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학교 졸업 직후 돈 없어 커피도 못마셨죠”
3월2일 거행된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디 알렌의 영화 ‘푸른 재스민’(Blue Jasmine)으로 여우주연상을 탄 케이트 블랜쳇(44)과의 인터뷰가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블랜쳇은 뉴욕의 부유층에서 하룻밤 새 알거지가 된 뒤 샌프란시스코에 와 간난하나 근면한 여동생의 아파트에 얹혀살면서도 제 정신을 못 차리는 신경 파탄자인 재스민으로 나왔다. 긴 금발에 긴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블랜쳇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는데 홍조를 띤 하얀 피부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호주 태생의 블랜쳇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액센트 있는 약간 굵은 음성으로 질문에 직선적으로 답했는데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서민적이어서 친근감이 갔다. (재록)
*우디 알렌을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는가.
- 내가 호주에 살기 때문에 그와의 만남은 전화를 통해서였다. 그가 내게 각본이 있는데 읽어 보겠느냐고 제의, 난 물론 그러겠다고 답했다. 난 각본을 받는 즉시 읽었고 이어 그가 전화를 다시 걸어 역을 맡겠느냐고 물어 수락했다. 그랬더니 그는 “좋아요”라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를 직접 만난 것은 카메라 테스트 때였다.
*당신과 여동생과의 관계는 어떤가.
- 우린 매우 가깝다. 내 여동생은 건축가다.
*당신은 운명과 운을 믿는가.
- 믿는다. 난 드라마학교를 졸업한 뒤 내게 5년의 기한을 줬다. 배우란 처음에 역을 얻기보다 퇴짜를 맞기가 일쑤여서 5년 만에 성공 못하면 포기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난 운이 정말로 좋아 학교를 나온 뒤 얼마 안 돼 데이빗 매멧의 연극에서 제프리 러쉬와 공연했다. 그 바람에 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게 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운명이라면 지금까지 16년간을 함께 산 남편과의 결혼이 운명이다.
*당신은 남의 집에 얹혀 살 정도로 궁색해 본 적이 있는가.
- 물론이다. 시드니는 물가가 매우 비싼 도시로 연극학교를 졸업하면서 돈이 없어 창문 앞이 벽으로 꽉 막힌 어두운 방을 남과 함께 썼다. 처음엔 역이 없어 커피도 이틀에 한 번씩 마셔야 했다. 이젠 돈 걱정 안 해도 되니 난 참으로 행운녀다.
*처음 크게 번 돈으로 무얼 샀는가.
- 알마니 옷인데 지금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계급에 관한 것이기도 한데 당신은 어떤 계급에서 자랐는가.
- 호주의 백인사회에는 계급이란 없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사망해 나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느라고 막심한 고생을 했다. 어머니에겐 그래서 돈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기억할 만한 에피소드라도 있었는가.
- 난 샌프란시스코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매력적이고 안개는 신비롭다. 도시의 결이 시드니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어느 현장에서 촬영을 할 때면 그 곳을 작중 주인공의 눈으로 보게 돼 촬영이 끝나고 도시를 떠날 때 안도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당신은 영화에서 “푸른 재스민은 늘 어두운 뒤에야 핀다”고 말했는데 당신도 야행성인가.
- 그렇다. 날 여자 흡혈귀라고 불러도 괜찮다.
*당신이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 칼 라거와 알마니다. 그들은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요 또 박애가들이다. 영화의 옷은 수지 벤징거가 디자인했다.
*당신은 여기서 신경 파탄자의 연기를 기막히게 잘 하는데 당신의 독자적 결정인가 아니면 알렌이 지도를 했는가.
- 그가 지도를 했다. 우리는 연기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눴다. 알렌의 연기 지도는 97%가 그가 쓴 각본 안에 있다. 그의 단어 선택은 매우 특별나고 그의 글은 매우 특별한 리듬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배우는 그의 이런 선택과 리듬에 자신을 맞춰 올려야 한다.
*영화는 샌프란시스코의 미를 최대한으로 보여주지 않고 있는데 왜 그런가.
알거지가 돼서도 루이뷔통만 찾는 재스민이
망연자실한 채 벤치에 앉아 있다.
|
- 그것은 재스민이 관광객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삶을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으로 이 도시를 찾아 왔기 때문이다. 내가 알렌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삶의 비극적 면과 황당무계한 면을 잘 섞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배우와 어머니로서의 삶에 균형을 유지하는데 남편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 내 남편은 지적이요 고무적이며 또 관대하고 과감하다. 그런 남편을 만난 난 정말로 운이 좋다. 그와 나는 가차 없이 서로에게 진실하다. 난 그에게 아무 두려움이나 판단 없이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다. 남편이 하나 못 참는 것은 허풍이다.
