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차를 타고가면서 클래식 음악을 방송하는 KUSC를 듣고 있는데 프로그램 진행자가 신청곡을 틀겠다면서 신청자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신청자는 9세난 데이빗의 어머니. 데이빗은 자폐성 장애자로 클래식 음악을 무척 사랑하는데 데이빗의 부모는 음악인이 아닌데도 데이빗은 모든 악기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
데이빗의 어머니는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 곡을 들려주고 싶다면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부탁했다. 진행자가 “데이빗,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이다”라며 ‘타 타 타 타’로 시작되는 음악을 틀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데이빗의 어머니가 이 곡을 신청한 이유가 평생을 청각장애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위대한 음악을 작곡한 베토벤의 불굴의 투지와 인간승리의 정신을 아들의 영혼과 교감시켜 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음악의 치유 능력이다.
교향곡 제5번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들을 때마다 전율을 느끼게 되는 베토벤의 ‘운명’이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말러의 제5번일 것이다. 이 교향곡은 말러가 아내 알마에게 보내는 연서인 느리고 로맨틱한 제4악장 아다지에토로 유명하다. 이 음악은 루키노 비스콘티가 감독한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효과적으로 쓰였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제5번. 이 곡은 어둡도록 장엄하고 아름다운 음악도 음악이지만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작곡한 이유로 더 유명해진 교향곡이다. 그가 자아 비판적인 이 곡을 작곡하게 된 까닭은 1934년에 초연된 자신의 오페라 ‘므첸스크 디스트릭의 레이디 맥베스’ 때문이다.
오페라의 내용은 불행한 결혼생활에 시달리는 부농의 아내가 하인 농부와 간통한 뒤 독재자 같은 시아버지와 무기력한 남편을 살해하나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는 얘기다. 나는 이 오페라를 오래 전에 다운타운의 뮤직센터에서 키로프 오페라 공연으로 관람했었다.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풍자적 위트로 가득한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초연 시 비평가와 관객의 큰 호응을 받은 이 오페라를 1936년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보다가 도중에 퇴장한데 이어 공산당기관지 프라우다가 사설로 이 작품을 타락한 것이라고 공격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여생을 정치적 박해와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면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가 ‘메아 쿨파’로 작곡한 것이 제5번 교향곡이다. 그는 이 곡에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실용적이요 창조적인 대답’이라는 부제를 붙이면서 스탈린에게 백배 사죄를 했다.
이렇게 작곡된 교향곡은 1937년에 초연돼 비평가들의 호평과 청중들의 호응을 받았는데 퇴폐적인(?) ‘므첸스크 디스트릭의 레이디 맥베스’와는 달리 여러 모로 정상적인 음악의 틀에 정착한 모범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특히 감상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제3악장(초연 시 청중들이 울었다고 한다)에 이은 제4악장의 요란한 승전가와도 같은 코다는 사기를 진작시키는 긍정적인 것이어서 공산주의에 대한 찬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 코다에 대해 “넘쳐나는 아첨의 의상을 입은 속이 공허한 독재자에 대한 풍자적 그림”이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나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의 음악은 러시아음악 특유의 서정성과 비극성 그리고 우울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희롱기가 있다. 그의 음악의 이런 풍자성과 희롱기는 예술가의 창조성과 자유혼을 핍박하는 공산체제에 대한 신랄한 야유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 12일 디즈니 컨서트 홀에서 LA필이 연주한 두 곡은 모두 평생을 고뇌와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베토벤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이었다. 지휘는 오는 2018년 시즌부터 뉴욕필의 상임 지휘자 직을 맡을 네덜랜드 태생의 얍 환 즈베덴(56).
운동선수처럼 단단한 체구를 지닌 즈베덴은 표정이나 태도가 모두 매우 진지했는데 강건하고 강렬한 지휘로 베토벤과 쇼스타코비치를 제어하다시피 했다. 지휘 스타일이 크고 튼튼하면서도 서정적이요 섬세한 부분까지도 철저했지만 대체적으로 다부지고 역동적이었다.
7세 때 바이얼린을 든 즈베덴은 15세 때부터 줄리아드에서 수련, 19세에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체르토헤보 오케스트라 사상 최연소의 컨서트 매스터가 되었다. 즈베덴은 내가 잘 아는 한국인 음악교수의 제자다. 그가 1990년대 중반에 지휘자로 변신을 한 것은 그의 지휘를 본 레너드 번스타인의 권유에 의해서라고 한다.
자폐성 장애자 아들을 갖고 있는 즈베덴은 1997년 부인과 함께 자폐성 장애아동의 부모를 위한 파파게노 재단을 설립, 음악을 통해 음악 치료사와 음악가들이 장애아동들을 돕는데 기여하고 있다. 자폐증 장애자의 어머니가 신청한 곡과 자폐증 장애자의 아버지가 지휘한 곡이 모두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이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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