대 여자 그리고 남자 대 남자 간의 음탕한 행동이 자행되는데 그래서 배론 코엔은 인터뷰 때 필자에게 “야, 이 영화 한국에서 상영될 것 같으냐”고 물어봤다. 낸들 알 수가 있나.                 
영화에서 뚱뚱한 여자가 농담의 대상이 되는데 윌슨 외에 또 다른 여자는 사우스아프리카의 호텔의 하녀로 나온 흑인 배우 개버리 시디비(‘프레셔스’). 그런데 동생 따라다니다가 본의 아니게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된 노비는 임무수행을 위해 이 하녀를 유혹해 섹스를 한다.
배론 코엔의 실제 아내 이슬라 피셔가 영국 정보부 요원으로 나오나 그와 윌슨은 낭비된 역인데 페넬로피 크루스가 악역을 즐긴다. 영화 끝에 월드컵 구경하던 도널드 트럼프가 에이즈균에 감염된다. R. 루이스 레테리에 감독. Columbia.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하우스 오브 카드’




내가 막말하는 선동가 도널드 트럼프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정치가는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다. 정치의 필연적 내성 중 하나가 거짓말이다. 그 좋은 예가 워터게이트 사건 때 궁지에 몰린 리처드 닉슨이 쌓이고 쌓이는 거짓말 때문에 코가 피노키오처럼 석자나 빠졌는데도 “나는 악한이 아니다”라고 오리발을 내민 것이다.
힐러리는 트럼프가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마구 내뱉자 “대통령이 될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말은 현재 네트플릭스가 방영하는 정치드라마 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사상누각)에 나오는 “정치가란 선택적 진실만 말한다”는 대사와 일맥상통한다. 이 ‘선택적 진실’은 결국 립 서비스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다.
트럼프의 인기가 높은 이유 중 하나가 정치가들의 이런 립 서비스에 신물이 난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미 서민층의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트럼프가 부동자세로 서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면 그 선동적 내용과 우스꽝스런 헤어스타일 그리고 오른 손 제스처를 비롯해 히틀러를 닮은 데가 있다. 둘이 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내세운 구호도 닮았다. 그러나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도 말했듯이 트럼프는 가짜요 사기꾼으로 내가 보기엔 독일을 패망시킨 히틀러처럼 아주 위험한 파시스트다.          
대중이란 늘 우매하게 마련이지만 트럼프의 높은 인기는 가히 불가사의할 뿐이다. 초보수파인 내 미국인 친구 마이크조차 “아무리 미국의 기둥인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나빠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트럼프를 지지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나는 트럼프의 구토 같은 연설을 들으면서 재미 만점의 TV 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들인 표가 우선인 정치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드라마는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부통령이 된 프랭크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사진)가 갖은 권모술수를 동원해 현직 대통령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올라앉기까지의 과정을 스릴러 분위기를 섞어 긴장감 가득하게 다루고 있다.
이런 프랭크의 권력에 대한 야망의 실현에 역시 권력의 맛을 좋아하는 프랭크의 아내 클레어(로빈 라이트)가 동참한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와 ‘오텔로’ 그리고 ‘맥베스’를 뒤 섞어 놓은 듯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야, 정치판은 정말로 협잡꾼이요 야바위꾼들의 놀음판이로구나’ 하고 혀를 찼다. 프랭크는 “민주주의는 과대평가됐다”고 믿는 자로 술수와 간계와 조작과 거래에 능한 기회주의자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식언을 밥 먹듯이 하면서 온갖 사악한 방법을 동원해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스스로도 “나는 거짓에 거짓을 수 없이 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잔인무도한 실용주의자인데 프랭크가 대통령이 된 뒤 “대통령은 보다 인간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권력의 길은 위선으로 포장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프랭크와 클레어는 소위 ‘무시 못 할 정치적 현실’ 탓에 거짓말을 하고 오리발을 내미는데 이에 대해 극중 한 인물이 “많은 사람들이 워싱턴을 증오하는 까닭이 바로 그 ‘무시 못 할 정치적 현실’을 내세우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힐난한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트럼프가 이 드라마를 보고 정치가들의 술수를 배운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드라마야말로 모든 정치가들이 보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야기다.
트럼프는 또 필름느와르 스타일의 정치드라마 ‘모두가 왕의 사람들’(All the King’s Men·1949)의 주인공 윌리 스타크(브로데릭 크로포드가 이 역으로 오스카 주연상 수상)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로버트 펜 워렌의 퓰리처상 수상작인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로버트 로센이 감독한 흑백명작이다.
스타크 역시 선동가로 작은 카운티의 공직자로 시작해 대중의 구미에 맞는 내용의 공약을 열변하면서 주지사 자리에까지 오르는데 그 과정에서 처음의 순수를 잃고 자기가 대항해 싸우던 기성 정치인들처럼 부패하게 되고 결국 암살당한다.
이 영화는 지난 1928~1932년 루이지애나 주지사를 지내고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가 1935년 암살당한 휴이 P. 롱의 삶을 변용한 것이다. ‘킹피시’(The Kingfish)라는 별명을 지녔던 롱 역시 생전에 선동가요 중우정치가라는 말을 들었었다. ‘올 더 킹스 멘’은 지난 2006년 션 펜 주연으로 리메이크 됐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말했듯이 트럼프는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의 한 스케치의 인물거리는 되나 대통령감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백악관이라는 궁전의 주인이 되겠다고 열을 내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궁전의 주인보다는 궁전의 어릿광대로서 썩 어울린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3월 7일 월요일

