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금 흑과 백이 전쟁 중이다. 백인 경찰이 검문과정에서 흑인들을 사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텍사스주 달라스와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서 각기 흑인이 경찰을 살해(총 8명의 피해자 중 1명은 흑인), 또 다시 흑백문제가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다.
미국에서 흑백차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민권법안이 통과된 지 반세기가 되는 요즘에 와서도 ‘흑인들의 목숨도 중요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피가 피를 부르는 유혈폭력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달라스와 배턴루지의 총격사건은 다시 한 번 흑백 간에 깊이 패인 증오와 불신과 대결의식의 골을 노정시킨 것이다.
현실이라기보다 영화와도 같은 두 도시의 총격사건을 보면서 언뜻 흑백문제를 다룬 2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흑백문제를 다룬 영화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흥미진진하고 또 의미심장한 것이 모두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컸던 스탠리 크레이머가 제작하고 감독한 ‘흑과 백’(The Defiant Ones·1958)과 ‘초대 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1967)이다.
‘흑과 백’(사진)은 토니 커티스와 시드니 포이티에가 주연한 흑백 드라마로 쇠사슬에 함께 묶인 흑과 백의 두 죄수의 탈출기이다. 미 남부의 두 죄수 백인 존과 흑인 노아를 수송하던 트럭이 전복하면서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함께 팔목이 묶여진 둘은 도주한다.
둘은 서로를 죽도록 증오하면서도 자유를 향한 도주를 위해 이를 억제한다. 둘은 서로 육박전을 벌이고 욕설을 주고 받다가도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휴전에 들어간다. 존과 노아는 도중에 동네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한 농가의 섹스에 굶주린 젊은 홀어머니로 인해 배신의 유혹을 받기도 하지만 둘은 서로를 묶은 쇠사슬을 끊은 후에도 함께 달아난다. 둘을 묶었던 쇠사슬이 존과 노아를 친구이자 동료로 만들어준 것이다.
라스트 신이 인상적이다. 달리는 화물열차에 먼저 올라탄 노아가 안간힘을 쓰면서 뒤따라 달려오는 존을 향해 팔을 길게 내뻗지만 존이 이를 잡지 못하자 노아는 존을 버리지 못해 기차 밖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노아는 존을 품에 안고 흑인 노래를 부른다. 동료애에 의한 흑백통합이다.
형제애와 우정, 증오와 편견 그리고 인종간 대결의식과 가혹한 미 형벌제도를 고찰한 작품으로 모질고 가혹하면서도 얄궂은 유머와 박력 있는 액션을 지닌 작품이다. 당시만 해도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미 남부에서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대부분 다른 곳에서는 호평과 함께 흥행도 잘 됐다.
커티스와 포이티에의 연기가 강렬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쁜 남자로 취급받던 커티스가 사납고 거친 연기를 맹렬히 해낸다. 포이티에 역시 훌륭한데 그는 이 역으로 베를린영화제서 주연상을 탔다. 둘은 이 영화로 빅스타가 된다. 영화는 오스카 각본과 촬영상을 받았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은 제작 당시만 해도 미 17개 주에서 불법화하던 흑백 간 결혼문제를 다룬 드라마다. 진보적인 미 상류층 부부로 평소 인종간 평등의 이념을 지녔던 백인 부부 맷과 크리스티나(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 자신들의 딸 조앤나(헵번의 질녀 캐서린 하우턴)가 흑인 변호사 존(시드니 포이티에)과의 결혼을 선언하자 당황해 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특히 이 결합에 크게 실망하는 사람이 맷. 흑백평등 의식을 딸에게 심어준 그가 막상 딸이 흑인과 결혼하게 되자 심한 갈등에 빠지나 뒤늦게 사랑의 중요함을 깨닫고 딸과 존을 받아들인다.
아마도 이런 다른 인종 간의 결합문제는 미국에 사는 많은 한국인 부모들도 겪었고 또 겪을 일이어서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많은 한국인 부모들도 자기 자녀들이 타인종과 결혼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인종차별이란 이렇게 우리 모두 내부에 잠복해 있는 바이러스다.
감동적인 것은 존이 자신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아버지에게 하는 말. “아버지는 자신을 흑인남자로 생각하지만 나는 자신을 남자로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오스카 각본상과 함께 헵번이 주연상을 탔는데 헵번의 연인인 트레이시는 영화촬영이 끝난지 2주 후 사망했다.
과연 흑백문제에는 해답이 있는가. 최근 뉴욕에서 만난 우디 앨런의 말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사태는 미국이 노예소유 국가로 세워졌고 또 여러 세대에 걸쳐 인종편견으로 채워진 나라라는 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다. 수백년 간을 인종문제에 대해 무감각해 온 나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현 폭력적인 사태는 인종 간에 깊이 뿌리 박힌 반감이 고르게 되어 사람들이 그것을 더 이상 느끼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물어야 할 대가다. 우리가 여전히 타인종을 증오한다면 법으로 인종통합을 시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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