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4년 11월 28일 금요일

흑과 백



둘 다 흑인인 덴젤 워싱턴과 오프라 윈프리를 인터뷰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워싱턴에게 “당신은 인종차별을 불치의 병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에 “그렇다”면서 “아마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그 병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었다.
나는 윈프리에게는 “당신은 흑백차별이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기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윈프리는 정색을 하면서 “아니다. 그것은 교육에 달린 문제다”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나는 윈프리와는 생각이 다르다. 나는 인종차별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동물적인 반응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거부반응은 관용과 인내와 인간성 그리고 사랑과 연민 또 윈프리의 말처럼 교육으로 휴면시키는 수밖에 없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대배심이 퍼거슨시의 비무장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을 총격 사망케 한 백인 경관 대런 윌슨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리자 퍼거슨을 비롯해 전미 대도시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면서 약탈행위도 자행되고 있다. TV로 이를 보면서 4.29폭동이 생각났다.
그 때 사우스LA의 한인 가게들이 흑인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는데 흑인 동네에서 장사하다가 애꿎게 흑인들의 분풀이 상대가 된 한인 가게가 나오는 영화가 스파이크 리가 감독하고 주연도 한 ‘똑바로 살아’(Do the Right Thing·1989)이다.
뜨거운 여름 브룩클린의 흑인 동네에서 일어나는 인종갈등을 그린 화끈한 영화로 난동 흑인이 한인 가게에 들어가 마구 기물을 파괴한다. 난 언젠가 리를 인터뷰했을 때 그에게 이 장면에 대해 물었더니 리는 “어, 그 거 특별히 한국 사람들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면서 “어쨌든 미안하다”고 어물쩍 넘어갔다.
미국의 흑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현실에서 뿐만 아니라 할리웃에서도 무성영화 때부터 있어 왔다. D.W. 그리피스의 걸작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번개로 쓴 역사”라고 찬양한 무성영화 ‘국가의 탄생’(Birth of a Nation·1915)도 흑인 박해 단체인 KKK를 찬양해 지금까지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또 할리웃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가수’(Jazz Singer·1927)에서는 백인 알 졸슨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노래를 불러 구설수에 올랐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스칼렛의 흑인 하녀들인 매미와 프리시가 하잘 것 없거나 맹하게 묘사돼 흑인차별 영화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이렇게 미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 때문에 라나 터너가 주연한 영화 ‘인생의 모방’(Imitation of Life·1959)에서는 흑인 가정부의 백색 피부를 지닌 딸(수전 코너)이 어머니를 외면했다가 뒤늦게 후회하고 대성통곡을 한다. 또 ‘핑키’(Pinky·1949)에서도 하얀 피부 때문에 백인 행세를 하던 젊은 여인 핑키(진 크레인)가 고향인 남부에 돌아왔다가 자신의 정체를 인식하고 고향에 봉사하기 위해 정착한다.
내가 어렸을 때 본 영화로 백인의 흑인에 대한 혐오에 혀를 찬 것이 한국전 영화 ‘모든 젊은 남자들’(All the Young Men·1960)이다. 인종차별주의자인 미군 하사관 킨케이드(앨란 래드)가 적의 탱크에 팔이 깔려 절단되면서 수술을 받는다.
이 때 킨케이드에게 수혈을 해주는 전우가 킨케이드가 증오하는 흑인 하사관 에디(시드니 포이티에)다. 에디의 피가 킨케이드의 혈관 내로 들어가면서 흑백통합이 이뤄진다.
영화 ‘흑과 백’(The Defiant Ones· 1958)에서는 흑인을 사갈시 하던 탈옥수 존(토니 커티스)이 쇠사슬에 매인 수갑으로 서로 연결된 흑인 노아(시드니 포이티에)와 같이 숨이 턱에 차도록 도주를 하다가 노아의 인간성에 감복, 흑인에 대한 증오감을 저버리게 된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깊었던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긴장감 있고 훌륭한 연기를 볼 수 있는 드라마다.
포이티에는 흑인 최초로 오스카상을 탄 배우로 여러 편의 흑백문제를 다룬 영화에 나왔다. 그 중에서도 역시 크레이머가 감독하고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이 공연한 ‘초대 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1967)은 흑백문제를 다룬 명화들 중의 하나다.
백인 처녀(캐서린 휴턴-헵번의 실제 질녀)가 약혼자인 흑인 변호사(포이티에)를 처음으로 부모에게 소개시키는 드라마로 당시만 해도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흑백 결혼이 불법이어서 큰 화제가 됐었다. 트레이시의 유작으로 그의 마지막 인간성에 대한 긴 대사는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2015년 1월에 나올 ‘흑이냐 백이냐’(Black or White·사진)도 흑백문제를 솔직하게 다룬 준수하고 재미있는 드라마다. 태어났을 때부터 흑인 손녀를 혼자 키워온 외조부(케빈 코스너)가 갑자기 손녀의 흑인 친할머니(옥테이비아 스펜서)로부터 손녀 양육권에 대해 소송을 당하면서 흑백문제가 야기되는 좋은 얘기다. <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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