‘경주’의 주인공 오웬스의 실제 딸들 베벌리 오웬스 프래더와 마를렌 오웬스 랜킨




“흑인 아니었다면 즉시 인정 받았을 것”

생존 때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진 않았다

늦게나마 아버지 영화 나와 자랑스러워



현재 상영 중인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의 삶을 그린‘경주’(Race)의 주인공 오웬스의 실제 딸들인 베벌리 오웬스 프래더(사진 왼쪽)와 마를렌 오웬스 랜킨과의 인터뷰가 지난 1월25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오웬스는 손기정이 일장기가 인쇄된 셔츠를 입고 달려 마라톤에서 우승한 1936년도 베를린 올림픽에서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겠다며 호언장담을 한 히틀러가 보는 가운데 독일 선수를 제치고 혼자서 무려 금메달을 4개나 딴 세계 신기록 수립자다. 곱게 나이가 먹은 오웬스의 두 딸들은 기품이 있는 숙녀들로 차분하게 앉아 조용한 음성으로 아버지와의 과거 삶을 자상히 들려주었다. 매우 겸손한 사람들이다. 대답은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한 것이다.   

-당신들의 아버지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을 언제 알았는가.
“10대 초반에 가서야 아버지가 유명 인사라는 사실과 그의 업적과 그리고 그것의 중요성을 알았다. 집 안으로부터 알았다기보다 바깥 사람들이 얘기를 해서 알았다. 우리들의 부모는 집에서 그 사실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서 어떻게 자랐으며 왜 아버지의 업적이 집에서 얘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부모는 우리를 사랑했지만 엄격한 분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 집 안에서 화제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린 잘 알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올림픽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우리에겐 아버지가 올림픽 선수가 아닌 그냥 아버지였다. 그러나 일단 아버지의 업적을 알고 나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민권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했는가.
“연단에 서서 열변을 토하는 스타일이 아닌 아버지는 자기가 할 만큼 민권운동에 개입했다. 아버지도 차별대우를 받고 살았으니 만큼 민권운동을 믿었으나 비폭력적으로 그 활동에 참가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었던 것은 가족이다. 우린 모든 일을 가족단위로 했다. 그 중에서도 크리스마스 할러데이를 아버지는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사랑이 많고 베풂이 큰 사람이어서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특별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특히 자기 생일파티를 즐겼는데 파티 때면 아버지의 단골 옛 친구들이 참석했다. 아버지와 함께 올림픽에 출전했던 육상선수들이 모이곤 했다.”
제시 오웬스역의 스테판 제임스.
-어디서 자랐으며 지금은 어디서 사는가.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컬럼버스로 이사 갔다가 다시 디트로이트로 옮겼다. 거기서 7년을 살다가 시카고로 이사해 지금까지 거기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인내심이 컸다. 온건한 성격으
실제의 제시 오웬스.
로 호인이었다. 보자마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를 엄격히 키웠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우리에게 벌을 줄 때도 매를 든 것이 아니라 훈계정도였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 병이 들면서 아버지는 다소 화를 냈다. 몸이 불편한 것에 대한 화라고 생각한다(다음은 베벌리의 말이다. ‘아버지가 딱 한 번 내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머리에 염색을 한 것에 대해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그 뒤론 아버지가 화를 내는 것을 못 봤다’).

