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4월 6일 월요일

‘스펙터’




멕시코시티 중심부에 위치한 소칼로(광장)는 어마어마하게 넓다. 국빈 영접과 국경일 행사 등이 열리는 광장 한복판에 게양된 거대한 멕시코 국기가 바람을 맞으며 위풍당당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광장 위로 제임스 본드가 탄 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오더니 마침 ‘사자의 날’을 맞은 축제인파를 헤치고 착륙한다(사진). 007시리즈 제24편 ‘스펙터’(SPECTRE)의 프리 타이틀 시퀀스를 촬영하는 현장에는 시리즈 제작자들인 바바라 브로클리와 마이클 윌슨 및 제작사인 MGM의 게리 바버 회장과 조나산 글릭맨 영화제작 담당 사장 등이 참석, 3월 말 취재차 이 곳을 찾은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원들을 맞았다.
헬기에는 본드가 타고 있어야 하겠지만 기내에서 본드가 암살자와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소칼로에서 찍기에는 위험부담이 커 본드 없이 찍은 뒤 본드가 실제로 싸우는 장면은 후에 다른 곳에서 찍는다고 브로클리가 설명했다. 그는 이어 “‘스펙터’는 ‘스카이폴’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고 더 좋다”면서 “대중이 그만 만들라고 할 때까지 시리즈는 이어질 것”이라고 자랑했다.
브로클리는 이날 촬영에 나온 엑스트라는 1,500여명으로 광장을 가득 메운 나머지 인파는 촬영이 끝난 뒤 디지털로 만든다고 말했다. 바바라 브로클리는 본드시리즈를 처음 제작한 커비 브로클리의 딸이다.
시리즈 제23편 ‘스카이폴’을 감독한 샘 멘데스가 다시 연출하는 ‘스펙터’에서 본드 역은 역시 대니얼 크레이그가 맡는다. 본드 역 만큼이나 중요한 본드 악한 역은 오스카 조연상을 탄 오스트리아 배우 크리스토프 월츠가 그리고 본드걸들로는 이탈리아 배우 모니카 벨루치(50세로 역대 본드걸 중 가장 나이가 많다)와 프랑스배우 레아 세이두(‘푸른색이 가장 따뜻한 색’) 및 멕시코 배우로 신성인 스테파니 시그맨 등이 나온다. 이들 외에 본드를 짝사랑하는 본드의 상관 M(레이프 화인즈)의 여비서 모니페니(네이오미 해리스)까지 합하면 본드걸이 자그마치 4명이나 된다. 여복도 많지!
영화 제목은 본드의 천적인 국제적 범죄 및 테러조직의 영어 두문자로 스펙터는 본드 시리즈 제1편 ‘닥터 노’에서부터 활약을 했다. ‘스펙터’는 이미 오스트리아와 로마와 런던에서 촬영을 마쳤고 멕시코시티 촬영이 끝나면 모로코로 이동한다. 가히 세계적 영화다.
우리는 영화의 제작진과 배우들을 인터뷰했지만 누구 하나 영화의 내용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며 나 모르쇠 일관이었다. 크레이그의 선배 본드인 티머시 달턴이 나온 ‘라이선스 투 킬’을 찍은 소칼로가 내려다보이는 고색창연한 그랜드호텔 4층 테라스에서 촬영과정을 지켜본 뒤 시내 극장에서 관람한 ‘스펙터’의 예고편도 길이가 1분 남짓했다. 영화 내용을 철저히 보호하려는 제작진의 장삿속이겠지만 농담 같은 짓이다.
촬영현장 방문 다음 날 월츠, 세이두, 시그맨 및 졸개 본드 악한으로 나오는 격투기 선수인 데이브 바우티스타 등과의 인터뷰가 있었다. 제일 만만한 시그맨과의 인터뷰 내용만 쓸 수 있고 나머지는 영화 개봉일인 11월6일 보름 전쯤에나 쓴다는 서약서에 서명까지 했다. 그러나 도대체 배우들이 영화 내용에 대해 “모른다”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 또는 “말할 수가 없다”는 식이어서 나중에 써먹을 만한 얘기가 과연 있을지 의문이다.
마이클 윌슨이 들려준 내용 이래봐야 고작 “크레이그는 촬영 내내 올림픽 선수처럼 신체단련에 매달렸고 저녁 9시에 취침해 아침 5시에 기상하는 수사와도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 그는 이어 “영화를 위해 시당국이 광장을 완전히 외부로부터 차단하면서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시민들도 마찬가지”라며 멕시코를 치켜세웠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멕시코 당국에서 영화 속의 멕시코의 이미지를 좋게 표현하기 위해 각본을 수정하는 조건으로 2.000여만달러를 제작비 협조 명목으로 주었다고 한다. 물론 당국은 이를 부인했다.
본드 시리즈에 처음 등장하는 멕시칸 본드걸 역의 시그맨(28)은 아마추어 권투선수다. 내가 그에게 “이 건 내 추측인데 당신은 권투선수로 제임스 본드 영화에 나오니 아마 본드의 엉덩이를 걷어찰 모양이지요”하고 물었더니 그는 “모르겠네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요”라며 웃었다. 그러나 내 추측이 맞을 것 같다.
교통대란의 도시 멕시코시티는 곳곳에 고가도로가 설치된 모습이 1970년대 서울을 연상시킨다. 이 곳이 위험한 도시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현장에서 그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시내 중심부의 고급 호텔이었는데 밤에 호텔 밖에서 호텔 내 바에 들어가려면 가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야 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를 거쳐 바에 들러 테킬라에 매운 토마토주스 상그리타를 체이서로 마시니 이국의 노독이 깜빡깜빡 졸음에 빠진다. 이번 여행서 얻은 큰 수확은 틈을 내 프리다 칼로와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함께 살고 작업을 한 원색의 프리다 칼로 개인주택 뮤지엄을 방문한 것이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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