*당신은 침착한 사람인가 아니면 약간 재스민 같은 데가 있는가.
- 재스민처럼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의 신경을 파탄시키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들이다. 예를 들어 만사 잘 나가는데 도저히 필요한 펜을 찾을 수 없을 때 같은 경우다. 신경질이 날 때면 잠시 아무 일도 안 하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영화를 찍을 때 항상 재스민과 살았는가 아니면 일과 후엔 그를 세트에 남겨 놓았는가.
- 자기가 맡은 역을 가능하면 세트에 남겨 놓는 것이 좋다. 물론 역이 세트를 떠나서도 따라다니면서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난 촬영 때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가급적 재스민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항상 맡은 역을 완전히 잊기엔 시간이 걸린다.
*이 영화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내용과 비슷한데 알렌과 그에 대해 얘기라도 했는가.
- 나는 시드니의 무대에서 그 연극의 주인공인 블랜취 역을 했었다. 내 생각엔 알렌이 그 연극을 보고 날 자기 영화에 쓰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두 작품은 비슷한 데가 있다. 극중 인물들 간의 상호관계는 상당히 비슷한 반면 결과는 서로 아주 다르다. 그런데 우디 알렌의 글의 리듬과 색채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그것과 다르다.
*여배우 중 누구를 존경하며 배우 아닌 여자로선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 배우로선 ‘위대한 개츠비’에 나온 엘리자베스 데비키이고 그 밖의 다른 여자로선 비록 연예계에 종사하고는 있지만 리브 울만이다. 역사적 인물로선 잔 다크이다.
*당신은 최근에 알렌과 조지 클루니 감독 등 두 사람과 일했는데 둘이 같은 점이라도 있는가.
- 성격은 전연 다르다. 그러나 둘은 작업방식에 있어선 모두 꾸밈이 없고 실제적이다. 두 사람의 영화가 모두 활기차고 생기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실하다. 그리고 둘 다 매우 지적이다.
*세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가.
-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실수한 점을 둘째나 셋째에겐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내 첫째는 자기를 실험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은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육아법 책이 큰 도움이 되진 못한다. 단지 당신의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연민과 겸손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셋은 모두 함께 잘 지낸다. 함께 웃고 춤추는데 우린 집에서 춤을 자주 춘다.
*재스민처럼 당신도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 관계의 상실보다 재정적 상실이 내겐 더 다루기 쉬울 것이다. 모르긴 해도 엉망진창이 됐을 것이다.
*당신은 역에 얼마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부여했는가.
- 배우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알렌은 배우가 스스로 무언가를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때 우리는 용감해야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면 반응을 얻지 못하게 된다. 당신이 알렌에게 무언가를 제시하면서 서로 대화를 해야 한다. 절대로 일방통행이 되선 안 된다.
*당신은 우디 알렌의 영화를 보면서 자랐는가.
- 난 그의 오랜 팬이다. 난 사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그래서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정말 놀랐다. 그는 내가 일해 본 어떤 감독들보다도 창작욕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그처럼 가능성이 많은 사람도 없다. 그의 영화에 나오기로 한 뒤 그의 영화들을 다시 봤는데 특히 ‘크라임즈 앤 미스디미너즈’와 ‘한나와 그의 자매들’이 좋았다.
*여자가 알렌의 영화에서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데 당신은 그가 여자를 이해한다고 보는가.
- 나는 그가 여자를 존경하고 또 여자에게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으면서 그와 대화를 나눴는데 그는 사실 재스민 역을 자기가 하고 싶은 역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의 극단적인 감정적 심리적 한계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주디 데이비스와 다이앤 키튼 그리고 스칼렛 조핸슨 및 페넬로피 크루스 등 많은 여배우들에게 훌륭한 기회를 준 사람이다.
*당신은 자신의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연기에 대해 자평하는가.
- 난 언제나 자신에 대해 불만이다. 아마 그래서 계속해 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내 영화를 보진 않는다.
*당신의 첫 비배우로서의 직업은 무엇인가.
- 양로원에 가서 노인들을 위해 밥을 해주고 몸을 씻어주고 또 청소하는 일이었다.
<한국일보 편집위원 / hjpark1230@gmail.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