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0월 20일 화요일

‘트리거 모티스’




창백한 올리브 빛 피부에 짧게 깍은 머리 그리고 돗수 높은 쇠테 안경을 쓴 신재성은 30세 정도였으나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큰 키에 날씬하고 손가락은 길고 섬세했는데 말끔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 사람을 잡아 끄는 마력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도도해 보였다.
신재성은 영국작가 앤소니 호로위츠가 본드소설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의 TV쇼용 유고를 바탕으로 쓴 최신 제임스 본드 소설 ‘트리거 모티스’(Trigger Mortis^사진)에 나오는 본드 악한이다. 007시리즈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인 본드 악한으로 영어 이름이 제이슨 신(Sin)이어서 본드로부터 ‘타고난 죄인’이라고 조롱을 받는데 본드와는 정반대로 여자에 전연 관심이 없다.
신재성은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붙잡아 놓은 본드에게 “난 그 때 영혼과 인간성을 다 빼앗겼어. 그리고 나는 모든 느낌을 상실했지. 내 자신이 죽음이야”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소설은 ‘골드핑거’가 끝난지 2주 후에 시작한다. ‘골드핑거’의 푸시 갤로어가 본드걸이 됐지만 본드는 한 여자와 오래 못 있는데다가 갤로어는 레즈비언이어서 둘은 얼마 못 가 헤어진다.
1957년 미국과 소련간에 냉전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두 나라가 막 우주경쟁에 들어 섰던 때. 본격적인 플롯인 소련의 미국 로켓발사 사보타지가 있기 전 서막식으로 본드는 독일의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리는 그랑프리에 마제라티를 타고 참가, 소련의 영국인 선수 살해 음모를 저지한다.
본드는 여기서 처음 신재성을 목격하고 소설의 본격적인 본드걸로 미 정보기관 요원인 제파디 레인을 만나는 것도 경주트랙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재성의 대저택 슐로스(성이라는 뜻) 브론자트에서다.
소련첩보기관인 악명 높은 ‘스메르쉬’(SMERSH)의 미국의 인공위성을 적재한 뱅가드로켓 발사 사보타지에는 나치가 만든 위폐제조기로 찍은 달러가 사용되는데 여기에 신재성이 동참하면서 마지막에 그와 본드간에 사투가 벌어진다.
신재성은 왜 복수심에 불타는 산송장 같은 인간이 되었을까. 6.25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때문이다. 1927년생인 신재성은 친 할머니가 민비를 모신 서울 양반집 태생으로 서울대를 나왔다. 그런데 6.25가 나면서 가족이 피난을 가던 중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00여명의 양민이 학살 당했을 때 신재성은 자기 부모와 두 여동생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 남는다.
그 후 부산으로 내려간 신재성은 피난 가기를 거절한 할머니가 준 여러 알의 푸른 다이아먼드 중 하나를 광복동 보석상에 팔아 받은 돈으로 하와이로 밀항한다. 이어 그는 뉴욕으로 옮긴 뒤 ‘블루 다이아먼드’라는 건설 및 청소회사를 차려 크게 성공, 미국내 최고의 한국인 부자가 된다.
이런 과거를 지닌채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재성이 소련측과 손 잡고 미 로켓발사 사보타지에 나선 것은 당연지사라고 보겠다. 그런데 사실 이 사보타지는 신재성이 계획한 뉴욕 맨해탄에 대한 본격적인 테러를 위한 양동작전인 셈이다.
본드의 악인들이 다 그렇듯이 신재성도 매우 잔인하고 사악하며 사무적이요 냉소적이다. 그런데 기차게 흥미 있는 것은 신재성이 자기 적을 죽일 때는 죽을 자로 하여금 죽는 수단을 선택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 때 쓰여지는 것이 화투장이다. 신재성은 자신의 희생물이 될 사람 앞에 화투장의 뒷면이 보이도록 깔아놓은 뒤 그로 하여금 한 장을 고르라고 지시한다. 뒤집은 화투장에는 ‘교수’와 ‘생매장’과 ‘독약’ 등 여러 가지 죽음의 수단들이 적혀 있는데 신재성에게 붙잡힌 본드는 ‘생매장’ 화투장을 골랐다가 생매장 당해 죽을 고생을 한다.
신재성의 최종 공격 목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이 빌딩을 파괴할 폭탄을 싣고 맨해탄 지하를 질주하는 지하철에서 본드와 신재성이 처절한 격투를 벌이면서 책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모든 것이 끝나고 본드와 제파디는 플라자호텔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 뒤 헤어진다.
310쪽의 강건체 스타일로 군더더기 없이 쓴 책이 진행이 빠르고 스릴과 재미가 있어 순식간에 읽어 내려 갔다. 본드소설 답게 마제라티와 애스턴 마틴 등 차와 섹시한 여자들과 본드 악한 그리고 와인과 마티니 및 오메가시계가 나오는데 다소 과거 본드영화들인 ‘닥터 노’와 ‘선더볼’ 등의 일부를 빌려다 쓴 듯한 느낌이 있다.
때로 터무니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원래 본드얘기는 꽤 터무니없는 것이 사실. ‘파트 투’부터 본격적으로 흥분감을 북돋우는 소설에는 본드의 오랜 주변인물들인 M과 Q와 모니페니 등이 재등장하고 본드의 권총인 월터PPK도 다시 사용된다. 그런데 왜 호로위츠는 한국인을 본드 악한으로 골랐을까.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과연 어느 한국배우가 신재성 역을 맡을지  궁금하다.
‘트리거 모티스’와 때를 맞춰 본드시리즈의 음악과 노래들에 관한 ‘제임스 본드 노래들’(The James Bond Songs)이 출간됐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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