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3월 13일 월요일

‘지상 최대의 쇼’




내가 ‘십계’를 만든 세실 B. 드밀이 감독한 서커스영화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1952^사진)를 본 것은 중학생 때 서울 용산에 있던 성남극장에서였다. 찰턴 헤스턴, 코넬 와일드, 제임스 스튜어트, 베티 허튼. 글로리아 그래암 및 도로시 라모어 등 초호화 캐스트에 코끼리, 사자 그리고 호랑이 등이 나오는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 영화가 ‘하이 눈’과 ‘아일랜드의 연풍’ 및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영화들을 제치고 오스카 작품상을 탄 것을 놓고 논란이 되긴 했지만 꼬마였던 나는 총천연색 만화경과도 같은 꿈의 세계에 빠져 넋을 잃고 구경 했었다. 이 영화는 미 최대의 서커스인 링글링 브라더스와 바넘 & 베일리의 쇼와 단원들 간의 애증과 경쟁의식을 다룬 것으로 진짜 서커스 단원들이 대거 출연했다.
그런데 이 ‘지상 최대의 쇼’를 지난 146년 간 제공해온 링글링 서커스가 오는 5월로 해체된다. 재정난 탓인데 특히 동물 애호가들의 압력에 굴복, 작년 5월부터 코끼리를 쇼에서 퇴출시킨 뒤로 관객이 부쩍 감소했다고 한다. 그런데 코끼리들은 바넘이 지난 1882년 ‘점보’라 명명한 아시안 코끼리를 관객들에게 소개시킨 이래 이 서커스의 상징이 돼왔다. 이와 함께 인터넷 시대에 변화하는 대중의 취향도 해체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빅 탑이라 불리는 서커스는 한국에서는 곡마단이라고 했다. 곡마단은 아이들에겐 꿈과 환상과 마법의 세계여서 나도 어렸을 때 동네에 곡마단이 천막을 치면 어머니에게 졸라 돈을 타 구경을 하곤 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천막 안에 깐 거적 위에 앉아 접시돌리기, 외발 자전거 타기, 줄타기 그리고 마술과 광대의 익살을 보면서 황홀무아지경에 빠지곤 했다.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살빛 싸구려 스타킹을 신고 공중을 새처럼 훨훨 나는 그네 타는 소녀의 넓적다리였다. 모든 것이 초라한 곡마단의 공기 속에서 그네 타는 소녀의 표정 없는 얼굴에 발랐을 염가 분 냄새를 상상으로 들여 마시며 미열이 나는 흥분을 느꼈었다.
그네 타는 여자를 보고 반한 것은 나만이 아니다. 빔 벤더스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분단된 베를린에 대한 찬가 ‘욕망의 날개’(Wings of Desire^1997)에 나오는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도 곧 해체될 서커스의 그네 타는 여자 마리옹(솔베이지 동마르탱)을 보고 매료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다미엘은 등에 닭털 날개를 단 곱슬머리 긴 금발에 날씬한 허리 그리고 곡선 진 몸매를 한 마리옹이 살빛 스타킹을 신은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내뻗고 그네를 타는 모습을 보고 반해 지상에서 그녀와 같이 있기 위해 불사의 천사 노릇을 포기하고 인간이 된다.
트라피즈 아티스트라 불리는 그네 타는 곡예사 마리옹이 천사와도 같다면 또 다른 서커스영화 ‘트라피즈’(Trapeze^1956)의 그네 타는 여자로 나오는 이탈리안 육체파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육체의 악마다. 육감적인 롤로브리지다를 사이에 놓고 두 그네 타는 남자 버트 랭카스터와 토니 커티스가 치열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육신의 아름다움과 건강함을 과시하는 세 남녀가 모두 탄탄한 육체에 꽉 끼는 옷을 입어 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영화도 성남극장에서 봤다.
유랑민들의 집단인 곡마단의 생태를 연민과 애정의 마음으로 묘사한 소설이 한수산의 ‘부초’다. 제목처럼 떠다니는 풀과도 같은 ‘일월 곡예단’ 단원들의 간난한 삶과 동지애와 사랑을 소박하고 솔직하면서도 재미있게 묘해 단숨에 읽어 내려갔었다.
작가는 산업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의 삶을 동병상련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어 작품에 애조가 드리워져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하명은 외줄타기 곡예사 지혜를 사랑하나 곡마단에서는 이성 간의 사랑이 금기로 돼 있어 둘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다.    
내가 어렸을 때 기억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곡마단하면 무섭고 섬뜩한 생각부터 들었었다. 곡마단의 어른들이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밥 짓고 빨래하고 물 길어 나르게 하면서 학대하고 무자비하게 곡예훈련을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내게 곡마단은 비극의 공연장이요 유형자의 유배지처럼 느껴졌었다.
얼마 전에 현재 뉴욕에서 찍고 있는 폭스사의 서커스영화 ‘최대의 쇼맨’(The Greatest Showman)의 세트 구경을 갔었다. 바넘 & 베일리 서커스의 창설자인 P.T. 바넘의 삶을 다룬 뮤지컬로 바넘으로 휴 잭맨이 나온다. 음악과 노래는 ‘라 라 랜드’로 오스카상을 탄 벤지 파섹과 저스틴 폴이 지었다. 이 영화는 ‘물랭 루지’ ‘시카고’ 및 ‘레 미제라블’ 등과 같은 호화 뮤지컬로 오는 크리스마스에 개봉된다.
링글링 브라더스와 바넘 & 베일리 서커스의 해체는 모든 것이 컴퓨터 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조치라고 보겠다. 옛 것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섭섭하긴 하지만 서커스가 지상에서 소멸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서커스 바가스, 빅 애플 서커스 그리고 실물 대신 실물 크기의 꼭두각시 코끼리를 쓰는 서커스 1903 및 입장료가 비싼 시르크 뒤 솔레유 등이 호객하고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