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언제나 본능에 따라 사는 게 생활지침”
현재 상영 중인‘퓨리’에서 1945년 4월 2차 대전 종전 직전 독일전선에 투입된 미군의 셔만탱크를 4명의 전우들과 함께 몰고 독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고참상사 단‘워 대디’ 칼리어로 나온 브래드 핏(50)과의 인터뷰가 뉴욕에서 있었다.“늦어 미안하다”며 보무당당하게 인터뷰장에 들어선 콧수염을 한 핏은 작은 모자에 엷은 갈색 선글라스를 썼는데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였다. 씩씩한 청년 같았는데 제스처와 함께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농담을 섞어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영화에서 당신의 전우들로 나온 배우들과의 관계는 어땠는가.
“데이빗 에이어 감독은 우리를 급박한 상황에 넣어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강점과 약점을 배우도록 했다. 영화를 찍는 3개월 동안 우리는 맹훈련을 해 탄탄한 동아리로 뭉쳤다. 각기 성격과 배경이 다른 우리는 일종의 찢어진 가족으로 전쟁의 정신적 타격과 전쟁의 공포가 가져다주는 심리적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지도자여서 내 약점을 전우들에게 보여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여기서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미군으로 나와 독일군을 때려잡는데 ‘인글로리어스 배스타즈’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당신의 전쟁영화다. 당신과 독일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독일어 하느라 땀깨나 흘렸다. 나는 독일 미술의 열렬한 팬이다. 이 영화는 사람들이 한 이념에 매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는 인간의 공포에 흠집을 내는 전쟁의 충격을 다루고 있다. 난 독일어를 좋아하는데 부드럽게 말할 땐 아주 아름다워 고운 음악 같다.”
―2차 대전 참전 군인들의 자문을 받았는지.
“벌지 전투에서부터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에 의하면 독일 탱크가 우리 것보다 성능이 월등했다고 한다. 그들의 포탄은 우리 탱크를 관통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래서 우리 탱크 병사들이 많이 전사했는데 많은 군인들이 탱크 안에서 소사했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전쟁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현상과 2차 대전과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다고 보는가.
“그것에 대한 명답은 모르겠다. 그 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는 전쟁명분이 뚜렷했던 반면 지금은 그것이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여하튼 나는 이 영화처럼 탱크부대를 자세히 묘사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 영화는 잠수함 전투를 그린 독일 영화 ‘보트’의 탱크판이라고 하겠다. 나는 영화를 찍는 동안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읽었다. 책은 독일 보병의 얘기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얘기와 너무나 같다는데 놀랐다.”
‘워 대디’(앞줄 왼쪽)가 이끄는 미군 탱크가 적진을 향해 달리고 있다. |
―당신이 유럽에서 이 영화를 찍을 때 당신의 부인 앤젤리나는 호주에서 또 다른 전쟁영화를 찍으면서 서로 사랑의 편지를 교환했다고 들었는데.
“우린 동시에 일하지 않는데 이번엔 스케줄이 잘 못돼 나는 유럽에서 앤젤리나는 태평양에서 일하게 됐다(연말에 개봉될 태평양전쟁 실화인 ‘언브로큰’을 감독). 그래서 우리는 옛날에 군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듯이 이메일과 스카이프로 편지를 교환했다.”
―얼마 전의 결혼을 축하한다. 그 후로 뭐 변한 것이라도 있는가.
“이제 진짜로 결혼한 남자처럼 느껴진다. 우린 이미 아이가 여섯이나 있어서 결혼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우리가 결혼하기를 원했다. 결혼 후 그것이 단지 하나의 축하행사가 아니라 서로의 언약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영화는 시상시즌에 앤젤리나의 영화와 경쟁을 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영화는 종종 내 친구들의 것과 상을 놓고 경쟁을 하는 수가 있었다. 그것은 나로서나 내 친구로서나 다 축하할 일이다. 앤젤리나의 영화는 엄청난 난관을 이겨낸 인간 정신의 승리에 관한 것으로 규모가 크고 매우 훌륭하다. 우린 서로 결코 경쟁하지 않는다. 나는 앤젤리나가 모든 상을 다 타기를 바란다.”
―당신과 앤젤리나는 어떻게 서로 스케줄을 조절하는가.
