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2월 9일 화요일

‘액션의 사나이’




영화인이라기보다 대쪽 같은 선비 스타일인 한국 영화계의 대부 정창화 감독(사진)을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둘이 다 영화를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만년 ‘영화청년’이기 때문이다. 정 감독의 이런 영화에 대한 정열은 그가 최근 펴낸 자신의 영화인생 회고록이자 한국 영화의 증언인 책 ‘액션의 사나이’(The Man of Action)의 부제 ‘내 영화인생은 아직 치열하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액션’은 정 감독의 이름표와도 같다. 그는 대사위주의 느린 속도의 멜로드라마인 ‘신파영화’  위주의 초창기 한국 영화에 속도와 리드미컬한 템포를 동원한 액션영화의 장르를 구축한 개척자다. 정 감독이 액션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조지 스티븐스가 감독한 웨스턴 ‘셰인’을 보고나서였다.
그는 이 영화의 빠른 템포와 속도를 배우기 위해 영화를 상영하는 단성사의 사장을 몇 차례나 찾아가 사정사정해 필름의 일부를 빌려다 밤을 새우며 수없이 보면서 공부했다. 정 감독은 노력파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으로 이 영화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액션영화다.
‘자유만세’를 만든 최인규 감독의 밑에서 처음에는 깡통에 담은 설렁탕을 배달하면서 영화수업을 한 정 감독은 홍성기와 신상옥과 함께 초기 한국 영화계의 삼총사로 활약했는데 그의 문하생들로는 임권택, 유현목, 강대진 감독 등이 있다. 정 감독의 또 다른 초기 액션영화들로는 ‘노다지’ ‘지평선’ ‘사르빈강에 노을이 지다’ 등이 있다. 그의 모토는 늘 대중에게 재미있는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같은 뜻을 제대로 이해 못하던 평단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창의성’이 화두인 정 감독은 액션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그는 현대물, 청춘물, 사극, 검객영화 및 멜로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면서 1960년대 한국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었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장기가 액션이니 만큼 정 감독의 솜씨를 눈여겨보던 홍콩의 쇼 브라더스의 란란 쇼 사장의 초청으로 1976년 홍콩으로 진출한다. 쇼 브라더스에 입성한 정 감독은 승부욕이 강해 자기를 ‘외인부대’ 취급하는 영화사의 토박이 감독들보다 나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쇼 브라더스의 작품을 무려 100여편을 보면서 숙지했다. 그가 홍콩에서 만든 첫 영화가 액션이 멋진 ‘천면마녀’(1969)로 빅 히트를 했는데 홍콩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유럽으로 수출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어 정 감독은 홍콩 최초의 무협영화인 ‘여협매인두’와 ‘아랑곡’ 및 ‘래여풍’ 등을 만들면서 홍콩 영화계에 발판을 굳혔다. ‘여협매인두’(1970)에는 당시 19세였던 성룡이 엑스트라로 나왔는데 그 때부터 성룡은 장난기가 심했다고 한다.
정 감독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려주게 된 영화가 로레이와 남석훈이 나온 무술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1972)이다. 이 영화는 홍콩 영화 최초로 워너 브라더스에 의해 미국에 수입돼 개봉 첫 주말 흥행 1위를 차지했다. 같은 주말에 개봉된 기라성 같은 할리웃 스타들이 나온 해양 재난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제치고 흥행 1위를 했다는 것이야말로 쾌거라고 하겠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올타임 베스트 텐 중의 하나로 그는 자신의 액션영화 ‘킬 빌’에서 이 영화의 장면을 빌려다 오마지 형식으로 쓰기도 했다.
정 감독은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쇼 브라더스에서 자기와 함께 일한 제작자 레이먼드 차우가 새로 만든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로 몸을 옮겼다. 골든 하베스트는 이소룡이 나온 ‘당산대형’과 ‘정무문’을 만든 회사다. 정 감독은 당시 이소룡이 자기를 찾아와 영화를 함께 만들자고 제의, 기획단계에 들어갔었는데 갑자기 이소룡이 사망했다고 회고했다.
정 감독이 10년간의 홍콩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것은 당시 군사정권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귀국 후 화풍흥업이라는 영화사를 설립, 작품활동을 해보려고 했으나 창작의 자유가 제한돼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특히 당시 이영희 공연윤리위원장의 전횡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심신이 피로해진 자신을 안타깝게 여기던 아내의 권유에 따라 정 감독은 1996년 미국으로 이주, 남가주 샌디에고 인근의 라호야에 자리를 잡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정 감독의 영화인으로서의 삶이 뒤 늦게 부활하게 된 것은 지난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그의 회고전이 열리면서였다. 이어 칸과 홍콩 및 런던 등지에서 정 감독의 회고전과 함께 그의 영화인생이 재조명되면서 그는 지금 ‘제2의 영화인생’을 살고 있다. 정 감독은 현재 샌디에고 한국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꺼질줄 모르는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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