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너무 무던해도 탈인 것이 17일 86세로 LA서 타계한 배우 제임스 가너의 경우라고 하겠다. 가너는 생긴 것도 무던하고 연기도 무던하고 음성마저 무던한 바리톤으로 철두철미하게 무던했던 배우였다.
그가 자기 또래의 배우로 모가 났던 스티브 매퀸과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수퍼스타가 못된 것도 바로 이 무던함 때문이다. 가너가 나온 코미디 ‘헬스’를 감독한 로버트 알트만도 “가너는 연기를 너무 쉽게 해서 인정 못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생전 근면 성실했던 가너는 배우라는 직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배우 같지 않은 배우로 그의 연기는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케리 그랜트를 닮았다.
반세기 배우 생애에 80여편의 영화와 TV 작품에 나온 가너는 웨스턴(‘총의 시간’), 드라마(‘그랑프리’) 및 전쟁 액션영화(‘위대한 탈주’) 등 여러 장르에 나왔지만 특히 코미디에 능했다. 도리스 데이와 ‘무브 오버 달링’ 등 2편 그리고 줄리 앤드루스와 ‘빅터/빅토리아’ 등 역시 2편의 로맨틱 코미디에 나와 누워서 떡먹기 식의 경쾌한 연기를 했는데 그의 유일한 오스카상 후보작으로 샐리 필드와 공연한 ‘머피의 로맨스’도 삼삼한 로맨틱 코미디다.
내가 본 첫 가너의 영화는 2차 대전 때 미 해군 잠수특공대의 액션을 다룬 ‘잠망경을 올려라’였다. 그러나 이보다 내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그의 영화는 시드니 포이티에를 이색적으로 쓴 웨스턴 ‘디아블로의 결투’와 가너가 와이앗 어프로 그리고 제이슨 로바즈가 닥 할러데이로 나온 ‘총의 시간’이다.
가너는 영화보다 TV로 더 유명한 배우였다. 가너가 수퍼스타가 된 것은 영화가 아니라 1957년에 시작된 ABC-TV의 코믹터치의 웨스턴 시리즈 ‘매버릭’에 의해서다. 여기서 가너는 ‘쉽게 쉽게 삽시다’는 식의 떠돌이 도박사건 맨으로 나와 총과 주먹보다 조롱기가 섞인 자기 비하적인 말로 상대를 처리한다.
이로 인해 터프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마지못한 영웅’이 가너의 상표가 되었는데 가너는 이런 자기 풍자적 기질을 코미디 웨스턴 ‘당신 동네 보안관을 지원하라’와 이의 속편격인 ‘당신 동네 총잡이를 지원하라’에서도 잘 써 먹었었다.
가너는 후에 시리즈 ‘매버릭’을 바탕으로 만든 멜 깁슨 주연의 동명영화에서 나이 먹은 보안관으로 나왔다.
빅히트한 ‘매버릭’ 만큼이나 크게 성공하고 가너가 에미상을 받은 TV 시리즈가 1974년에 시작된 ABC-TV의 탐정물 ‘록포드 파일즈’(사진)다. 귀에 익은 가너의 전화녹음 메시지가 나오는 오프닝 크레딧 장면으로 잘 알려진 시리즈에서 가너는 LA 인근 말리부 해변의 트레일러에 사는 빈털터리 사립탐정 짐 록포드로 나온다. 그는 여기서도 총과 주먹 대신 말로 상대를 제압한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체구의 록포드는 폭력을 싫어해 남을 때리기보다 얻어맞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 가너가 할리웃에서 어떤 남자로부터 구타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당시 이 뉴스를 들으면서 ‘아니 록포드가 얻어맞다니’하면서 혀를 찼었는데 아마 가너는 실제로도 평화주의자였던가 보다.
록포드나 매버릭이나 시대만 달랐지 사실은 같은 반영웅으로 가너는 쉽게 친근감이 가는 터프가이였다. 영어대사를 제대로 이해는 못했지만 나도 한국에서 ‘록포드 파일즈’를 AFKN-TV로 보면서 즐겼었다.
가너의 또 다른 유명한 TV 출연은 매리엣 하틀리와 부부로 나온 폴라로이드 카메라 광고다. ‘록포드 파일즈’는 몰라도 이 광고 안 본 사람은 아마도 없을 정도로 유명한 광고였다.
오클라호마 태생인 가너는 4세 때 생모를 잃고 계모에 의해 학대를 받으면서 자랐다. 16세 때 고교를 중퇴하고 선원, 유정 노동자 및 카펫 까는 일 등 온갖 잡일을 하면서 살았다. 가너는 현재도 있는 라나 터너도 다닌 할리웃 고교에 잠시 다닐 때 잡지용 수영복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이 나면서 가너는 군에 징집돼 전선에서 싸우다 두 번이나 부상을 입고 퍼플하트 훈장을 받은 한국전의 영웅이기도 하다.
가너가 처음 연기를 한 것은 헨리 폰다가 나온 무대극 ‘케인호의 반란’으로 말 한마디 없는 단역이었다. 그란데 가너는 무대공포증이 있어 그 후 무대를 기피했다. 가너는 이브 몽탕과 토시로 미후네가 공연한 자동차 경주 영화 ‘그랑프리’를 찍으면서 이 경기에 빠져 그 후 세 번이나 인디 500에 출전해 직접 차를 몰기도 했다.
제임스 가너는 여자는 한 번쯤 사랑하고 싶고(줄리 앤드루스의 말) 남자는 친구로 사귀고 싶은 매력적이요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쩌면 할리웃의 이지고잉 스타일의 마지막 배우일는지도 모른다.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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