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7월 12일 화요일

하와이의 골디




나는 여름과 태양과 피서인파로 북적거리는 바다를 싫어한다. 내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어쩌면 그가 ‘묻지 마 살인’ 식으로 아랍인을 총으로 쏴죽이고 범행동기에 대해 한다는 소리가 열기와 밝은 햇빛 때문이라고 태양을 탓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열하는 태양을 불편해한 또 다른 주인공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주꾼 미스터 리플리’를 원작으로 르네 클레망이 만든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살인자 탐 리플리다. 리플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 카페에 앉아 “불편한데 없으세요”라고 묻는 웨이트리스에게 “태양 때문이에요. 너무 밝아요. 그 외엔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니노 로타의 음악이 빅히트한 영화에서 리플리 역은 알랭 들롱이 했는데 그의 비수 같은 푸른 눈동자와 맨발로 신은 간편화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여름과 태양을 싫어하는 대신 겨울과 그 바람을 좋아한다. 내가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창 문학청년으로 시를 쓰던 대학시절에 사학을 전공하던 친구 P와 함께 가끔 인천 송도로 겨울바다 바람을 쐬러 가곤 했었다. 둘이 방파제에 앉아 소주를 마시면서 겨울바람이 싹 쓸어간 세속과 인파가 종적을 감춘 겨울바다를 바라보면서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낭만에 잠기곤 했었다.
그런 내가 지난 주말 복중에 하와이에 간 것은 왕년에 할리웃을 주름잡던 왕눈이 코미디언 골디 혼(70·사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난 ‘졸병 벤자민’으로 유명한 골디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다 그녀가 지금 하와이에서 찍고 있는 영화가 그녀로선 14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것이어서 만나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는 하와이가 어린 내게 영화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어서 난 하와이하면 대뜸 이 영화부터 생각난다. 나는 지난 1987년 이 영화에 관한 기사를 쓰려고 하와이에 가 주인공들인 군인들이 주둔한 스코필드 병영과 유부녀 데보라 카와 말뚝상사 버트 랜카스터가 달밤에 온 몸에 파도를 뒤집어쓰며 뜨거운 키스를 나눈 와이키키 해변을 둘러보았었다.
이번에 근 30년만에 하와이를 찾으면서 밤의 와이키키를 다시 한 번 거닐겠다고 다짐했었으나 숙소가 외딴 유원지 내에 있어서 뜻을 못 이뤘다. 30년이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은 것은 하와이의 바람이다. 여인의 감촉처럼 부드럽다. 그리고 야자수가 긴 머리를 풀어 밤바람에 씻는 풍경도 마찬가지다.                
도착한 날 해변 잔디에서 하와이 전통 노래와 훌라춤을 듣고 봤는데 하와이를 비롯해 피지, 사모아, 타히티 및 폴리네시아의 특성을 보여주는 춤이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온 ‘블루 하와이’에서 본 것 그대로다.
그런데 내가 염세적이어서 그런지 내겐 하와이안 송이 슬프게 들렸다. 그래서 노래하는 원주민 트리오에게 다가가 “왜 내겐 당신들의 노래가 슬프게 들리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슬프다기보다 로맨틱하지 않으냐”고 답한다. 그리고 우리는 로맨스와 슬픔은 잘 어울리는 것인 만큼 슬프게 들릴 수도 있다는데 동의했다.
내가 피해망상증자인지는 몰라도 코코넛 브래지어를 한 여자들과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남자들이 추는 춤을 보면서 즐겁다기보다 오히려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영광과 패기를 분실당한 것 같은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 미소를 지으면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뭔가 가슴에 걸리는 것 같았다.
30년 전에 영화 ‘역마차’에 관한 얘기를 쓰려고 작품의 무대인 모뉴먼트 밸리에 갔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안내원이 티피 안에서 피륙을 짜고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 여자를 보여줬는데 밖으로 나오니 거리에선 장사꾼이 된 인디언들이 좌판에 돌 보석을 놓고 팔고 있었다. 그 용맹무쌍하던 사람들의 초라해진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었다.
골디가 나오는 영화는 아직 제목도 정해지지 않은 액션 코미디이자 모녀관계의 얘기다. 락뮤지션인 애인과 에콰도르(하와이가 에콰도르를 대신한다)로 여행 가기 직전 애인으로부터 버림  받은 여자(에이미 슈머)가 꿩 대신 닭이라고 자기 어머니(골디 혼)와 함께 남미로 내려갔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돼 곤욕을 치르면서 모녀관계를 새삼 추스른다는 내용. 인터뷰 내용은 엠바고가 걸려 쓸 수 없다.
이마를 가린 채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특유의 헤픈 듯한 웃음인 “헤 헤 헤”를 연발하면서 우리와 만난 골디는 아직도 귀염성을 지니곤 있었으나 나이는 못 속인다고 늙었다. 그러나 건강미와 함께 밝고 명랑했는데 스타 티를 내지 않아 친근감이 갔다. 인터뷰 후 사진을 찍고 “커트(지난 34년간 동거하고 있는 배우 커트 러셀) 요즘 뭘 하나요”하고 물으니 ‘분노의 질주’ 제8편을 찍고 있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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