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좋아하는 내가 런던에 가면 보면서 부럽고 흐뭇해하는 모습이 런더너들의 노변 음주다. 런던 시민들은 퇴근길에 곧바로 집으로 안 가고 펍 앞의 인도에 삼삼오오 모여서서 맥주를 마시면서 떠들어들 대는데 그 모양이 정겹기 짝이 없다.
저녁 때 런던 길을 걷다 보면 골목골목에서부터 와글바글 대는 소리가 울려나오는데 이 것이 바로 노변 음주자들의 리드미컬하기까지 한 하루의 노고를 푸는 소리들이다. LA에서 이들 런더너들처럼 노변 음주를 했다가는 벌금 딱지감이지만.
지난주 영화촬영 세트 방문과 배우들 인터뷰 차 런던에 갔다 왔다. 저녁 산책길에 숙소인 호텔 인근의 ‘코치 앤 호시즈’ 펍(사진) 앞을 지나가다가 셀폰으로 노변 음주하는 런더너들을 찍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른다. 사진을 찍을 때 내가 엄지손가락을 올리면서 “롱 리브 더 퀸”이라고 했더니 사진을 같이 찍던 한 남자가 “여왕 폐하 좋아하시네”라며 핀잔을 준다. 그도 아마 나처럼 군주제를 싫어하나 보다.
군주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런던의 여러 유명 호텔과 고급 아파트들이 중동의 왕족이나 특권층들의 것이다. 식당에서 비둘기 고기를 파는 도체스터 호텔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클래리지스 호텔을 비롯해 하이드팍이 내려다보이는 1억파운드짜리 고급 아파트들이 다 오일 머니에 팔렸다. 칵테일 리셉션이 있은 레인스보로 호텔에는 오일 머니들을 위해 하룻밤에 기만파운드짜리 방도 마련돼 있다.
출생 탓에 나라의 땅과 석유를 독식한 채 호사를 누리면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군주제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혁명이 나지. 영국도 마찬가지다. 관광객들의 명소인 피카딜리 서커스와 리츠를 비롯한 고급호텔과 고급상점들이 즐비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시의 금싸라기 같은 땅의 대부분이 공작 칭호를 지닌 귀족의 것이다.
세트방문 차 셰퍼튼 스튜디오로 우리를 태우고 가는 택시의 운전사도 군주제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김에 분명했다. LA에서도 살았다는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찰스가 왕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며 껄껄대고 웃었다. 나도 그 말에 깔깔대고 웃었다. 그는 아주 달변이었는데 고풍이 느껴지는 액센트가 듣기에 좋다.
숙소인 웨스트민스터시 본드 스트릿의 웨스트베리 호텔은 도심공원 버클리 스퀘어 인근에 있다. 버클리 스퀘어는 바비 다린이 노래한 ‘나이팅게일 생 인 버클리 스퀘어’로 유명하다. “우리가 만난 그 어느 날 밤 리츠에선 천사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버클리 스퀘어에선 나이팅게일이 노래 불렀지/당신이 돌아서서 나보고 미소를 지었을 때 버클리 스퀘어에선 나이팅게일이 노래 불렀지/마을의 길들은 별들로 포장되었고 그것은 정말로 로맨틱한 연애였어/그리고 우리가 키스를 하고 굿-나잇이라고 말하자 나이팅게일이 노래 불렀지.” 나도 공원을 거닐면서 노래를 흥얼댔다.
셰퍼튼 스튜디오로 가면서 비틀즈의 앨범 커버사진으로 유명한 애비 로드를 지나갔다.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 앨범사진 대로 일렬횡대로 애비 로드 건널목을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는다. 셰퍼튼 스튜디오는 오손 웰즈가 나온 ‘제3의 사나이’(1949)를 비롯해 007 시리즈와 ‘해리 포터’ 시리즈 등을 찍은 유서 깊은 스튜디오다.
구내에 들어서니 데이빗 린 드라이브와 햄릿 드라이브가 있고 오손 웰즈 빌딩과 드라이브도 보인다. 오손 웰즈 빌딩에서는 ‘제3의 사나이’에서 범죄자 해리(웰즈)가 미로 같은 비엔나 하수구로 도주하는 장면을 찍었을 것이다.
현재 여기서는 디즈니의 뮤지컬 만화영화 ‘미녀와 야수’를 뮤지컬 극영화로 찍고 있는데 세트와 의상과 소품들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고 또 아름답다. 미녀로는 ‘해리 포터’의 엠마 왓슨이 나오는데 한 관계자는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1946)를 많이 참조했다고 말했다.
빨간색의 2층 버스들과 검은 색의 택시(런던의 택시 운전사시험은 사법고시만큼이나 힘들어 시험을 지식이라는 뜻의 ‘날리지’라고 부른다고 한다)들이 시내 교통대란을 잽싸게 헤집고 다니는 런던은 옛것과 요즘 것이 티를 안 내고 조화를 이뤄 걷노라면 마치 내 집에나 온 것처럼 아늑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매력은 런던의 물가를 생각하면 거의 공포로 변한다. 하여튼 되게 비싼데 호텔 바에서 마신 싱글몰트 스카치 한 잔이 무려 13파운드다.
런던 체류 마지막 이틀은 1960년대 인기리에 방영된 TV 스파이 시리즈 ‘U.N.C.L.E.에서 온 사나이’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 감독과 출연진 인터뷰를 했다. 마돈나의 전 남편 가이 리치가 감독한 이 영화는 8월14일에 개봉되는데 아주 졸작이다. CIA 스파이와 KGB 스파이로는 각기 헨리 캐빌과 아미 해머가 나온다.
런던 체류를 끝내고 우디 알렌을 만나려고 뉴욕으로 떠나는 날은 비가 왔다. 내가 짐을 들어준 호텔 포터에게 “비가 오네”라고 했더니 그가 나더러 “런던 콜즈 유”라며 미소를 짓는다. 노래 가사처럼 로맨틱한 표현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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