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계를 대표하던 최은희씨가 16일 92세로 별세했다. 최씨는 감독이자 남편인 한국영화계의 거목 신상옥과 함께 196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큰 별이었다. 최씨는 생애 총 130여 편의 영화에 나왔는데 여러 편이 신감독의 작품. ‘꿈’ ‘춘희’ ‘로맨스 빠빠’ ‘지옥화’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및 ‘빨간 마후라’ 등이 그 대표작들이다.
많은 영화들 중에서 최은희 하면 대뜸 생각나는 것이 ‘성춘향’(1961^사진)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칙을 무시하고 이 영화를 명보극장에서 봤는데 극장은 초만원을 이뤘었다. 총천연색 화면에 펼쳐지는 춘향과 이(몽령)도령의 계급을 무시한 파란만장한 사랑이 재미 만점이었는데 당시 30대의 최씨가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긴 했지만 춘향이로선 너무 늙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도령 역의 김진규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 영화에서 춘향과 도령보다 더 화면을 압도했던 배우는 변사또역의 이예춘이다. 호색한인 사또가 자기 집 마당에 관기들을 일렬횡대로 세워놓고 수청 들 여자를 고르면서 하나도 마땅한 것이 없다고 인상을 쓰며 상소리를 섞어 투덜대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와 함께 역시 나이는 먹었지만 방자역의 허장강과 향단역의 도금봉의 밀고 당기는 애정의 줄다리기도 볼만했다.
‘성춘향’하면 또 하나 못 잊을 사건이 1960년대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던 김지미가 나온 ‘춘향전’이다. 이 영화는 당시 김씨의 남편 홍성기가 감독, ‘춘향전’과 동시에 국제극장에서 개봉했는데 흥행서 참패했다. 30대였던 최씨에 비해 20대였던 김씨가 춘향역에는 더 어울렸지만 흥행 실패의 큰 까닭 중 하나는 도령역에 신인인 신귀식을 쓴 것. 그리고 방자역의 김동원과 향단역의 양미희도 허장강과 도금봉 콤비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1961년은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최고의 해로 둘은 이 해 심훈의 계몽소설이 원작인 ‘상록수’와 ‘연산군’ 및 주요섭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원제 ‘사랑 손님과 어머니’)도 함께 만들었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주요섭의 또 다른 단편 ‘아네모네의 마담’과 함께 내가 고교시절 애독한 글이다.
내용은 어린 딸(전영선)을 둔 미망인인 어머니(최은희)가 사랑방에 하숙을 하는 남자(김진규)에게 애정을 느끼지만 재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못하고 생이별을 해야 하는 과거 한국의 모든 미망인들의 한숨과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손 한번 제대로 못 잡아보고 헤어져야하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안타까워 속을 태웠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어머니가 사랑에 타들어가는 속을 진화시키려고 피아노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치는 모습. 소설도 그렇지만 신감독은 감상성을 잘 조절해가며 은근하고 애틋한 감정의 여운을 남기는 연출솜씨를 보여주었다.
총천연색인 ‘연산군’에서 폭군 연산군으로는 후에 ‘빨간 마후라’에서도 최씨와 공연한 신영균(90)이 나와 열연을 했는데 역시 명보극장에서 봤다. 표가 완전 매진이었고 영어자막이 없었는데도 외국인까지 관람하는 대성황을 이뤘었다.
단아한 이미지의 최씨로선 파격적인 역인 양공주로 나온 영화가 ‘지옥화’(1958)다. 한국전 후 기지촌 주변의 양공주들과 이들의 남자들인 범법자들을 둘러싼 애증과 배신과 폭력 그리고 형제간 갈등과 비극적 죽음을 그린 뛰어난 작품이다. 필름 느와르이자 멜로드라마로 네오리얼리즘 분위기마저 띠었는데 1950년대 영화로선 가히 충격적인 작품이다.
기지촌 주변에 살면서 패거리들을 이끌고 미군부대 군수품을 터는 터프가이 영식(김학)과 그의 여자로 팔등신 미녀인 소냐(최은희) 그리고 시골서 상경한 영식의 동생 동식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양공주들과 범법자들의 삶과 한탕을 사실적이요 박력 있게 그렸다. 대담한 것은 과감히 노출된 여인들의 육체와 선정적인 섹스신. 안개가 자욱하니 핀 갯벌에서 영식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주하는 소냐를 쫓아가 칼로 찔러 죽이는 마지막 장면은 치정살인의 오페라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신감독과 최은희의 최고걸작은 이들 영화보다 1978년 둘이 몇 달 차이로 영화광 김정일의 지시로 홍콩서 납북된 사건일 것이다. 둘은 북한에서 7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최씨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서 주연상을 탔다. 두 사람은 1986년 영화를 만든다는 핑계로 비엔나에 갔다가 주 비엔나 주재 미대사관을 통해 망명, 그 후 한동안 LA에서 살았다.
이 때 어느 날 내게 신감독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당시 서울의 일간스포츠에 주 1회 쓰던 영화면에 자기가 줄 기사가 있으니 지면을 비워 놓으라는 지시적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감감 무소식. 둘의 납북사건은 기록영화 ‘연인들과 폭군’(The Lovers and the Despot)에서 흥미진진하게 다뤄졌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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