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타락한 여인’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들은 참 불쌍하게들 죽는다. 지금 LA에서는 폐병에 걸린 비올레타가 애인 알프레도의 품에 안겨 죽고 뉴욕에서는 역시 폐병에 걸린 미미가 애인 로돌포의 품에 안겨 죽는다. 
비올레타는 LA 오페라의 시즌 개막작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ㆍ사진)의 주인공인 고급 창녀이고 미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23일부터 공연할 푸치니의 ‘라 보엠’의 주인공인 재봉사다. 19세기만 해도 폐병은 현재의 암과 같은 불치병이었다.
비올레타와 미미 외에도 많은 프리마 돈나들이 비명횡사하거나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질다(‘리골레토’)는 아버지 리골레토의 칼에 찔려 죽고 카르멘은 애인 호세의 칼에 찔려 죽는다(‘카르멘’). 아이다는 애인 라다메스와 함께 생매장 당하고(‘아이다’) 데스데모나(‘오텔로’)는 남편 오텔로가 목을 졸라 죽인다.
토스카는 투신자살하고(‘토스카’) 치오-치오 산은 하라키리 칼로 목을 베고 자살한다(‘나비부인’). 루치아(‘람메르모어의 루치아’)는 미쳐 죽고 노르마는 불에 타 죽는다(‘노르마’). 그리고 이졸데는 애인 트리스탄이 칼에 찔려 죽자 자기도 따라 죽고(‘트리스탄과 이졸데’) 요부 마농은 기운이 빠져 죽는다(‘마농’).
비극이 희극보다 더 극적인 감동과 충격을 주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프리마 돈나들이 희생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생애 30편의 오페라를 작곡한 베르디의 작품 중 희극은 단 2편뿐인 까닭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들 프리마 돈나들은 죽을 때 그렇게 순순히 죽지를 않는다. 드러누워 죽었는줄 알았는데 다시 벌떡 일어나 할 말 다하고 부를 노래 다 부르고 다시 쓰러진다. 이젠 그만 죽었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다시 또 일어나 열창을 하고나서야 쓰러져 영면에 들어간다.
이를 두고 오페라적 죽음이라고 하는데 13일에 본 ‘라 트라비아타’에서도 쇠약해 소파에 누워있던 비올레타(조지아 태생의 니노 마차이제)가 다시 일어나 알프레도와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 그리고 자기를 돌봐주던 의사 그랑빌과 하녀 안니나에게 할 말 다하고 부를 노래 다 부르고 작별인사까지 하고 나서야 다시 쓰러져 죽는다.
‘라 트라비아타’(타락한 여인이라는 뜻)는 베르디의 오페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옛날에 한국의 전쟁영화 ‘5인의 해병’에서 육군 졸병 곽규석이 “리비아모 잘 났다 못 났다”하면서 이 오페라의 ‘축배의 노래’를 불렀을 정도로 대중적인 오페라다.
황금의 마음을 가진 창녀와 순진한 시골 청년 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오페라의 원작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 아가씨’. 그런데 뒤마 피스가 마게리트(소설 속의 이름)를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구원의 여인으로 묘사한 까닭은 자기 아버지 뒤마 페르가 쓴 소설 ‘삼총사’에서 여주인공 스파이 밀라디를 교활하고 사악하고 부정한 여자로 묘사한데 대한 반박이라는 설이 있다.
비올레타의 얘기는 여러 번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조지 큐커가 감독한 ‘춘희’(Camilleㆍ1937)다. 비올레타로는 의문부호와도 같았던 스웨덴 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그리고 알프레도로는 왕년의 절세 미남 수퍼스타 로버트 테일러가 나왔다.
가르보를 위해 만들었다고 해도 될 만큼 그의 신비하면서도 정열적인 성질에 딱 맞는 영화다. 무지무지하게 로맨틱한데 가르보와 테일러의 콤비가 절묘하다.
현재 LA 다운타운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공연 중인 ‘라 트라비아타’는 LA 오페라 단장인 플라시도 도밍고의 아내 마르타가 2006년에 제작 연출한 것으로 마르타는 프로덕션 디자인도 담당했다. 
시대는 ‘로어링 투웬티즈’요 재즈시대라 불린 미국의 1920년대를 파리로 옮겨왔다. 이때는 금주령시대로 시카고의 악명 높은 갱스터 알 카폰이 밀주를 팔아 떼돈을 벌던 때다. 
비올레타는 당시 사치와 방탕을 일삼던 신여성 플래퍼(한국에서는 후라빠라고 불렀다)로 나오는데 당시 이런 화류계의 여성들의 모습은 영화 ‘파리의 아메리카인’에서 진 켈리와 공연한 시드 채리스와 ‘카바레’에 나온 라이자 미넬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시동 스타일의 헤어스타일과 헐렁한 드레스에 긴 담뱃대를 물고 밀주를 마시면서 ‘인생을 마음껏 즐기자’는 것을 삶의 모토로 삼았던 여자들로 돈 많은 애인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극중 비올레타의 주위의 화류계 여자들이 이런 모양을 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번 오페라는 참신함과 독창성이 안 보이는 기시감 가득한 공연이었다. 서툴고 엉성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나 뛰어난 것은 마차이제의 노래. 약간 까칠까칠한 감촉이 나는 아름다운 음성이다.
그러나 알프레도 역의 멕시칸 테너 아르투로 차콘-크루스는 음성의 폭이 매우 좁고 빈약했는데 연기도 어색했다. 제르몽으로 나온 도밍고(바리톤으로 노래했는데 가슴에 깊이 와닿질 안는다)의 그림자에 주눅이라도 든 듯이 노래와 연기가 모두 허술했다. 28일까지 공연한다.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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