-유명한 아버지를 둬 부담감이라도 느꼈는가.
“우린 늘 사람들이 우리를 알고 있으며 또 나름대로 판단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모범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 행동했다가는 그 여파가 아버지와 우리 가족에 미칠 것이어서 조심스러웠다.”

-당신들의 아버지는 사후 10년이 지난 1990년에나 가서야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았는데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자기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
“뒤늦은 감이 있다. 흑인이 아니었더라면 그 즉시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지금이라도 아버지에 관한 영화가 나와 매우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아버지는 지금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래 때가 됐어’라고 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생존 때 인정받기 위해 투쟁을 하진 않았다. 그저 아버지는 세상 흐름대로 살았다. 아버지는 올림픽 챔피언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업가요 아버지요 인본주의자로서 가족을 돌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직업에 집중했다. 올림픽 챔피언은 과거의 일로 흘려보내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집중했다.” 

-베를린에 간 적이 있는가.
“처음으로 베를린에 간 것은 지난 1980년 스테디엄 인근의 거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행사 때였다. 그 때 스테디엄을 본 경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테디엄 벽에 쓰인 아버지의 이름을 보는 것은 한 마디로 아찔한 경험이었다. 스테디엄 위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면서 아버지가 저기서 수많은 관중 앞에서 달렸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깊은 감동에 젖었었다. 지금도 2층인가에 있는 라운지의 이름이 제시 오웬즈 라운지다. 방 벽은 아버지의 사진들로 도배질을 하다시피 했다.”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떤가.
“아버지 역의 스테판 제임스가 대단한 일을 했다. 그는 아버지의 본질을 잘 나타냈는데 참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영화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개입했다. 각본도 우리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읽으면서 조언을 했고 일부는 수정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가득한 영화다. 아버지의 역사가 다시 써지는 것이 아닌 만큼 우리는 사실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했다.”

-아버지의 달리기 실력을 물려받기라도 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자녀들은 어떤가.
*마를렌의 대답: “내 아들은 뛰어난 육상선수인데도 경쟁적인 시합에는 안 나간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서 아버지 이후의 유일한 남자인데 아마도 압력을 느껴서 그런 것 같다. 자신을 할아버지의 업적과 비교하는 입장에 두지 않으려고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은 그냥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육상경기를 한다. 그런데 아들은 진짜로 소질이 대단하다.”

-아버지가 뛰는 것을 봤는가.
“올림픽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뛰질 않았다. 단지 몇 차례의 시범만 보여줬을 뿐이다. 아버지는 달리기 대신 골프를 쳤다. 아버지는 골프광이었다.”
-아버지는 트랙 앤 필드를 중단한 뒤로 어떻게 지냈는가.
“올림픽 후 처음 6개월간은 뉴욕에 가서 생계를 위해 자신에게 약속됐던 어떤 일을 통해 돈을 벌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됐다. 그리고는 뉴욕에서 유명한 흑인 연예인 빌 보쟁글스 로빈슨을 만나 춤도 추고 밴드 리더도 했다. 음악을 몰랐는데도 색서폰을 들고 폼을 잡으면서 보쟁글스 밴드의 리더로 일했다. 그러나 6개월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직장을 얻기가 아주 힘들었는데 아버지는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는 아이들의 감독으로 일했다. 아이들과의 작업에 아버지는 열과 성을 다했다. 그리고 후에는 홍보활동과 함께 동기부여 강사로 성공했다.”

-아버지는 금메달을 어디에 보관했는가.
“그냥 집 어딘가에 두었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른다. 아버지가 남들이 보게 두었던 것은 구릿빛의 육상화다.”

-아버지의 업적을 안 것은 정확히 언제인가.
“우리가 10대 초반 때 시카고로 이사간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올림픽 승리에 대해 설명하는 만찬에서였다.”

