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6개월마다 남자를 갈아 치우는 스페인 세빌의 담배공장 여공 카르멘이 단순한 요부가 아니라 여성 자유와 해방의 주창자요 자기 소신을 위해선 하늘과 죽음과도 맞설 용의가 있는 대담무쌍한 여자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은 지난 14일 LA 다운타운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오페라 ‘카르멘’(Carmen^사진)을 보고나서였다.
주인공이 담배공장에서 일해 오페라 처음에 “담배는 공기를 향기롭게 해 준다”라는 여공들의 끽연찬양 합창이 있는데 요즘처럼 모든 것이 ‘폴리티칼리 코렉트’한 세상에선 야단맞을 소리다.
뭇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인 카르멘은 자신의 성적 매력이 지닌 힘을 이용해 여자를 우습게 알던 때에 성의 불균형을 깨어버린 여자요 천대받는 집시라는 신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 의기양양한 여자다. 이 정열덩어리 여인이 자신의 사랑과 진실을 위해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운명을 수용하는 것을 보자니 경외심마저 인다. 믿음을 위해 자기 생명마저 바치는 순교자와도 같은 여자다.
비제의 ‘카르멘’은 시종일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음악과 극적인 내용 때문에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에도 팬들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LA오페라는 1회 공연을 추가했다.
이번 공연은 보고 즐기기엔 큰 손색은 없지만 상당히 평범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돋보인 것이 카르멘 역을 맡은 푸에르토 리코 태생의 소프라노 아나 마리아 마르티네스. 작달만한 체구나 불덩어리였는데 노래는 물론이요 춤과 제스처를 비롯한 동작이 모두 당당하고 정열적이었다. 음성은 청아하면서도 약간 칙칙했는데 마치 밑에서 피어오르는 물 먼지가 건드리는 맑은 냇물과도 같은 음색이다.
그런데 카르멘을 사랑해 함께 살자고 애걸복걸하다가 퇴짜를 맞자 살인을 저지르는 단순한 마음의 호세 역의 테너 리카르도 마시는 덩지만 컸지 카리스마도 노래도 모자랐다. 그리고 마르티네스와의 화학작용도 미적지근해 이 정열적이요 비극적인 오페라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돈 호세의 라이벌로 투우사인 에스카밀로 역의 베이스 알렉산더 비노그라도프의 노래는 시원했으나 전반적으로 가수들이 별 특색이 없고 노래도 그만 그만했다.
눈요기 거리는 남녀댄서들의 플라멩코. 빨간 드레스에 빨간 부채를 든 여인들과 검은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빨간 타이를 맨 남자들이 어울려 구두 발로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맞추며 절제된 동작으로 추는 플라멩코가 화사하다. 합창도 좋았고 LA오페라 음악감독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LA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속도 있고 스무스 했다.
‘카르멘’은 여러 편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프란체스코 로시는 플라시도 도밍고(현 LA오페라 총감독)와 줄리아 미제네스-존슨이 주연하는 오페라 영화 ‘카르멘’(1984)을 만들었고 칼로스 사우라는 ‘카르멘’(1983)을 댄스극으로 연출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오토 프레민저가 제작^감독하고 흑인 배우들만 나오는 ‘카르멘 존스’(Carmen Jones^1954)다. 2차대전 때 군인 조(해리 벨라폰테)와 낙하산 제조공장 여공 카르멘 존스(긴 다리 미녀 도로시 댄드리지가 아스팔트도 녹일 화씨 100도짜리 검은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권투 챔피언 허스키 밀러(조 애담스)간의 삼각관계를 그렸는데 주옥같은 노래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댄드리지의 노래는 마릴린 혼이 벨라폰테의 노래는 르번 허처슨이 그리고 애담스의 노래는 마빈 헤이스가 각기 더빙했는데 노래 가사는 뮤지컬 ‘오클라호마!’ ‘카루셀’ ‘남태평양’ ‘왕과 나’ 및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가사를 쓴 오스카 해머스틴 II가 썼다.
카르멘이 비록 여권 신장의 선창자이긴 하지만 역시 이 격정적인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유혹녀인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명칭이 더 잘 어울린다. ‘팜므 파탈’은 자신의 섹스 어필을 동원해 어리숙한 남자를 유혹해 이용한 뒤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요부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범죄영화 장르인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들로 ‘카르멘’의 주인공과 내용은 이 장르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담을 유혹해 인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이브와 천하장사 삼손을 파멸시킨 딜라일라가 원로급 ‘팜므 파탈’. 영화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1944)에서 봉 같은 보험외판원 프레드 맥머리를 유혹해 보험에 든 자기 남편을 살해시키는 바바라 스탠윅과 ‘살인자들’(The Killlers^1946)에서 역시 어리숙한 전직 권투선수 버트 랭카스터를 유혹해 파멸시키는 에이바 가드너도 카르멘과 어깨를 나란히 할 탑 클래스 ‘팜므 파탈’들이다.
‘카르멘’은 23일, 28일 및 10월 1일 세 차례 공연이 남았다. 28일 공연(하오 7시 30분)은 LA다운타운 엑스포지션 공원과 샌타모니카 피어에서 야외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무료 관람할 수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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