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성감독 작품 연달아 개봉
간통소설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프랑스의 문호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을 원작으로 만든 두 편의 영화가 현재 상영 중이다.
먼저 개봉된 것은 프랑스의 여류감독 안 폰텐이 연출한 코믹터치의 ‘젬마 보바리’(Gemma Bovery). 영국에서 남편 찰리와 함께 프랑스의 노르망디 시골로 이사 온 아름다운 육체파 젬마(젬마 아터튼)가 따분한 남편과 시골생활에 권태를 느껴 바람을 피우다가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그 종말이 황당무계하게시리 희극적이다.
이 영화는 젬마의 옆집에 사는 빵가게 주인으로 고전문학 애독자인 마르탱(화브리스 뤼시니)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역시 지루하고 따분한 시골생활에 좀이 쑤시는 마르탱은 소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 보바리와 이름이 비슷한 젬마를 보자마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탐을 낸다. 경량급으로 즐길 만한데 아터튼이 감각적으로 아름답고 프랑스의 베테런 배우 뤼시니가 호연한다.
이 영화와 달리 12일에 개봉된 역시 여류감독 소피 바르테가 연출한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은 매우 심각하다. 보바리 부인으로 미아 와시코우스카가 나오는데 영화는 기능적으로 뛰어나고 여성적 터치가 느껴지나 과거의 보바리 부인 영화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는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
다분히 학구적이요 여권 주창의 뜻을 내포하고 있긴 하나 보바리 부인이 권태로운 남편과 시골생활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내면적 욕구와 갈망이 절실히 묘사되질 못한 채 정열과 감정이 결여됐다. 보바리 부인의 욕정과 열정 그리고 사회적으로 신분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야망 및 시골생활로부터 탈출해 도시로 가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돈과 사치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통찰력 있게 탐구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다뤄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촬영은 아름답지만 와시코우스키와 그녀의 정부들로 나오는 후작 역의 로간 마샬-그린과 젊은 서기 레옹 역의 에즈라 밀러와 화학작용도 전무해 도무지 정열을 느낄 수가 없고 로맨틱하지도 못하다. 와시코우스카가 열심히 연기를 하나 차가운 연출로 인해 영화의 고동과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보바리 부인’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었다. 1934년에 프랑스의 명장 장 르놔르가 만들었고 1949년에는 빈센트 미넬리(라이자 미넬리의 아버지)가 그리고 1991년에는 프랑스의 스릴러 장인 클로드 샤브롤이 이자벨 위페르를 주연으로 발탁해 연출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MGM작인 미넬리의 ‘보바리 부인’이다. 보바리 부인으로 제니퍼 존스가 그의 시골의사 남편 찰스로는 밴 헤플린 그리고 보바리 부인의 멋쟁이 정부로는 루이 주르단이 각기 나온다. 내용과 연기와 세트와 음악(‘벤-허’의 미클로스 로자)과 흑백촬영 등이 다 좋은데 특히 무도회 장면이 화려하다.
그러면 왜 19세기의 한 여자의 방종과 멸망에 관한 이 소설은 이렇게 세월을 타지 않고 계속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보바리 부인의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욕구와 자기가 처한 곤경에 대한 불만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폰텐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보바리 부인의 무언가 보다 깊고 강렬한 것에 대한 기대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여전히 남성위주의 사회에 속한 여자들에게는 보바리 부인의 얘기가 결코 남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바리 부인은 19세기 당시의 사회적 환경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를 사랑하나 무미건조한 찰스와 결혼하는데 이 때부터 그녀는 영원한 함정에 갇히게 된다. 당시 여자들은 직업도 가질 수가 없고 또 이혼도 못하는 사회적 제한의 수인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똑똑하고 야심만만하며 또 정열적인 보바리 부인은 결국 이런 사회적 조건에 반기를 들었다가 자살하고 만다. 소설 ‘보바리 부인’은 도덕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회 비평이자 여성 해방과 여권 옹호의 글이라고 하겠다.
소설은 단조로운 결혼생활과 시골환경에 싫증이 난 아름답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엠마 보바리가 자신의 낭만적 동경과 정열을 좇아 외도를 하다가 비극적 종말을 맞는 얘기를 심리적으로 분석한 뛰어난 사실주의 작품이다.
맹물 같은 시골의사인 엠마의 남편 찰스는 아내를 사랑하나 그녀를 진실로 이해하지도 위로하지도 못하고 또 엠마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남자다. 이런 남편을 둔 감수성이 예민한 엠마는 자존마저 내팽개치고 죄악적인 사랑처럼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환상에 빠져 두 남자와 절망적인 사랑을 나누다 결국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극약을 먹고 자살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혼율이 가장 높은 때는 결혼 3년째다. 뜨겁던 사랑 대신 뜨뜻미지근한 무료함이 찾아드는 시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 심한 권태증에 빠지게 되면 상대가 밥을 먹는 모습도 미워지게 마련이다. 엠마의 눈에는 찰스의 밥을 먹는 모습이 소의 반추처럼 보였을 정도다. 이 같은 상황은 ‘보바리 부인’에서 미아 와시코우스카가 식탁 건너편에 앉아 열심히 음식을 먹는 찰스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잘 나타난다. 모든 엠마에게는 찰스가 있게 마련이다. 엠마를 죽인 비극의 절반 책임은 찰스에게도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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