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조셉 카예아는 모두 마리오 란자가 나온 뮤지컬 ‘위대한 카루소’(The Great Caruso^1951)를 보고 오페라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란자는 이 두 가수의 정신적 사부인 셈이다.
‘위대한 카루소’는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삶을 허구화 한 것으로 란자가 달리는 기차의 엔진 소리와도 같은 추진력과 막강한 음성으로 오페라 아리아 ‘여자의 마음’과 ‘별은 빛나건만’ 및 ‘남 몰래 흘리는 눈물’ 들을 열창한다. 고등학생 때 그의 음성에 감탄사를 내지르며 재미있게 봤다.
꿀 빛 음성을 지닌 리릭 테너 질리와 파바로티의 후계자요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가수 중 하나라는 평을 받고 있는 지중해의 섬나라 말타 태생의 조셉 카예아(39^사진)의 노래를들으려고 지난 주 산타모니카의 브로드 스테이지엘 찾아갔다. 처음으로 그의 노래도 들어보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큰 까닭은 이 공연에 ‘마리오 란자에의 헌사’라는 부제가 달렸기 때문이었다. 카예아를 통해 란자를 회상하려고 한 것이다. 객석에는 란자의 가족이 참석했다.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거구의 카예아의 음성은 곱고 맑고 결도 가지런했다. 오페라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과 ‘꽃의 노래’ 등과 함께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토스티의 ‘이데알레’와 레온카발로의 ‘마티나타’ 등을 감정의 골을 이뤄가면서 강렬하게 노래했다.
그가 부른 마지막 노래는 란자의 간판곡인 ‘비 마이 러브’. 이 노래는 란자가 1950년대 할리웃의 빅 스타로 군림했을 때 출연한 ‘뉴 올리언스의 토스트’에서 부른 것이다. 란자가 아름답고 우람차면서도 감칠 맛나게 노래해 삽시간에 200만장의 레코드가 팔려나간 곡으로 지금까지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다.
카예아의 음성은 아름답고 청아했지만 란자의 육감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의 폭과 높낮이에는 이르질 못했다. 집에 돌아와 카예아의 노래와 비교해보려고 스테파노가 부르는 ‘별은 빛나건만’을 들었다. 스테파노의 애간장을 끊는 처절히 아름다운 음성은 란자도 카예아도 따르질 못할 것이다.
내가 란자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생 때 서울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그가 주연한 영화 ‘세레나데’를 단체로 관람했을 때였다. 포도원 일꾼이 오페라 가수로 성공하면서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다.
란자의 연기는 별 것 아니었지만 야생마의 울음과도 같은 그의 노래 소리는 체한 가슴을 뚫어놓을 만큼 시원했다. ‘비 마이 러브’를 들은 것은 이보다 후인 고등학교 2학년 때. 당시 음악선생님이 이 노래가 담긴 음반을 가져와 들려주었는데 첫 소절부터 벼락 치듯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란자는 오페라 가수로서 보다 팝가수로 더 유명하다. 오페라 아리아도 잘 부르긴 했지만 이보다는 ‘비 마이 러브’를 비롯해 ‘그라나다’와 ‘세레나데’ ‘비커즈 유어 마인’ 및 ‘위드 어 송 인 마이하트’ 같은 노래들로 더 친숙하다.
술꾼들이 사랑하는 권주가 ‘드링킹 송’도 란자의 인기 곡 중 하나. “드링크, 드링크, 드링크”로 시작되는 노래는 시그먼드 롬버그의 오페레타를 영화로 만든 ‘황태자의 첫 사랑’(The Student Prince^ 1954)에 나온다.
하이델베르크를 무대로 대학서 공부하는 황태자(에드먼드 퍼덤)와 맥주집 웨이트리스(앤 블라이드)의 못 이룰 사랑을 그린 얘기로 란자는 목소리만 빌려줬다. 대학생 때 이 오페레타의 원작인 ‘알트 하이델베르크’를 가르쳐 주시던 김정진 교수님이 “독일 대학생들은 슈투디렌(공부), 리벤(사랑) 운트 트링켄(음주) 순서대로 대학시절을 보내는데 여러분들은 이를 거꾸로 보내면 안 됩니다”하고 충고해 주셨다. 그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후회가 막심하다.
카루소가 사망한 해인 1921년 필라델피아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란자는 고교를 중퇴하고 할아버지의 식품도매상에서 막 일을 하다가 명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오디션에 참가, 장학금을 받으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란자는 1947년 할리웃 보울에서 노래를 부르다 MGM사장 루이 B. 메이어의 비서실장에 의해 발탁돼 계약을 맺으면서 출세 길이 열린다.
박진감 있는 란자의 음성은 비록 정통적인 훈련을 못 받아 세련되지 못한 감은 있으나 기교를 부리지 않고 몸속에서 나오는 대로 노래해 마치 자연 속의 폭포수 소리와도 같이 맑고 힘차다. 출생부터 서민인 란자의 노래는 서민적이어서 친근감이 간다. 그래서 더 대중의 큰 인기를 모았던 같다.
란자의 몰락은 그의 인기만큼이나 급속했는데 걷잡을 수 없는 성격과 술과 약물 그리고 과체중으로 인해 1959년 38세로 요절했다. 전문가들은 그가 제대로 오페라에만 전념했더라면 제2의 카루소가 되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들 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