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린 눈에 종잇장처럼 얇은 입술 그리고 주먹코를 한 과묵한 프랑스 명우 장 가방은 1930년대 로맨틱한 염세주의를 상징했던 프랑스 영화의 동의어와도 같은 배우였다. 그는 운명을 트렌치코트처럼 걸치고 다니는 저주받은 반영웅처럼 기억될 만큼 숙명적이요 비극적이며 어두운 영화에 많이 나왔다. 장 가방 하면 세속적인 국외자요 고독자가 연상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가방은 1930년대 프랑스 영화의 흐름이었던 ‘시적 사실주의’(Poetic Realism)의 대표적인 스타로 많은 영화에서 자기를 파괴하려는 잔인한 운명과 투쟁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나왔다. 고독이라는 병을 앓은 뒤 순수한 사랑을 찾아 잠시 위로를 받으나 또 다시 기만당하고 자신의 꿈을 빼앗겨 살인을 저지르고 자살하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시적 사실주의’는 주로 파리 주변을 무대로 한 노동자 계급의 도시 드라마로 매우 어둡고 염세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다. 신화 속 존재 같은 남자들이 주인공으로 이들은 때로 범죄를 저지르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다가 대부분 처절한 종말을 맞는다.
전쟁의 암운이 하늘을 뒤덮은 당시 프랑스의 시민들의 절망과 허무를 대변했는데 뛰어난 형식미 속에 각박한 일상과 서정적이요 감정적인 것의 이중성을 담고 있다. 회색으로 채색된 실존적 영화다.
가방이 나온 ‘사적 사실주의’의 걸작 중 하나가 살인자 프랑스와의 하룻밤을 그린 ‘새벽’(Le Jour se Leve·1939·사진)이다. 노르망디 교외의 노동자층이 사는 6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에서 분노한 음성과 함께 한 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아파트의 좁은 계단 아래로 말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굴러 떨어져 내린다.
이어 아파트에 들이닥친 경찰들이 프랑스와가 바리케이드를 친 아파트 문을 향해 총알을 쏟아 붓는다(실탄이 사용됐다).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프링스와의 현재와 그가 회상하는 과거가 교차되면서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권총자살로 끝난다.
공장 노동자인 프랑스와와 그가 사랑하는 가녀린 꽃가게 여점원 프링스와즈(자클린 로랑) 그리고 프랑스와를 사랑하는 클럽 쇼걸 클라라(아를레티) 및 이 두 여인을 소유하다시피 한 쇼맨 발랑탕(쥘르 베리) 등 4인이 맺는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로 암담하기 그지없다.
흑백 촬영이 뛰어난 이 영화의 감독은 마르셀 카르네이고 각본가는 시인이기도 한 자크 프레베르인데 프레베르의 아름다운 글이 자칫 멜로드라마가 될 수도 있는 절망적인 얘기를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시적 사실주의’의 또 다른 걸작으로 역시 가방이 나오고 호심 같은 눈을 지녔던 미셸 모르강이 공연한 음습한 분위기의 ‘안개 낀 부두’(Le Quais des Brumes·1938)와 이 영화사조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마르셀 마르소와 아를레티가 나오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명작 ‘천국의 아이들’(Les Enfants du Paradis·1943-45)도 같이 만들었다.
‘새벽’은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장이 ‘우리 시대 영화의 비극적 영웅’이라고 칭한 가방이 사랑과 희망을 잃고 살인을 한 뒤 스스로를 자기 아파트에 가두어 놓은 킬러의 연기를 마치 우리 안에 갇힌 치명상을 입은 짐승처럼 불안하고 절실하게 보여준 명화다.
영화는 개봉되면서 당시 나치의 프랑스 괴뢰정부였던 비시 정부의 혹독한 검열을 받고 아를레티의 나신장면과 경찰을 파시스트에 비유한 대사를 비롯해 둘 다 유대인이었던 촬영감독 쿠르트 쿠란트와 프로덕션 디자이너 알렉상드르 트러네의 이름이 잘려 나갔다. 그러다가 곧 이어서는 영화가 ‘지나치게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아예 상영금지 조치를 당했다.
가방의 신화를 창조한 ‘시적 사실주의’의 첫 영화는 쥘리앙 뒤비비에가 감독(공동 각색 겸)한 운명이 판을 치는 로맨틱한 갱스터 영화 ‘페페 르 모코’(Pepe le Moko·1937)다. 파리에서 은행강도를 한 뒤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의 항구도시 알지에의 언덕 위 아랍계들이 사는 치외법권 지대나 마찬가지인 달동네 카스바에 숨어 사는 플레이보이 페페의 이야기다.
하구한날 항구를 바라다보며 파리를 그리워하던 페페가 파리에서 놀러와 구경 차 카스바로 올라온 돈 많은 늙은이의 정부로 깊은 눈동자를 지닌 가비(미레유 발랑)을 사랑하게 되면서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다.
암흑세계의 갱스터에 대한 동경이요 미녀와 야수의 드라마로 페페가 고동소리를 내며 항구를 떠나가는 귀국선을 탄 가비를 향해 “가비”하고 외치면서 주머니에서 꺼낸 손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라스트신은 잊지 못할 장면이다. 이 영화는 1938년 샤를르 봐이에와 헤디 라마 주연의 흑백 미국 영화 ‘앨지어즈’(Algiers)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도 삼삼하다.
가방이 저주 받은 사랑을 하는 남자로 나와 치열한 연기를 한 또 하나의 1930년대의 명작이 장 르느와르(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의 아들)가 감독한 ‘인간 짐승’(La Bete Humaine· 1938)이다. 에밀 졸라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에서 열차 기관사인 가방은 역장인 남편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는 요부(시몬 시몽)를 사랑하다가 여자를 목 졸라 죽이고 자기는 달려오는 기차에 투신자살한다.
‘새벽’ 개봉 75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잘려나간 장면과 대사 그리고 크레딧이 복원된 새 프린트로 14일부터 로열극장(11523 Santa Monica)에서 상영된다. (310-478-3836), 플레이하우스(패사디나).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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