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대니 보이, 더 파입스, 더 파입스 아 콜링/프롬 글렌 투 글렌 다운 더 마운튼 사이드.” 노래는 아일랜드 민요지만 갤릭어로 계곡을 뜻하는 ‘글렌’(glen)은 스코틀랜드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킬트를 입은 점잖은 포터가 수문장 노릇을 하는 퍼드의 숙소 이름도 ‘글렌이글즈’(교회의 계곡) 호텔이요 이 나라의 명품인 스카치위스키의 이름들도 ‘글렌피딕’(사진) ‘글렌리벳’ ‘글렌킨치’ ‘글렌고인’ 등 글렌 일색이다.
실제로도 계곡이 많은 한 여름 스코틀랜드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거울로 삼고 진초록으로 몸을 단장하고 있었다. 존 포드의 명작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언뜻 떠올랐다. 영화의 무대는 웨일즈이지만 외지인에겐 웨일즈와 스코틀랜드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케이블TV 스타즈(Starz)의 인기 드라마 시리즈 ‘아웃랜더’(Outlander)의 컴버널드에 있는 촬영현장 방문과 배우 인터뷰 차 지난주 스코틀랜드엘 다녀왔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한 부분이나 내가 나라라고 부른 것은 이 곳 사람들이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독립국가로 여기기 때문이다.
건물에 게양된 기도 유니언잭이 아니라 푸른 바탕에 X자 모양의 십자가가 그려진 스코틀랜드기다. 시리즈에 나오는 그랜트 오로크에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진정한 차이가 뭐냐고 물었더니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술꾼인 그는 박지성 때문에 한국 이름에 익숙하다면서 이왕 스코틀랜드에 왔으니 종류 불문하고 스카치를 많이 마시라고 종용했다.
우리가 방문한 스코틀랜드기가 펄럭이는 귀족 호프 가문의 대저택 호프툰하우스에 있는 여자 안내원도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우리는 스카티시”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션 코너리도 열렬한 스코틀랜드 독립파다. 독립 문제를 놓고 지난해에 국민투표가 시행됐지만 근소한 차로 부결됐다. 스카티시들은 모두 잉글리시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는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원치 않는 사람은 비애국자로 여겨지는 것이 두려워 함구한다고 안내원이 말했다.
목이 달아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의 대관식이 열렸던 스털링성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에 침공하는 잉글랜드군을 맞아 싸운 스코틀랜드의 국민영웅 윌리엄 월래스의 기념 건조물이 위풍당당하다. 월래스의 얘기는 멜 깁슨이 감독 주연해 오스카상을 탄 ‘브레이브하트’에서 극적으로 그려졌다.
스코틀랜드는 전쟁과 참수의 나라이자 계곡과 위스키와 성의 고장으로 잔해뿐인 것을 합해 성이 자그마치 3,000여개나 되는데 특히 빅토리아 여왕이 매우 사랑했다고 안내원이 알려줬다. 케케묵은 땅으로 어디를 가나 퀴퀴한 역사의 곰팡이 냄새가 난다. ‘아웃랜더’의 여주인공처럼 시간여행을 하고 다녔다.
‘아웃랜더’는 2차 대전에서 간호사로 일한 클레어가 종전 후 남편 프랭크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제2의 신혼여행을 왔다가 혼자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면서 겪는 로맨틱 액션 모험극이다. 클레어는 1743년으로 돌아가 침략군인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우는 늠름한 스코틀랜드 사나이 제이미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현재 제2 시즌을 촬영 중인데 세트와 의상과 현지 촬영 및 내용 등이 모두 훌륭한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스코틀랜드에 왔으니 스카치위스키를 아니 마실 수가 없는 일. 스카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인데다가 오로크의 충고도 있고 해서 다양한 종류의 스카치를 음주했다. 향기가 여인의 체취 같이 유혹적이다.
스코틀랜드에 들르기 전 케이블TV FX가 방영할 14세기 역사극 ‘배스타드 처형자’(The Bastard Executioner)의 촬영지 방문과 배우 인터뷰 차 웨일즈의 카르디프에 먼저 들렀다. 용이 상징인 웨일즈는 모든 안내문을 영어와 웰시로 적은 것이 눈에 띄는데 도심 한복판에 11세기에 이 곳을 침공한 노만족이 세운 카르디프성이 우뚝 서 있다. 영국에서 11세기 얘기 듣는 것은 이제 옛날 같지도 않다.
못으로 둘러싼 성은 나무다리로 땅과 연결됐는데 보고 있자니 로빈 후드가 공격한 노팅엄의 성이 연상됐다. 성루에서 병사들이 화살을 쏴댈 것 같은 역사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 성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2차 대전 때 나치의 공습에 대비, 성벽을 따라 길게 만든 좁은 대피소다. 영화에서 많이 보던 대피소에는 벽을 따라 벤치와 철제 침대가 놓여 있고 벽에는 경고문과 사기 진작용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당시의 주방과 메뉴판 그리고 군복과 군모와 라디오도 보인다.
대피소를 걷고 있는데 스피커를 통해 나치 공군의 폭격소리와 함께 처칠의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말합니다. 오늘 부로 영국은 독일과 교전상태에 들어갑니다”라는 대국민 발표가 나온다. 이어 2차 대전 때 크게 유행한 베라 린이 부른 멜랑콜리한 ‘위일 밋 어겐’이 흘러나왔다. “위일 밋 어겐, 아이 돈 노 웨어, 아이 돈 노 웬.” 노래를 들으면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전쟁의 물리칠 수 없는 광기를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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