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8년 5월 18일 금요일

피양냉면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이북사람들이다. 어머니는 북한의 국제공항이 있는 평양시 순안구역의 순안 태생이고 아버지는 함경북도 길주가 고향이다. 내 몸 안에 이렇게 금단의 땅 이북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인지 난 분단조국의 남북이 만나는 소식을 들을 때면 눈물을 흘리곤 한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다정히 서로의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찬에서 평양의 유명 냉면집 옥류관에서 면을 가져와 만든 평양냉면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피안도(평안도)사투리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생전에 “피양냉면이 남쪽의 냉면보다 훨씬 더 맛이 좋디”라며 이북의 맛을 그리워했었다.   
나도 이 피양냉면을 옥류관에서 먹어본 적이 있다. 1991년 9월 재미경제인연합회의 북한방문단을 따라 열흘간 북한에 머물렀을 때였다. 그런데 남한과 LA의 온갖 양념을 친 냉면 맛에 익숙해서였던지 난 밍밍하고 심심한 것이 특징인 피양냉면을 먹으면서 입안의 모든 감관을 사용해 열심히 맛을 찾았지만 실패하고 말았었다. 공연히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회원들은 나를 보면 “너희 나라의 남북정상이 만난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곤 한다. 난 좋은 일이고 그렇게 서로 자꾸 만나야한다“면서도 ”그러나 남북이 그렇게 쉽사리 통일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곤 한다.
이를 듣던 독일 동료 한스는 “나도 내 생전에 동독과 서독이 통일될 줄은 몰랐으나 된 것처럼 너의 나라도 어느 날 갑자기 통일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날 격려했다. 그러자 또 다른 독일 동료 카렌이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남한이 북한에 엄청나게 돈을 쏟아 부어야할 것”이라고 한 마디 보탰다.   
내가 북한에 갔을 때 우리를 안내한 지도원 동무를 비롯해 북녘사람들에게 자주 물었던 것이 “조국통일이 언제 되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 그들은 조국통일을 후렴처럼 외우고들 있었는데 질문에 대한 답은 한결같이 “조국광복 50년째인 1995년 까지는 통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통일의 해’로부터 23년이 지났는데도 우린 지금까지 분단의 아픔 속에 살고 있다.
방북 후 쓴 기사를 다시 읽으니 북한에서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방북단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산가족이었다. 나도 6.25 때 아버지가 인민군에 의해 납치된 이산가족이다. 방문단 중 일부는 북의 고향에 있는 일가친척을 만나는 기쁨에 들떠 있었는데 난 아버지의 생사여부라도 알려고 북한당국에 내 사정을 적어 제출했으나 ‘알 수 없다’는 통보만 받았었다. 가슴에 묵중한 통증을 느꼈었다.
북한 체류 중 평양의 고려호텔에 머물면서 만수대예술단과 평양교예단(서커스)의 공연도 보고 조선예술영화촬영소도 둘러보고 이어 명사십리와 금강산과 해금강 구경에 이어 외자가 투입된 합영회사도 방문했었다. 거리에서 만나 얘기를 나눈 동포들이 참 소박하고 순진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비록 남한사람들 보다는 못 살지만 모두 자존심이 세다는 것도 깨달았었다.
영화기사를 쓰는 나로서 인상이 깊었던 곳이 1947년에 세운 조선예술영화촬영소. LA의 유니버설이나 폭스의 스튜디오와 같은 곳으로 세트가 매우 정교하고 실물 크기였다. 당시는 영화광 김정일이 통치하던 때여서 안내원은 그가 “영화를 통해 인민을 교양 시킨다”며 김정일을 찬양했었다. 내가 안내원에게 북한에서 활동하다 탈출한 신상옥과 최은희에 관해 물었더니 그는 “신필름 예술영화촬영소까지 세워줬는데 배은망덕한 것들이지. 우리가 언젠가 단죄할 것”이라며 화를 벌컥 내던 모습에 겁마저 났던 기억이 난다.
북한 방문 중 가장 깊은 감동을 받은 곳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금강산이었다. 김정일이 “참으로 금강산은 조선의 기상입니다”라고 찬양한 금강산은 장엄하고 섬세하고 유려한 산 중의 산이었다. 아버지의 엄숙한 기상과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을 겸비한 절대였다. 한 가지 유감은 거대한 절편과도 같은 바위마다 김주석 부자를 찬양한 글을 파 빨간 페인트로 칠한 것. 북에선 찾아보기 힘든 공해였다.
해금강에 갔다가 6.25 때 월북해 인민배우가 된 한국영화 초창기의 여류스타 문예봉(무성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의 딸 림종숙씨(당시 42세)를 만났다.(사진) 림씨는 그 때 평양중앙방송위 대외방송국 편집국기자여서 우린 깡통맥주로 건배하며 “조국통일을 위해 언론인들이 힘쓰자”고 다짐했었다. 북한 땅을 떠나는 날 ‘언제 다시 오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었다. 중학교 때 우리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신 안병원 선생님이 작곡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몇 번쯤 더 불러야 통일이 올까.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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