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8년 9월 25일 화요일

‘로코와 그의 형제들’


내가 고등학생 때 지금은 없어진 서울의 중앙극장에서 이탈리아의 명장 루키노 비스콘티의 걸작 ‘로코와 그의 형제들’(Rocco and His Brothers^1960^사진)을 보면서 화면 속 모습에 단숨에 빨려들었던 여자가 프랑스 배우 아니 지라르도였다. 영화에서 창녀로 나온 지라르도는 마치 염가로 시장에 내놓은 매물 같은 모습이어서 음험토록 선정적이었다. 구름이 낀 얼굴에 드리워진 비굴한 색조를 띤 표정과 함께 방정치 못한 품행을 뽐내듯 과시하는 태도가 10대였던 내게는 과도하도록 육감적이었다.
후에 ‘표범’과 ‘이방인’ 및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같은 명작을 만든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은 네오리얼리즘의 정수로 사실성과 약간 멜로성을 갖춘 감정을 잘 조화한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남부에서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남부여대해 밀란으로 온 로코와 그의 네 형제 그리고 이들의 강인한 어머니의 이야기로 존 포드가 만든 ‘분노의 포도’를 연상케 한다. 밀란의 달동네와 거리 현장에서 찍은 주세페 로툰노의 탁월한 흑백촬영과 니노 로타의 만가풍의 비감한 음악과 함께 연기가 뛰어난 영화로 1960년 베니스영화제서 삼사위원 특별상을 탔다.
비스콘티가 가장 좋아하는 자기 영화로 그가 잘 다루는 현대화와 계급 간 갈등 및 가족의 결집력과 균열 등을 담대하게 서사적으로 다뤘는데 내가 이 영화에 심취했던 또 다른 이유는 로코 네 삶이 내가 어렸을 때 6.25를 겪은 우리 집 형편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영화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골에 살던 파론디 가족의 기둥인 어머니 로자리아(‘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오스카 조연상을 탄 카티나 팍시누)가 아들 넷과 함께 보따리를 싸들고 장남 빈첸조(스피로스 포카스)가 먼저 올라온 이탈리아의 북부 산업도시 밀란의 기차역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강력한 모권을 쥔 로자리아의 둘째는 촌티가 흐르는 건강한 체격의 시모네(레나토 살바토리), 셋째는 착한 로코(알랭 들롱) 넷째는 평범한 치로(막스 카르티에) 그리고 막내는 아직 어린 루카(로코 비도라치). 밀란의 달동네 아파트를 전전하는 이들은 새로운 도시의 삶에 적응하면서 먹고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빈첸조는 중류가정의 딸 지네타(클라우디아 카르디나레)와 결혼한 뒤 자기 가족과 별 교류가 없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로코와 시모네와 시모네가 사랑하는 창녀 나디아(아니 지라르도)로 두 형제간에 나디아를 두고 삼각관계가 형성되면서 끝내 피를 부른다. 시모네와 로코의 관계가 마치 카인과 아벨의 그 것을 닮았다.
시모네는 부와 명성을 빨리 거머쥘 수 있는 권투선수가 되라는 나디아의 종용에 따라 링에 오른다. 그리고 시모네는 나디아에게 창녀생활을 청산하고 자기 애인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나 나디아는 이를 거절한다. 로코는 막일을 하다가 군에 입대, 투린에 주둔하는데 여기서 매춘 죄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나디아를 만난다. 그리고 나디아는 로코의 순진성과 마음의 순결에 감동, 창녀 생활을 버리고 로코의 애인이 된다. 제대 후 로코도 권투선수가 된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주먹과 몸이 자산이다.
그러나 시모네가 로코와 나디아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시모네와 그의 일당이 로코와 나디아에게 가공할 폭력을 행사한다. 시모네의 나디아에 대한 끈질긴 사랑을 깨달은 로코는 나디아에게 시모네에게 돌아가라면서 그녀와 헤어진다. 그 뒤 로코는 챔피언이 된다. 창녀생활을 다시 시작한 나디아는 자기에게 돌아오라는 시모네의 간청을 거부, 시모네는 나디아에게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행사한다.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치로는 양가 규수와 결혼, 평온하게 살고 루카는 뒷전에서 형들의 삶을 관망하는데 마지막에 루카가 치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과연 루카가 돌아가고파 하는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일까.
작품의 주인공인 로코는 선의 상징으로 가족의 복지와 폐인이 되다시피 한 시모네의 재생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 밀란에서 태어난 귀족가문의 비스콘티는 파론디 가족을 통해 이탈리아 남과 북의 지방색과 차이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지켜내려는 가족의 결집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파론디네의 삶이 한국가족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이 영화로 비스콘티는 세계적 명성을 얻고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들롱과 살바토리와 지라르도 및 카르디나레 등이 빅 스타로 부상했다. 들롱의 차분한 연기도 좋지만 뛰어난 것은 금방 터질 것 같은 살바토리의 야수적 연기와 지라르도의 오만하고 육감적이요 가엽고 또 자기를 내버리는 듯한 연기다. 이 영화는 지라르도의 데뷔작. 통렬하고 감각적이며 감정적으로 상처를 내는 걸작으로 마일스톤 필름(Milestone Film)에 의해 복원판 DVD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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