-영화에서 아버지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라이벌 독일 육상선수 루츠의 가족을 만났는가.
 “못 만났다. 그러나 내 아들이 루츠의 손녀를 만났다. 아들이 독일에서 일할 때 술집에 친구와 들렀다가 우연히 루츠의 손녀인 율리아를 아는 여자를 만나 이 여자의 중개로 서로 만난 것이다. 그 후 아들과 율리아는 지금까지 서로 소식을 나누고 있는데 언젠가 베를린에서 월드게임이 열렸을 때 아들과 율리아가 100미터 우승선수에게 금메달을 시상자로 나갔었다.”

-아버지는 스포츠의 중요성을 장려했는가.
“물론이다. 특별히 아이들에게 스포츠의 중요성을 강조해 청소년 스포츠 장려에 열과 성을 다 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주토피아(Zootopia)


주디(왼쪽)와 왕년의 라이벌 닉은 팀이 돼 실종사건을 수사한다.

맹수와 초식동물이 모여 사는 대도시


 꿈과 환상을 찍어내는 디즈니의 만화영화로 제목이 말하듯이 맹수와 초식동물들이 평화 공존하는 지상천국과도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모험과 액션을 양념 식으로 곁들인  수사물이자 걸맞지 않는 짝의 티격태격과 우정의 드라마다.
그림과 내용과 대사와 음성연기 그리고 각기 독특한 모습을 잘 살린 동물들을 비롯해 모양과 색깔과 크기와 식성 및 종류를 초월한 동물들의 공존은 물론이요 ‘하면 된다’는 긍정적 정신을 얘기한 메시지 영화이기도 한데 기차게 재미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모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즐길 수 있는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특히 알록달록한 색깔로 동물들과 이들이 거주하는 건물과 자연을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린 그림이 눈이 아플 정도로 다채롭고 다양한데 한 번 봐 가지고서는 그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채 다 감지할 수 없도록 훌륭하다.
시골에 사는 작고 귀여운 암토끼 주디 합스(지니퍼 굿윈 음성)는 어려서부터 분쟁조정에 실력이 뛰어나 학교의 왈패 여우 닉 와일드(제이슨 베이트만)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재치 있게 처리한다. 성장한 주디는 경찰학교에 입학,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수석으로 졸업한다. 그리고 보따리를 싸들고 임지인 대도시 주토피아를 향해 기차를 타고 떠난다. 주디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통과하는 열대의 사하라 스퀘어와 추운 툰드라타운 등 여러 형태의 도시들이 마치 디즈니랜드의 갖가지 놀이터를 구경하는 것 같다.
주토피아는 큰 사슴과 백표범이 TV의 저녁 뉴스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각기 행동양식이 다른 동물들이 자기 특성에 맞게 직업을 선택해 생활하는 지상낙원. 주토피아의 여러 동물들의 모습과 행태를 스케치 식으로 묘사한 장면이 배꼽 빠지게끔 우습고 재미있다. 그 중에서도 말과 행동이 엄청나게 느린 DMV(당연하다)에 근무하는 나무늘보들의 모습이 매우 재치 있고 또 ‘대부’의 흉내를 낸 뾰족 뒤쥐의 장면도 재미있다.  
경찰서에 와 보니 동료 경찰들은 덩지가 엄청나게 큰 코뿔소와 호랑이와 물소 등으로 작은 암컷(성차별이다) 주디 알기를 우습게 안다. 물소 서장 보고(이드리스 엘바)도 마찬가지로 주디를 주차위반 딱지 발급 일을 맡긴다. 주디에게 다정한 경찰은 치타 리셉셔니스트 클로하우저(네이트 토랜스)와 포유동물의 경찰 복무를 발의한 시장 라이언하트(J.K. 시몬스)의 털북숭이 여비서 벨웨더(제니 슬레이트).
지금 경찰서가 해결해야 할 큰 문제는 관할지역 동물들의 잇단 실종사건. 딱지 발급에 좌절감을 느낀 주디는 경찰 배지를 내던지고 단독으로 수사를 시작하는데 실종된 동물들은 다 전에 육식하던 맹수들. 수사하는 주디의 파트너가 된 동물이 뜻밖에도 오래간만에 만난 닉. 닉은 여전히 술수꾼이긴 하나 더 이상 옛날의 못된 닉이 아니다. 과연 납치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그런데 이런 플롯은 다소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걸맞지 않는 한 쌍이 서로 협조를 하면서도 경쟁하고 티격태격하면서 우정을 쌓는 전형적인 ‘아드 커플’(odd couple)의 얘기 식으로 전개된다. 낙천적이요 에너지가 충만한 주디와 약아 빠진 닉의 콤비가 절묘한데 이런 화학작용이 두 배우의 음성연기와 함께 생동감과 재치 있게 그려진 애니메이션에 의해 효과적으로 묘사된다. 마지막에 영양(샤키라)이 열창하는 주제가 ‘트라이 에브리싱’도 화끈하다. 바이런 하워드와 리치 모어 공동감독. PG. 전지역.★★★★★(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파도(The WAVE)


