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2월 23일 화요일

'육체의 문’과 ‘춘부전’




자기 몸속에서 생명을 잉태해서 그럴까. 여자는 남자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혼자서 우리 두 남매를 키운 나의 어머니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전후 도쿄의 창녀 마야와 중일전쟁 때 만주의 이름 없는 한국인 위안부도 생명력이 억척스럽게 강한 여자들이다.
마야와 한국인 위안부는 각기 일본의 스즈키 세이준 감독(92)의 ‘육체의 문’(Gate of Flesh·1964)과 ‘춘부전’(Story of a Prostitute·1965)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나는 며칠 전 이 두 영화를 웨스트LA의 해머뮤지엄 내 빌리 와일더극장에서 보면서 다시 한 번 고난 속 여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혀를 내 휘둘렀다.
마야는 미군에게 겁탈을 당한 뒤 전후 난장판이 된 도쿄로 올라와 창녀가 된다. 배가 고파 거리에서 삶은 고구마를 훔쳤다가 야쿠자에게 붙잡힌 것이 계기가 된다. 마야를 한동아리 안으로 받아주는 4명의 창녀들은 폭탄을 맞아 뼈만 남은 건물을 주거지로 몸을 파는데 자매들처럼 똘똘 뭉친 이들의 규율은 ‘공짜 섹스는 없다!’이다.
마야가 활동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개가 개를 잡아먹는’ 살벌한 전쟁터로 G.I.와 M.P.와 창녀와 야쿠자가 삶은 고구마장수와 호떡장수가 요란하게 호객행위를 하는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내가 꼬마 때 경험한 부산 피난시절이 떠올랐는데 이런 모습은 한국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더러 볼 수 있다.
우리가 양공주라 부른 마야(노가와 유미코)와 동료 창녀들의 삶은 미군의 총격에 부상당한 전직 군인 이부키 신타로(조 시시도)가 마야네 건물로 들어와 이들의 식객이 되면서 큰 물결이 친다. 마야는 이부키를 보르네오에서 전사한 자기 오빠의 대체물로 삼고 그를 연모하는데 마야뿐 아니라 동료 창녀들도 뻔뻔하나 신체건강하고 사나이다운 이부키를 탐내면서 이들 사이에 욕정의 불길이 타오른다.
스즈키 감독은 섹스와 음식이 존재의 이유인 이부키의 미군 증오를 통해 동물적인 생존본능과 함께 노골적인 반미감정을 토해내고 있는데 이런 감정의 또 다른 표시로 공중에서 펄럭이는 성조기를 클로스업해 보여준다. 이와 함께 스즈키는 갑자기 이식된 민주주의도 ‘개뿔 같은 소리’라면서 야유한다.    
마야와 다른 창녀들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 파인애플을 사 이부키에게 바치는데 이야말로 창녀의 순정이다. 나는 이런 깡통 파인애플뿐 아니라 영화에서 “이 맛이야 말로 최고”라고 찬미한 부대찌개도 먹어봐 영화가 남의 소리 같질 않았다. 그리고 이부키가 같은 패들과 미군부대에서 페니실린과 럭키 스트라익을 훔쳐 달아나는 모습과 거리의 암시장 등도 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의 지스러기들이다.
이부키는 마야의 순정에 가슴이 녹아 둘이 함께 도쿄를 떠나기로 약속하나 비극으로 끝난다. 혼자 남은 마야가 “나는 여기 남겠다”며 그런 비극에 결코 굴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매우 야하면서도 나신을 보듯 적나라하게 노골적인 생존기로 나는 이 영화로 부산 피난살이를 한 번 더 한 셈이다.
전쟁에 나갔던 스즈키 감독은 ‘춘부전’(사진)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아울러 전쟁의 광기를 우스갯거리로 삼고 있다. 매우 사실적인 이 영화는 또 다른 일본의 반전영화인 ‘인간의 조건’을 연상케 한다. 만주전선에 투입된 일본군 부대의 포악한 지휘관 나리타소위(다마가와 이사오)의 당번병인 도도한 미카미 신기치(카와지 다미오)와 나리타의 총애를 받는 창녀로 미카미를 사랑하는 하루미(노가와 유미코)는 각기 ‘인간의 조건’의 가지와 미치코를 생각나게 한다. 미카미가 툭하면 나리타로부터 귀싸대기를 얻어맞는 것도 가지를 연상시킨다.
하루미 등 서너 명의 일본 창녀들과 한 명의 한국인 위안부는 줄줄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수백명의 일본군인들을 상대한다. 나이 먹은 한국인 위안부는 영화에서 두 번 한복을 입는데 스즈키 감독은 이 여자를 매우 동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 여자를 찾아오는 일본 군인이 불순분자로 찍혀 장교에서 하사관으로 강등된 아키야마(오자와 쇼이치)다. 아키야마는 육체적 욕망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의 방에서 조용히 ‘철학단상’을 읽기 위해 찾아온다. 책을 읽은 뒤 방을 떠나면서 아키야마는 여자에게 화대를 지불하는데 이를 세던 여자가 “일본 여자와 같은 화대를 주네. 고맙기도 하지”라며 감사한다. 일본 창녀와 한국인 위안부는 화대에도 차별이 있었던 것 같다.    
미카미와 하루미는 사로 사랑하게 되나 동반자살의 비극으로 끝난다. 이를 본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한국인 위안부가 “죽는 것은 비겁해. 사는 것이 더 힘들어”라면서 멀리 사라진다. 마야와 백의의 한국 여인이야말로 생존의 불기둥과도 같은 여인들이다. 스즈키 세이준 시리즈는 오는 3월13일까지 계속된다. (310)206-8013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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