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6월 20일 월요일

‘연인들과 폭군’




오는 9월에 개봉되는 ‘연인들과 폭군’(The Lovers and the Despot)의 연인들은 영화감독 신상옥과 그의 아내이자 배우인 최은희(89)요, 폭군은 북한의 영화광 김정일이다. 영국의 로버트 캐난과 로스 아담이 공동으로 감독한 최은희와 신상옥의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북한에로의 피랍사건을 다룬 기록영화다.
두 부부의 개인적 면모와 김정일의 영화에 대한 집념을 비롯해 북한의 실상을 흥미 있고 또 유익하게 다룬 영화로 서스펜스 스릴러이자 멜로드라마 같다. 흥미 있는 것은 최은희와 신상옥이 몰래 녹음한 김정일과의 전화통화 내용. 김정일의 육성으로 그의 영화에 대한 애착을 들을 수 있다.
신상옥은 1950년대 영화 활동을 시작해 1960년대 신필름을 통해 300여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절정기를 이뤘는데 그의 많은 작품에 최은희를 사용했다. 그 대표적 영화가 최은희와 김진규가 나온 빅히트작 ‘성춘향’(1961). 그러나 신상옥은 신필름이 1978년대에 이르러 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최은희와의 이혼 및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최은희는 자신과 신감독과의 만남과 남편의 부정으로 인한 이혼 그리고 북한에서의 재회와 관계의 재연결 및 작품활동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최은희가 홍콩으로부터 영화 제작자를 자처하는 여자에게서 영화를 함께 만들자는 전화를 받은 것은 1978년 7월. 홍콩에 간 최은희는 7월11일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는데 최은희는 증언에서 회물선을 타고 북한으로 가는 8일간 몇 명의 터프가이들이 자신을 감시했다고 말한다. 영화 제작자를 자처한 여자는 북한의 스파이였다.
북한에 도착한 최은희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이 김정일. 김정일은 최은희와 악수를 하면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반색을 한다. 그 뒤로 최은희는 집이 제공되고 좋은 대접을 받으나 방기된 상태로 남는데 최은희는 증언에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집 마당에 각종 채소를 가꿨다고 말한다.
김정일이 최은희를 납치한 것은 그가 남한의 영화를 북한의 그것보다 월등하다고 느끼면서 동경을 했기 때문인데 그가 북한 영화인들에게 “왜 우리는 남조선처럼 영화를 못 만드냐”고 질책하는 것을 녹음테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최은희가 실종된지 2개월 후 신상옥이 홍콩으로 최은희를 찾으러 갔다가 역시 실종된다. 당시 신상옥이 실종되자 그가 한국의 중정요원에 의해 살해됐다는 설과 함께 북한에로의 자진 입국설 그리고 납북설 등 각종 추측이 난무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신상옥이 나타난 것은 납북된지 5년 후 그가 만든 북한 영화가 알려지면서이다. 이 5년간 신상옥은 북한의 감옥에 투옥돼 있었는데 과감히 탈출해 기차를 타고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독방에 갇혀 세뇌를 받게 된다. 여기서 신상옥은 살아남기 위해 김정일에게 충성서약의 글을 쓰는데 그로 인해 신상옥은 감옥에서 풀려나 최은희와 재회, 영화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둘은 김정일의 총감독 하에 특혜를 받으면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1986년 유럽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핑계로 비엔나에 갔다가 주비엔나 미대사관을 통해 탈출하기까지 2년여동안 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사진) 김정일은 신상옥과 최은희에게 ‘주의’ 대신 감정적인 영화를 만들어 북한 영화를 세계적 수준에 올려놓자고 격려했다. 그래서 ‘춘향’을 비롯한 러브스토리도 만들었고 대규모 제작비가 든 ‘불가사리’도 나왔다. 둘이 만든 ‘소금’으로 최은희는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북한 탈출 이후 신 감독부부는 미국에서 살면서 신상옥은 아이들 영화 ‘닌자’를 만들었는데 이어 한국으로 돌아가 지난 2006년 80세로 별세했다. 미국에 있을 때 신상옥의 생애 마지막 꿈은 대하극 ‘징기스칸’을 만드는 것이었으나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나는 신상옥 납치 때 한국의 한국일보에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는데 그 때 그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며칠간을 그의 집에서 죽치고 앉아 야근을 했었다. 그 후 내가 신상옥의 전화를 받은 것이 1986년 LA의 한국일보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나는 서울의 한국일보 자매지 일간 스포츠에 매주 1회씩 2면에 걸쳐 할리웃에 관한 얘기를 연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반말로 “나 신상옥인데 일간 스포츠 지면을 나를 위해 남겨 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그의 음성이 반갑기는 했지만 “거 참 거만하기도 하구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후 코리아타운의 한 식당에서 신 감독부부를 목격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신상옥과 최은희라면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오래 전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다. 안내원의 안내로 조선예술영화 촬영소를 둘러보면서 내가 안내원에게 “신상옥과 최은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안내원은 “우리가 그렇게 잘 대접해 주었는데 배신했다”면서 “죽일 것들”이라고 악담을 했었다. 가슴이 섬뜩했었다.    
*지난주 칼럼 내용 중 바그너는 베니스에서 숨졌기에 고칩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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