크리스티안이 아내 이둔을 부축하고 쓰나미를 피해 달아니고 있다.

여기저기서 빌려다 짜깁기한 것 같은 타작


특수효과 위주의 대재난 영화로 미국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지진’ 그리고 한국 영화 ‘해운대’의 여기저기를 빌려다 짜깁기한 것 같은 타작이다. 컴퓨터 특수효과로 만들어낸 산더미만한 쓰나미에 온 마을이 침수되고 주민들이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 시간 죽이기에는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할리웃 스튜디오 영화를 그대로 모방한 이 영화는 재난영화의 상투적인 것은 다 빌려다 쓴 창의성이 결핍된 작품으로 노르웨이의 올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 출품작이나 탈락했다. 재난 속에 시달리고 고난 받으면서 궁극적으로 재결집하는 가족의 얘기가 너무 억지요 인위적인 데다가 감상적이고 또 믿을 수가 없다.
영화는 지난 1905년 노르웨이 해변 마을 로엔이 산사태를 일으키면서 유발한 쓰나미로 쑥대밭이 된 실화를 기록영화로 보여주면서 노르웨이에는 이런 지역이 300곳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 중 하나가 영화의 가상의 마을인 게이란저. 자연을 사랑하는 지질학자 크리스티안(크리스토퍼 요너)은 자나 깨나 마을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경고 시스템에 매달려 산다.
그래서 그의 아내 이둔(안 달 토프)은 최근 남편이 도시에 새 직업을 얻어 곧 동네를 떠날 생각에 기쁘기만 한데 크리스티안은 마을에 대한 애착에 고민한다.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그의 10대 아들 손드레(요나스 호프 오프테브로)인데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10대가 즐길 것이 많은 도시보다 아무 것도 안 일어나는 시골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억지다.
영화 전반부는 이런 개인적인 얘기들로 진행되다가 후반 들어 동네에 산사태가 일어나고 이로 인해 가공할 쓰나미가 발생해 동네를 향해 밀어닥치면서 아수라장이 된다. 마을이 완전히 수장될 위기에 처하자 사람들은 고지를 향해 달리는데 그 과정에서 크리스티안과 이둔이 손드레를 잃으면서 위기 때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가족을 찾아 헤매는 이런 영화의 상투적인 플롯이 끼어든다.            
아들을 찾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크리스티안. 그리고 마지막에 그야말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데 이야말로 해도 너무 했다. 어쨌든 크리스티안 가족은 위기를 넘기고 그 뒤로 내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로어 우타욱 감독은 남의 것 베끼는 우를 저질러 도무지 신선한 느낌이 없다. PG-13 정도. 일부 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오인된 남자’




