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4년 4월 29일 화요일

‘로드 짐’



‘할리웃 외신기자협회를 대표해 귀국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우리 협회가 이번 참사에 대해 도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으니 알려주기 바랍니다.’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회장 테오 킹마.
‘귀국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앞으로 긴 인생과 함께 며칠간의 휴가를 기대하던 그렇게 어린 아이들의 삶이 끝나다니 이 무슨 비극입니까. 다시는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없을 슬픔에 잠긴 모든 가족에게 제 마음을 보냅니다.’ -HFPA 회원 카렌 마틴.
며칠 전 e메일로 보내온 HFPA 동료들의 글을 읽고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답장을 보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한국판 ‘타이태닉’이라 부를 만한 ‘세월’호 비극은 단순히 먼저 달아난 선장이나 일본산 고물 배를 사서 뜯어 고친 뒤 바다에 띄운 선주나 무능하기 구태의연한 정부의 탓만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총체적 잘못이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이번 사건으로 또 한 번 우리나라는 기초가 제대로 안 돼 있고 규칙과 법은 지킨다기 보다 오히려 깨기 위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난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꼭 가건물을 보는 것 같다. 기초 부실로 붕괴한 와우아파트처럼 언제 어디가 무너져 내릴지 몰라 아슬아슬하기가 짝이 없다. 정말이다. 기초 공부부터 다시 하려는 국민운동이라도 일으켜야겠다.
‘세월’호 사건에 관한 뉴스를 볼 때마다 자꾸 눈물만 나오는데 그러면서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것이 승객 구조를 안 하고 자기들 먼저 달아난 선장과 승무원들이다. 이 사람들은 영화 ‘타이태닉’도 안 봤는가. 나도 죽음 앞에 섰을 때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지 장담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선장과 승무원이라면 어느 정도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이들의 도주는 용기와 비겁을 생각나게 한다. 용기와 비겁의 차이는 백지 한 장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세월’호 선장처럼 가라앉는 배의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도망간 비겁자인 항해사 짐은 그 후 속죄하고 더 이상 도망가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죽음을 맞는 용감한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짐은 영국 작가 조셉 콘래드의 모험얘기이자 인간의 심리를 탐구한 소설 ‘로드 짐’(Lord Jim)의 주인공이다. 콘래드의 또 다른 소설로는 ‘어둠의 심장’이 있는데 이 소설은 프랜시스 F. 코폴라가 감독하고 말론 브랜도가 나온 영화 ‘지옥의 묵시록’으로 만들어졌다.
소설 ‘로드 짐’도 1965년 리처드 브룩스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짐으로는 비수의 감촉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한 피터 오툴이 나왔다. 난 이 영화를 대학생 때 을지로에 있던 을지극장에서 봤는데 로맨틱하면서도 장렬한 내용에 진한 감동을 느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로드 짐’은 인간의 순간적 과오와 그로 인한 인간성의 추락 그리고 고통과 자괴와 궁극적 속죄와 재생의 이야기다.
영국의 1등 항해사 짐(사진)은 부상 치료차 자바에 남아 머물다가 건강을 회복, 구닥다리 화물선 S.S. 파트나에 오른다. 메카로 가는 회교신자들을 잔뜩 태운 배가 항해 중 심한 태풍을 만나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짐은 승객들을 버리고 동료 승무원들과 함께 구명정을 타고 탈출한다.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과 똑같다.
그런데 짐이 항구에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파트나호가 멀쩡히 정박해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짐은 재판에 회부돼 승무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여기서부터 그는 뜨내기가 돼 스스로 버러지 같은 삶을 산다.
자신을 증오하는 자아 혐오증자가 된 비겁자 짐이 재생의 기회를 찾게 되는 것은 그가 말레이시아의 외딴 섬 파투산에 정착하면서 이뤄진다. 짐은 이 섬의 주민들을 수탈하는 강도단 두목 제너럴(일라이 월랙)에 맞서 주민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여 승리, 주민들로부터 ‘로드’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제너럴이 짐과의 약속을 어기고 마을을 역습하면서 촌장의 아들이 사망하고 짐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진다. 촌장은 짐에게 마을을 떠나면 살려주겠다고 말하나 다시는 도주하지 않기를 자신에게 다짐한 짐은 총을 든 촌장을 향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걸음을 내디딘다. 오툴이 새파란 눈을 들어 창공을 응시하는 순간 “빵”하는 총소리가 난다.
올스타 캐스트의 이 영화는 브룩스 감독(‘엘마 갠트리’ ‘인 콜드 블러드’)의 영화치곤 감상적이요 질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생 때여서 그랬는지 난 비겁과 용기와 인간 재생의 얘기를 진지하게 보면서 짙은 감동을 받았었다. 난 영화를 본 뒤 영어소설을 사 읽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중단했다. 언젠가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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