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7월 5일 화요일

퇴짜 맞은 존 웨인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로 왕년에 할리웃의 스크린을 군림했던 거구의 존 웨인이 자기가 자라고 활동하고 또 땅에 묻힌 캘리포니아의 주 의회로부터 사후 불명예스런 대접을 받았다. 최근 주 하원이 웨인의 생일인 2016년 5월26일을 ‘존 웨인 데이’로 지정, 기념하자는 결의안을 부결한 것이다. 이유는 웨인의 인종적 편견 때문이다.
많은 웨스턴에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수 없이 쏴 죽인 웨인은 실제로도 인디언들을 멸시했다. 그는 지난 1971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 식민지 개척자들의 원주민에 대한 취급에 관해 “소위 우리가 그들의 땅을 훔쳤다고 하지만 그것은 생존의 문제일 뿐”이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새 땅이 필요했는데 인디언들은 이기적으로 자기들만이 땅을 간직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가 비록 영화이긴 하나 인디언들을 파리 잡듯 하던 것이 이유가 있었구나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발언으로 웨인은 존 포드가 감독한 걸작 웨스턴 ‘수색자’에서는 땅에 묻힌 인디언의 사체에다 대고 총질을 하기도 했다.
웨인은 인디언뿐 아니라 흑인도 하급 인간으로 여겼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백인 우월주의를 지지하면서 “흑인들이 어느 수준에 이르도록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무책임한 그들에게 권한을 주고 또 지도하고 판단하는 자리를 준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결의안이 부결되자 안을 제안한 매튜 하퍼 의원(공화)은 “존 웨인을 기리는 날에 반대하는 것은 파이와 불꽃놀이와 야구와 자유기업 그리고 7월4일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또 웨인의 아들 이산도 성명을 통해 “나의 아버지는 색깔과 인종과 성적 기호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매우 존경했다”며 “지금과 완전히 다른 시기인 44년 전의 발언을 놓고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은 공평치 못하다”고 말했다.
생전 ‘듀크’라 불리면서 포드와 함께 만든 ‘역마차’와 기병대 3부작인 ‘아파치 요새’ ‘황색 리번을 한 여자’ ‘리오 그랜드’ 그리고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및 ‘수색자’ 등 여러 편의 웨스턴으로 유명한 웨인은 기독교 신자로 철저한 보수파 공화당원이었다.
웨인은 공산당과 진보파 민주당원을 증오했는데 그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에 이 전쟁을 옹호하는 영화 ‘그린 베레’를 직접 감독하고 주연한 이유도 이 전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 대형 졸작에는 웨인의 아들 패트릭도 나왔다.  
웨인과 동시대에 활약한 지미 스튜어트도 웨인만큼이나 보수적인 공화당원으로 둘은 친구였다. 그런데 스튜어트는 2차 대전 때 자원입대, 폭격기 조종사로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나 웨인은 징집을 연기해 가면서 할리웃에서 활동했다. 그런 웨인이 태평양 전쟁영화 ‘유황도의 모래’에서 용감한 해병으로 나온 것이야 말로 거짓에 가까운 역설이다.
웨인의 이번 사후 불명예사건 만큼이나 아름답지 못했던 그의 생전 꼴불견 사건(?)은 그가 ‘정복자’에 나온 일이다. 하워드 휴즈가 주인이었던 RKO가 제작한 이 영화에서 웨인은 찢어진 눈에 콧수염을 한 징기스칸으로 나와 세인의 조롱거리가 되다시피 했었다. 나도 이 영화를 서울의 명보극장에서 보면서 실소를 터뜨린 기억이 나는데 웨인은 웨스턴에 싫증이 났는지 감독 딕 파웰이 말리는 데도 우겨서 징기스칸으로 나왔다.
아시안 배우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영화에는 코가 오똑한 수전 헤이워드가 징기스칸의 애인으로 나오고 그밖에도 아그네스 모어헤드와 존 호이트 및 페드로 아르멘다리스 등이 나오는 호화 올스타 캐스트이지만 비평가와 관객 모두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당했다. 웨인이 생애 나온 173편의 영화 중 최악의 것이자 1950년대 나온 최고 졸작 중 하나로 공교롭게도 웨인의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수색자’가 개봉된 1956년에 나왔다.
‘정복자’는 암의 저주를 받은 영화로 유명하다. 영화는 원폭 실험지에서 멀지 않은 유타주의 사막에서 찍었는데 감독 피웰을 비롯해 웨인과 헤이워드 그리고 모어헤드와 호이트 및 아르멘다리스(암에 걸린 것을 알고 자살했다) 외에도 촬영현장에서 일했던 220여명의 사람들 중 90여명이 후에 암에 걸려 사망했다. 술꾼에 담배를 하루에 6갑 이상 태웠던 웨인은 1979년 72세로 위암으로 숨졌다.
LA에서 웨인을 만나려면 윌셔와 라시에네가 코너에 있는 펜트하우스 본부 건물 앞에 가면 볼 수 있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웨인이 말을 탄 동상(사진)이 있는데 한때 웨인의 팬들이 도색잡지사 앞에 미국의 영웅이 웬 말이냐며 동상을 그가 살았던 오렌지카운티로 옮기자는 운동이 있었으나 유야무야 됐다. 그러나 비록 자기 이름을 딴 기념일 제정에는 퇴짜를 맞았지만 웨인으로서는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다. 승객들의 이용이 많은 오렌지카운티 국제공항 이름이 존 웨인 공항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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