“언제나 누군가는 아이들과 같이 있도록 번갈아가면서 일하도록 짠다. 내가 배우로 일할 때는 앤젤리나가 감독으로 일하는 식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우리가 서로 아이들을 반씩 나눠 돌보면서 시간이 나면 서로 방문하는 식으로 보냈는데 시간 짜기가 쉽질 않았다.”
―당신은 제작자이기도 한데 제작자와 배우가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이며 감독도 하겠는가.
“감독은 시간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 일이어서 다른 할 일이 많은 나로선 할 생각이 없다. 디자인 계통의 일을 하고 싶다. 제작자로선 뭔가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만든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된다. 난 내 견해와 취향에 맞는 얘기를 영화로 만든다는 주관이 뚜렷하다.”
―당신은 지금 아내가 감독하고 공연도 하는 영화 ‘바이 더 시’(By the Sea)에 나오고 있는데 아내는 세트에서 어떤 주인 노릇을 하는가.
“엄청나게 엄격하다. 유럽을 무대로 슬픔을 다루는 부부에 관한 아름답고 우아하며 또 내밀한 얘기다. 굉장히 도전적인 작품이다. 아내가 하는 일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결혼 14년에 접어든 부부의 미래에 대한 회의와 그들 주변 사람들에 관한 매우 고상한 얘기다.”
―어렸을 때 가족이 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는가.
“우리는 언제나 저녁을 함께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 시간이야 말로 각자의 느낌과 하루의 일을 얘기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도 다른 모든 가족처럼 어쩌다 식탁에 모여 다툴 때가 있었다.”
―앤젤리니와 함께 한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인지.
“앤젤리나의 ‘언브로큰’ 스케줄을 몰라 함께 갈지는 모르겠지만 난 가려고 한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다시 그 곳에 가려고 시도하고 있다. 11월 중순 쯤이 될 것 같다.”
―당신은 이제 50세인데 25세 때 당신이 생각한 50세의 당신은 어떤 모습이며 지금 당신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신감을 느끼는가.
“나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고 또 나의 아이들과 아내로부터 무엇을 원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고 있다. 난 5년 또는 10년 앞을 계획하고 살지는 않는다. 난 언제나 본능에 따라 살았고 또 그것을 믿는다. 그것이 나의 생활 지침입니다.”
―당신은 지난해에 오스카 작품상(12년 노예생활)을 탔고 앤젤리나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삶에 얼마나 만족하는가.
“아내가 훈장 받은 것 정말로 훈훈한 일이다. 우리 가족의 아름다운 날이었다. 우리 가족이 모두 왕실 접견을 했는데 아이들이 고개를 숙여 ‘여왕 폐하’라고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당신 아내보다 12살 많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확히 말해 11살 반이다. 그러나 우린 다 같은 성숙한 나이다. 그것이 우리 부부간 조화의 비결이다. 우린 전연 다른 점을 못 느낀다. 난 언제라도 젊음과 지혜를 바꿀 용의가 있다.
―오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아직 거기까진 안 생각했지만 일을 잠시 접어놓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
―밀폐된 탱크 안에서 무엇을 생각했는가.
“탱크 안은 사실 평화로웠다. 마치 수영장 물에 머리를 담근 기분이었다. 비록 냄새가 나는 좁은 공간 안에 다섯 명이 비비고 앉아 있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사흘이 지나니 아주 편하더라. 마치 자궁 안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떤 날은 아침에 탱크 안에 들어가 저녁에 나올 때도 있었는데 점심도 그 안에서 먹었다.”
―배우로서 어떻게 당신의 연기를 연마하는가. 영화를 보는가.
“영화를 본다. 각본을 읽고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는 영화 출연에 마음을 안 둔다. 일단 출연을 정하면 준비를 하는데 준비야 말로 모든 것이다. 준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연기와 진짜로 좋은 연기의 차가 난다. 그래서 나는 역을 위해 연구하고 조사하기를 부단히 한다.”
―앞으로 더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영화인과 아버지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동반자로서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열망을 이루고 싶다.”
―배우로서 어떻게 성장했다고 생각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기능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난 요즘 재능 있는 젊은 배우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충분히 개발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소모하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 배우란 자기 기능을 부단히 연마할 때 비로소 성공할 수가 있다.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도 같은데 난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서면 이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몰두하곤 한다.”
<한국일보 편집위원 /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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