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위협과 범죄와 오염과 시설미비 등으로 열리기 전부터 말도 많았던 리우 올림픽이 드디어 오늘 개막됐다. 근대 올림픽의 시초인 지난 1896년에 열린 아테네 경기서 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전 올림픽은 필름에 기록됐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 베를린 경기를 담은 ‘올림피아’(Olympia·1938)와 도쿄 경기를 기록한 ‘도쿄 올림피아드’(Tokyo Olympiad·1965)다.
배우 출신의 미녀감독으로 생전 ‘히틀러의 여자’라 불린 레니 리펜슈탈이 찍은 장장 220분짜리 ‘올림피아’는 물 흐르듯 하는 카메라가 움직이는 인간의 영육을 함께 불사르는 경쟁과 이상형으로서의 선수들 그리고 경기장 밖에서의 환희와 좌절을 담은 불후의 걸작이다.
손기정이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뛴 마라톤에서 우승한 베를린 올림픽은 히틀러와 그의 선전상 괴벨스가 나치스를 선전하고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열었고 영화도 이런 뜻에서 만들어 ‘악을 선전한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의도를 떠나서 본다면 이 영화는 고대 그리스의 이상주의를 예찬한 명화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보다 작은 것들에 관심을 보인 ‘도쿄 올림피아드’를 더 좋아한다. 이 흑백영화는 켄지 미조구치, 야스지로 오주, 아키라 쿠로사와 등과 함께 전후 일본의 4대 거장이라 불린 곤 이치가와 감독(1915~2008·사진)의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한국에서 LA로 온지 얼마 안돼 그 때 네 살짜리 아들과 함께 윌셔가의 맥아더팍 인근에 있던 리바이벌 하우스 배가본드 극장에서 봤다.
통상적 스포츠 기록영화라기보다 한 편의 시적 인간 드라마라고 하겠는데 영화를 보면서 사실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하고 느꼈었다. 상영시간 170분이 훌쩍 지나가도록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각본은 남편 영화의 각본을 여러 편 쓴 이치가와의 아내 나토 와다가 썼다. 와다와 이치가와가 쓰고 연출한 두 편의 걸작 반전영화가 ‘버마의 수금’(The Burmese Harp·1956)과 ‘야화’(Fires on the Plain·1959)다.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후보작인 ‘버마의 수금’은 태평양전쟁 말기 버마 전투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된 젊은 일본군의 영적 변신을 그린 숭고한 작품이다.
‘야화’는 필리핀 전투에서 살아남은 폐병환자인 일본군 타무라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그린 영화로 그의 전우들은 살아 남기 위해 인육을 먹는다. 폭력적이요 절망적으로 어둡지만 전쟁의 무모함을 호소한 위대한 반전작품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처음에 ‘도쿄 올림피아드’의 기록을 쿠로사와에게 의뢰했었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국제올림픽위원회가 개막식 연출을 자신에게 맡기지 않자 영화촬영을 거절했다. 이치가와가 ‘평화와 인간 평등의 시각적 시’라고 말한 ‘도쿄 올림피아드’는 단순히 운동경기를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선수들의 감각적 고뇌와 희열과 함께 구경하는 관중들의 모습을 손에 든 카메라를 이용해 와이드 각도로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라톤 경기를 보려고 길에 나온 사람들의 목을 길게 뽑은 채 뒷짐 진 모습을 찍은 장면 등에서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여 환호는 구경꾼들로 만들고 있다.
이치가와는 메달 수상자들보다 패자를 비롯한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삐딱한 각도로 선수들의 얼굴과 손과 발 그리고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면서 아울러 패배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환호하는 음향과 침묵을 절묘하게 사용, 경기의 흥분과 적막한 긴장감을 극적으로 살렸다. 매우 인간적인 작품으로 감독의 인본주의 정신이 가득한데 내용과 함께 형식미도 뛰어나다.
이치가와는 1930년대부터 시작해 사망하기 2년 전까지 50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형태와 분위기에 뛰어난 예술가로 인본주의적 전쟁(반전)영화와 기록영화 그리고 세련된 사회풍자극과 화려한 시대극 등 모든 장르를 잘 다루었다.
그는 우아한 화면구도와 매서운 위트 그리고 과감한 서술을 구사하면서 끊임없이 스타일과 주제 변혁을 시도한 개혁자였다. 이치가와는 또 세세한 것 모두의 사실성에 철저한 완벽주의자여서 히치콕에 비유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이치가와의 영화가 드라마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1983)이다. 주니치 다니자키의 소설 ‘세설’이 원작으로 1930년대 오사카의 몰락한 부잣집 네 자매의 이야기다. 지천으로 나부끼며 떨어지는 벚꽃들과 고운 무늬로 수놓은 비단 기모노가 내는 감각적인 소리 그리고 벚꽃들이 겨울을 맞아 변신해 내리는 듯한 세설과 아름다운 네 자매의 모습이 총천연색으로 투영된 색채미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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