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턴의 장인 존 포드는 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여기는 서부야. 전설이 사실이 되면 전설을 인쇄하지”라고 말했다. 이렇게 사실과 전설이 뒤엉켜 사실이 전설이 되다시피 한 미 서부의 총격전의 대표적 사건이 1881년 10월26일 이른 아침 애리조나주 툼스톤에서 일어난 O.K. 목장의 결투다.
연방 보안관 와이엇 어프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와이엇의 친구로 전직 치과의사인 폐병환자 킬러 닥 할러데이 대 소도둑 일가 클랜턴 가족 간에 벌어졌던 총격전으로 단 30여초 만에 끝났다,
미 서부사의 마지막 대결이라 불리는 이 전설적인 사건은 하도 유명해 수많은 책과 TV 작품과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대중적인 것이 버트 랭카스터와 커크 더글러스가 나온 ‘O.K. 목장의 결투’(1957)다.
이 밖에도 이 결투는 제임스 가너와 제이슨 로바즈가 공연한 ‘총의 시간’과 커트 러셀과 발 킬머가 나온 ‘툼스톤’ 그리고 케빈 코스너와 데니스 퀘이드가 공연한 ‘와이엇 어프’ 등 여러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와 내 친구 C가 가장 좋아는 웨스턴이자 O.K. 목장의 결투 얘기는 존 포드가 감독한 흑백 서정시와도 같은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ㆍ1946ㆍ사진)이다. 이 영화는 와이엇 어프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포드가 그에게 바치는 헌사다.
내용과 연기와 액션과 함께 포드가 여러 편의 웨스턴을 찍은 애리조나와 유타주 경계에 있는 모뉴먼트 밸리에서 찍은 촬영 등 모든 것이 준수한 작품이다. 물론 극적 재미를 위해 사실을 다소 전설화 했지만 가급적 사실에 충실한 영화로 느린 템포로 서술되고 있다.
많은 포드의 웨스턴에서 볼 수 있는 활짝 트인 하늘과 떠 있는 뭉게구름 그리고 광활한 황야를 무대로 펼쳐지는 극적인 얘기로 우수와 노스탤지어가 촉촉이 배어 있다. 특히 인상에 깊이 남는 것은 침울한 흑백 명암을 뛰어나게 처리한 촬영이다. 치밀하게 구성된 화면 안에 마치 서부 전체를 떠다 옮겨 놓은 듯한 무한광대하고 흙먼지 일어나는 사실적인 촬영으로 영상시의 극치라고 할만하다.
툼스톤은 모뉴먼트 밸리와는 거리가 있지만 포드가 매우 좋아한 곳이어서 영화를 여기서 찍었는데 그는 자신의 다른 웨스턴인 ‘역마차’와 ‘황색 리번’ 및 ‘수색자’ 등도 역시 이 곳에서 찍었다. 그래서 모뉴먼트 밸리에는 포드를 기리는 ‘존 포드 포인트’가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역마차’의 현장 취재차 모뉴먼트 밸리를 방문했었다. 황토의 언덕 위에서 아래로 가없이 물러선 광야를 바라보면서 영혼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중에 떠도는 듯한 신비한 감동을 느꼈었다. 왜 포드가 모뉴먼트 밸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영화에서 참 보기 좋은 것은 ‘신사 건맨’ 와이엇 어프 역의 헨리 폰다의 과묵한 모습과 절제된 연기다. 콧수염을 한 폰다의 침착하고 평온한 연기는 거의 단조로울 지경인데 대사의 억양 역시 높낮이가 거의 없다. 완벽한 연기로 수필과도 같은 것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닥 할러데이로 나온 빅터 마추어다. 폐병으로 심한 기침을 할 때마다 목에 감은 스카프로 입을 틀어막는 닥은 이 기침을 위스키로 진정시키곤 한다. 그런데 사실과 달리 닥은 영화에서 이 기침 때문에 클랜턴 일가의 총에 맞아 죽는다.
마추어는 쓴맛 다시는 표정으로 시한부 인생의 건맨 모습을 윤곽이 뚜렷하게 표현하는데 “투 비 오어 낫 투 비”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구절을 줄줄이 외워 살육의 영화에 문학적 기운마저 부여한다.
제목의 클레멘타인(캐시 다운즈)은 닥의 전 애인으로 그녀는 자기를 피해 서부로 달아난 닥을 찾아 툼스톤에 도착한다. 그런데 어수룩할 정도로 순진한 와이엇이 이 참한 색시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영화에서 간간이 하모니카로 불어대는 미국 민요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의 선율이 차마 자기 사랑을 제대로 고백 못하는 와이엇의 마음을 감상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클레멘타인과는 정반대로 정열적인 여인이 닥을 사랑하는 술집가수인 멕시칸 치와와(린다 다넬)다. 눈이 큰 다넬이 닥을 사랑하는 여인의 역을 뜨겁게 보여주고 있다. 멕시칸고추처럼 입안이 화끈해지는 연기다.
영화는 포드의 많은 다른 웨스턴들처럼 주인공이 먼 지평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와이엇은 마을에 학교 선생으로 남는 클레멘타인의 볼에 입을 맞춘 뒤 “맴, 나는 클레멘타인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좋습니다”라는 말로 작별을 고한다. 이어 카메라가 말을 타고 떠나가는 폰다의 뒷모습을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따라간다. 과연 와이엇은 클레멘타인을 찾아 다시 툼스톤으로 돌아올 것인가.
와이엇 어프는 생애 모두 100여회의 결투를 했는데 건맨으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하다가 1929년 81세로 LA에서 사망했다. 닥 할러데이(본명 존 H. 할러데이)는 조지아주 명문 태생으로 폐병으로 치과를 문 닫고 서부로 방랑길에 올랐다. 총과 칼에 능했는데 1887년 35세로 숨지기까지 모두 30명을 황천으로 보냈다. ‘황야의 결투’가 새로 프린트돼 Criterion에 의해 블루-레이로 나왔다.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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