서스펜스의 장인 알프레드 히치콕은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뒤 영화 내내 괴롭히는 악취미를 지닌 새디스트다. 이 생사람 잡는 히치콕의 대표적 피해자 중 하나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케리 그랜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스파이로 몰려 뉴욕에서부터 시카고를 거쳐 큰 바위 대통령들의 얼굴이 있는 사우스다코타주의 마운트 러시모어까지 도망 다니면서 죽을 고생을 한다. 그랜트는 또 ‘나는 결백하다’에서는 왕년의 자기 수법을 본 딴 보석 전문털이의 혐의를 받는다. 이 밖에도 ‘하숙생’ ‘39계단’ ‘영 앤 이노선트’ ‘기차 안의 낯선 사람들’ 및 ‘프렌지’ 등의 주인공들도 킬러나 스파이로 오인돼 곤욕을 치른다.
그런데 히치콕의 1956년 작으로 긴장감 가득한 드라마 ‘오인된 남자’(The Wrong Man·사진)의 주인공 매니 발레스트레로(실명 크리스토퍼 에마누엘 발레스트레로)는 히치콕에 의해 누명을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강도로 오인돼 짧지만 악몽과도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이다.
매니의 얘기는 히치콕에겐 딱 알맞은 소재로 이 영화는 그의 유일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매니의 사건이야 말로 사실이 허구보다 더 기막히고 극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로 영화를 보면서 ‘만약 내가 매니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에 몸서리가 처졌다.
뉴욕주 퀸즈의 잭슨하이츠에서 두 아들과 현모양처인 로즈(베라 마일즈-히치콕의 ‘사이코’에도 나왔다)와 함께 넉넉지는 못하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매니(헨리 폰다)는 나이트클럽 ‘스토크’의 베이스 연주자. 매니는 1953년(당시 38세) 1월14일 아내의 치통 치료비 300달러를 대부 받기 위해 보험회사에 찾아갔다가 자기를 이 회사를 턴 강도로 오인한 여직원이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체포된다.
여기서부터 도대체 자기가 왜 체포됐는지를 몰라 어안이 벙벙해하는(폰다의 과묵한 연기가 좋다) 매니의 악몽이 시작되는데 이 악몽은 매니 뿐 아니라 로즈와 두 아들과 매니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비롯한 온 가족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매니는 강도 피해자들의 확인과 필적감정 등에 의해 범인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자기 때문에 남편이 저지경이 됐다는 자책감과 죄의식에 빠진 로즈는 정신파탄을 일으켜 요양소에 입원한다.
그러나 재판 중 진범 찰스 제임스 대니엘이 델리가게를 털다 붙잡히는 바람에 매니는 석방된다. 매니가 찰스로 오인된 까닭은 두 사람이 너무나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만약 찰스가 체포되지 않았더라면 매니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편 40여건의 강도 전과가 있는 찰스는 경찰 진술에서 매니가 유죄판결을 받으면 자신이 진범임을 자백할 예정이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매니는 입원한지 2년 만에 퇴원한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플로리다로 이사해 거기서 악사로 일하며 살다가 지난 1998년 88세로 사망했고 로즈는 이보다 14년 전에 먼저 타계했다. 영화의 끝은 로즈가 완전히 회복됐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히치콕이 실루엣으로 등장해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되는 ‘오인된 남자’는 기록영화처럼 모든 것이 세밀하고 정확한데 이런 사실성은 로버트 버크스의 뛰어난 흑백촬영이  포착한 강렬한 이미지에 의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와 함께 ‘사이코’와 ‘현기증’ 등 히치콕의 여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버나드 허만의 재즈풍 음악이 매니의 상황을 잘 알려준다.
뉴욕이 하나의 인물처럼 뚜렷한 역할을 하는 영화에서 히치콕은 실제사건의 목격자들을 단역으로 쓰고 매니가 수감됐던 110지구 경찰서 영창과 ‘스토크 클럽’ 및 요양소와 법정 등 현장 촬영을 통해 가급적 사실성을 살려 마치 한 편의 기록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이 사건은 당시 전국적인 화제가 됐었는데 무혐의로 풀려난 매니는 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진짜로 새 출발을 하려면 모든 것이 달라져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친척들과 집과 가구를 다 남겨놓고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매니는 시와 보험회사를 상대로 50만달러의 소송을 냈으나 법정 외 합의로 7,000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히치콕의 팬이었던 매니는 자기 얘기의 영화화 판권을 20만달러에 팔았으나 아내의 입원비로 다 썼다고.
지난 2014년 매니가 살던 집 근처의 73스트릿과 41블러버드 교차로가 “매니 ‘더 렁 맨’ 발레스트레로 웨이”(“Many ‘The Wrong Man’ Balestrero Way”)로 명명됐는데 명명식에 형 로버트와 함께 참석한 매니의 차남 그레고리(사건 당시 5세)는 “이것은 우리 부모가 겪은 고통과 아픔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매니는 지난 1953년 라이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를 고발하기 전에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은 내 삶이 파괴될 뻔했던 것처럼 한 가정을 물리적 정신적으로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인된 남자’가 워너 아카이브에 의해 블루-레이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