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생 때 자주 들른 음악다방들은 미 팝송뿐 아니라 샹송도 제법 많이 틀어댔었다. 나는 이 때 프랑스가수들이 비음을 섞어가며 체념이라도 한 듯이 중얼중얼 대는 노래들을 들으며 괜스레 심각해지곤 했었다. 안개가 낀 감상적인 콧소리로 노래해 듣는 사람의 가슴을 사로잡는 샤를르 아즈나부르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것도 이 때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그가 “이자벨 이자벨 이자벨”하면서 떠나간 님 이자벨을 몸살 나게 찾던 노래 ‘이자벨’이다.
아즈나부르가 10월 1일 남불 프로방스의 자택에서 94세로 타계했다. 그의 사망에 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샤를르 아즈나부르는 심오한 프랑스인이자 그의 아르메니안 뿌리에 깊이 연결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세 세대에 걸쳐 기쁨과 슬픔을 동반한 사람이다. 그의 걸작들, 그의 음색, 그의 독특한 소리의 광채는 그와 함께 길이 살아남을 것이다”고 조의를 표했다.
‘세기의 엔터테이너’로 불린 아즈나부르는 에디트 피아프, 질베르 베코, 쥘리엣 그레코 및 모리스 슈발리에 등과 함께 활약한 샹송의 마지막 전설이자 역사였다. 가수요 작곡가이자 배우이며 인도주의자였던 그는 아르메니아계 부모 밑에서 파리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연예계에 투신했는데 처음에는 파리의 술집 물랭 루지에서 피아프가 노래하기 전 무대분위기를 달구는 가수로 일했다. 그는 20대 초 피아프와 함께 미 순회공연을 마친 뒤 솔로로 전향했는데 피아프는 아즈나부르의 성공을 뒤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준 은인이었다.
그러나 생애 8개국어로 총 1,200여곡의 노래를 불러 모두 1억8,000만장의 음반을 판 아즈나부르는 처음에 음성코치로부터 카리스마도 없고 노래도 부를 줄 모른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키가 5피트 3인치에 체중이110파운드 밖에 안 되는 것도 핸디캡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평가를 극복하고 목이 쉬도록 노래했는데 그의 노래들은 대부분의 샹송들처럼 주로 사랑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는 이 밖에도 결혼과 시대를 앞서간 동성애에 관해서도 노래했다.
나는 20년 전 아즈나부르가 LA의 윌셔와 라 시에네가 인근의 윌셔극장(현재 사반극장)에서 공연했을 때 참관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는 작달막했지만 그윽한 분위에 카리스마가 있었는데 애매하게 매혹적인 음성으로 자기 히트곡들을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황홀무아지경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의 히트곡들로는 ‘라 보엠’ ‘라 마마’ ‘나를 포옹해주오’ ‘아베 마리아’ ‘눈이 내리네’ ‘그녀’ ‘파르스 크’ ‘함께’ 및 ‘기억해야 하리’ 등이 있다.
1950년대 초반 그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프랑스의 한 신문은 “프랑스는 아즈나부르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찬양했는데 아즈나부르는 이런 명성과 콘서트를 열 때마다 표가 매진되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매우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2주 전까지 도쿄에서 공연할 정도로 노래에 살고 노래에 죽은 사람으로 생전 “노래를 포기한다는 것은 내겐 죽음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아즈나부르는 영화배우로서도 유명하다. 스크린에 나서면 화면이 꽉 차는 스타 파워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10명의 작은 인디언들’과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탄 ‘양철 북’ 등 총 60여편의 영화에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그를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프랑솨 트뤼포 감독의 느와르 ‘피아노 연주자를 쏴라’(Shoot the Piano Player^1960^사진)이다.
트뤼포가 할리웃 갱스터영화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작품으로 범죄스릴러이자 희비극이다. 실험정신이 가득한 인간미 넘치는 로맨틱한 영화로 흑백촬영과 음악도 아름답다. 파리의 싸구려 카페의 피아니스트 샬리(아즈나부르)의 영광과 몰락과 여인과 사랑에 관한 얘기로 입을 꽉 다문 무표정한 얼굴의 아즈나부르의 연기가 볼만하다.
프랑스 서민들의 노래인 샹송은 길바닥 노래다. 처음 가수들은 길가에서 자기가 쓴 노래들을 부르며 행인들에게 악보를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 가슴이 터져라 노래하던 ‘작은 참새’ 피아프도 길바닥 가수출신이다.
샹송은 곡조나 가사가 다 격렬히 감정을 부추기는데 멜로드라마 같은 거리 인생의 얘기가 우수와 감상과 동경에 찬 멜로디와 무드 속에서 흘러나와 멜랑콜리하기 짝이 없다. 초창기 가수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인 사랑의 아픔과 이별의 후유증 그리고 욕망과 유혹과 회한 등을 노래해 그 사실감으로 인해 노래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느낌을 공유하게 된다.
아즈나부르는 인터뷰에서 “나는 술과 에이즈와 교통사고, 이혼과 전쟁의 아이들과 귀 먹고 말 못하는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에 관해 노래 부른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노래가 철학이었다. 아듀 아즈나부르!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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