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석영. |
나는 작가 황석영(사진)의 파란만장한 삶의 구석구석을 최근에 읽은 그의 두 권짜리 자전 ‘수인’을 읽고서야 알았다. 그의 다사다난한 인생에 관해서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책을 통해서야 그것의 편린들을 통증마저 느끼면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석영이와 나는 중고등 학생 때 친구로 그의 당시 이름은 수영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수업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노트에 잉크 찍은 펜으로 소설을 썼던 석영이는 경험론자요 행동론자요 투사다. 삶을 실제로 철저히 겪으면서 거기서 얻은 경험을 글로 썼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탑’은 그가 월남전에 파병돼 순찰조로서 겪은 경험이고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삼포 가는 길’은 그가 노동자의 척박한 삶을 배우기 위해 막노동판에서 일한 경험이다.
재간둥이요 기인인 석영이의 문단(?) 데뷔는 중학생 때 교내 문학콩쿠르에서 그가 쓴 ‘부활이전’이 장원을 하면서다. 그는 여기서 예수를 배신한 유다를 동정의 눈으로 보면서 왜 유다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 때 이 글을 읽으면서 그의 비상한 문재와 함께 소외되고 배척당한 사람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그의 반골정신에 크게 감복했었다. 그는 타고난 앤타이다.
석영이와 나는 비슷한 점이 더러 있다. 그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는 다 이북 태생인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로 두 사람이 모두 혼자서 외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중국의 장춘과 청도에서 각기 태어난 석영이와 나는 학생시절 영화광으로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껴 자주 땡땡이를 깠는데 그래서 두 모친이 툭하면 학교로 호출을 당하곤 했다. 석영이에 따르면 호출 당해 교무실에서 만난 두 모친은 “기도부터 합시다”라고 자식들의 죄의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린 둘 다 중학생 때부터 문학도였다.
석영이의 반골기질이 여실히 드러난 글이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이다. 이 소설은 내가 서울의 한국일보 사회부기자였을 때 석영이가 한국일보에 연재했다. 그런데 바람처럼 살던 석영이가 전남 해남에서 이 글을 쓰면서 툭하면 원고를 안 보내 문화부 담당 선배기자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었다. 석영이는 그러고도 가끔 고료를 받으러 신문사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날이면 난 그로부터 술을 톡톡히 얻어 마시곤 했다.
‘수인’은 그가 군인과 노동자 그리고 이북을 방문해 김일성을 여러 차례 만난 이후 망명자로 이어 귀국해 수인으로서 그리고 작가와 아버지와 아들과 남편으로서 겪은 삶의 희로애락을 학생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적었다. 친구로서 그를 잘 알던 나여서 반쯤은 내 얘기 같은 과거가 활동사진처럼 눈앞에서 파노라마쳤다.
월남에 가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고 노동판에서 뼈마디가 쑤시는 노동을 했고 오랜 타국살이 끝에 귀국해 5년간 옥살이를 한 일들을 현미경으로 보듯이 자세히 적었는데 그의 뛰어난 기억력에 혀를 찼다. 석영이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오직 그의 어머니의 기도 탓이리라.
특히 수인으로서의 옥중 생활 얘기가 흥미진진하다. 유명 작가와 정치범으로서 단식과 투쟁을 하면서도 교도관들로부터 대접을 받았는데 교도관들과 함께 이웃 죄수들과의 관계가 마치 교도소영화 보듯이 생생하다. 석영이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식들까지도 마음과 몸 고생 많이 했겠다. 석영이도 그래서 글에서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일종의 반성문이다.
나는 석영이가 미국서 망명 생활할 때 LA에서 그를 한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만나면 술집을 전전하며 옛 우정을 되새기곤 했는데 석영이는 늘 생명감이 넘치고 아이처럼 짓궂었다. 석영이는 천진난만하고 솔직하고 또 작가답게 날카로운 위트가 있어 좋다. 그리고 이번에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 난 그가 그렇게 유명한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그런데 글에 몇 군데 내 기억과 다른 곳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본 영화 ‘오케스트라의 소녀’에 관해 석영이는 미지막 장면에서 지휘자 스토코우스키가 지휘봉을 들고 열심히 흔들었다고 했는데 스토코우스키는 지휘봉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월남에서 한국산 K레이션의 김치와 꽁치 그리고 미제 레이션의 햄과 소시지를 섞어 끓인 것을 ‘부대찌개’의 원조라고 적었다. 그러나 ‘부대찌개’의 원조는 6.25 때 내가 부산 피난시절에 맛있게 먹은 미군부대에서 먹다 버린 온갖 음식 찌꺼기를 섞어 끓인 ‘끌꿀이죽’인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명동에 있던 학생시절 내 단골 음악감상실 ‘돌체’는 드문드문 클래식을 틀기는 했지만 고전음악감상실은 아니고 팝송감상실이었다.
석영이는 후기에서 책의 제목에 관해 이렇게 썼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갈망해온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이 책의 제목이 ’수인‘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그의 작가로서의 지금까지의 행적은 바로 이 자유에 대한 사랑의 궤적이리라. “석영아, 잘 있지. 보고 싶구나.”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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