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이 백색보다 더 강렬하고 어두운 것이 밝은 것보다 더 음모적이며 커브가 직선보다 더 멋있고 죄인이 성인보다 더 구할 것이 많듯이 악인이 선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악의 치명적 매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악의 선을 제친 매력과 유혹은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지금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이런 악의 막강한 위력과 매력 때문에 우리는 선인보다 악인을 더 기억하고 즐기고 또 선호하기까지 한다.
영화에 나온 악인이 선인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릭 골드핑거(게르트 프레뵈)가 제임스 본드(션 코너리)보다 더 흥미 있고 ‘케이프 피어’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변호사 샘(그레고리 펙)의 가족을 위협하는 사이코 맥스(로버트 미첨)의 벌거벗은 야수성에 주눅이 들게 되는 것도 ‘배디’들의 그늘진 매력 때문이다.
늘 좋은 사람이나 영웅으로만 나오던 헨리 폰다가 냉정한 킬러 프랭크로 나온 ‘옛날 옛적 서부에’에서 그가 검은 모자에 검은 부츠 그리고 검은 옷을 입고 가차 없이 사람을 쏴 죽이던 모습과 사람 간을 안주로 키안티를 즐기던 한니발 렉터(앤소니 합킨스)의 식인에 공포와 함께 가학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도 역시 이들의 악마성 때문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악인은 ‘제3의 사나이’의 해리 라임(오손 웰스)이다. 그는 전후 비엔나에서 물탄 페니실린을 팔아 어린 생명들을 희생시키면서 이득을 챙기고도 후회하지 않는 양심을 잊은 자. 그런데도 안나(알리다 발리)가 이 지적이요 냉소적인 악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검은 구름과도 같은 카리스마 때문일 것이다.
악한 여자로 나와 영원히 기억될 여자들도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여자는 아마도 ‘이중배상’에서 보험회사 직원(프레드 맥머리)과 짜고 남편을 살해한 필리스 디트릭슨(바바라 스탠윅)일 것이다. 이에 버금가는 간부가 ‘우체부는 항상 벨을 두 번 누른다’에서 젊은 떠돌이(존 가필드)와 짜고 나이 먹은 여관주인 남편을 살해한 젊은 아내 코라(라나 터너)다. 이들은 모두 팜므 파탈로 소위 남자 잡는 여자들이다.
많은 영화와 연극과 TV에 나왔으면서도 유독 두 번의 악역 때문에 영원한 악인으로 기억될 일라이 월랙이 6월24일 고향인 뉴욕에서 98세로 사망했다. 말론 브랜도, 몬고메리 클리프트 및 폴 뉴만과 함께 엘리아 카잔이 세운 액터스 스튜디오의 창립멤버인 월랙은 무대배우 출신으로 특히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 해석에 뛰어났다. 그는 1951년 윌리엄스의 ‘장미의 문신’으로 토니상을 탔다.
내가 월랙의 간사하고 교활하면서도 미소를 결코 잊지 않는 철저한 악인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은 존 스터제스가 감독한 웨스턴 ‘황야의 7인’에서였다. 아키라 쿠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를 미국 판으로 만든 것으로 율 브린너,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제임스 코번 및 로버트 번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나오는 액션이 콩 튀듯 하는 명작이다. 이런 액션을 엘머 번스틴의 질주하는 듯한 음악이 박력 있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월랙은 여기서 멕시코의 작은 깡촌을 정기적으로 터는 산적 두목으로 나온다. 지저분한 모습의 산적 주제에 비단셔츠를 입고 도금한 앞니를 드러낸 채 여우처럼 미소를 지으며 설교조의 사설을 늘어놓으면서 악행을 일과처럼 저질러 더욱 얄미운데도 미워할 수 없는 악인의 매력을 풍긴다. 그래서 그가 끝에 율 브린너의 총에 맞아 죽을 때 섭섭하기까지 했다.
월랙의 칼베라 역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공연한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제3편 ‘선인, 악인 그리고 추악한 놈’에서의 추악한 놈 투코 역을 위한 리허설이라고 해도 좋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도 그는 황금에 눈이 먼 멕시칸으로 나와 간악한 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킬러로 나온다. 늘 경계심을 못 늦춘채 교활하게 눈알을 굴려가면서 감언이설과 가짜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악역을 즐기는 장난꾸러기 아이 같이 굴다가 갑자기 총을 뽑아 사람을 쏴 죽인다. 이 역 때문에 투코와 월랙은 동명이인이 되다시피 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이색적인 음악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가관이다. 탐욕스런 투코가 남군이 숨겨놓은 거액의 군자금을 차지하려고 자기가 ‘블론디’라 부르는 이스트우드를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성가시게 굴자 블론디는 투코를 붙잡아 묘지의 십자가 위에 세운 채 나무에 그의 목을 매단다(사진). 투코는 바둥바둥 몸부림을 치면서 말을 타고 떠나가는 블론디를 향해 “블론디, 블론디”하고 소리치는데 총소리가 “빵”하고 난다.
오스카 생애업적상을 받은 월랙의 스크린 데뷔작은 카잔이 감독한 윌리엄스의 연극이 원작인 ‘베이비 달’. 그는 여기서 미시시피주의 다소 멍청한 남자(칼 말덴)에게 시집 온 소녀 신부(캐롤 베이커)를 어르듯 하면서 유혹하는 남자로 나왔다. 이 영화는 월랙이 가장 좋아는 영화다. 월랙의 마지막 영화는 올리버 스톤의 ‘월 스트릿: 머니 네버 슬립스’(2010)다.
<한국일보 편집위원 /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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