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도망자인 명장 로만 폴란스키(83)의 오디세이는 언제나 끝날 것인가. 폴란스키는 지난 1977년 잭 니콜슨의 집에서 13세난 모델 지망생 새만사 가이머를 강제로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최종 형을 선고 받기 직전 파리로 달아난 뒤 미 사법당국으로부터 지명수배가 내려 지금까지 ‘페르소나 논 그라타’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지난 9일 가이머(54)가 LA 형사법정에 출두, 판사에게 폴란스키에 대한 법적 소송절차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또 다시 폴란스키가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가이머는 “나는 이미 과거의 불상사를 극복한지 오래 된다”면서 “폴란스키에 대한 소송절차를 철회함으로써 나와 내 가족을 지난 40년간 따라다닌 미디어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아울러 폴란스키도 여행의 자유를 가지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폴란스키는 당시 재판 끝에 90일간의 교도소 정신병동 수감 형을 선고 받은 뒤 42일을 살고 출소했다. 폴란스키는 이로써 형을 완료했다고 믿었으나 담당판사가 당초 약속을 어기고 폴란스키에게 남은 48일을 교도소에서 마저 살고 그 뒤에 자진출국 하든지 아니면 더 긴 형을 내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달아난 것이다. 그 후 폴란스키는 지금까지 미국과 범인 인도협정을 맺은 나라에는 가지 않고 있다.
심리묘사에 뛰어난 폴란스키의 영화들은 공포와 집념 그리고 인간 마음의 탈선 특히 성적 일탈을 자주 그리고 있다. 그의 데뷔작 ‘물속의 칼’과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충격적인 심리극 ‘리펄션’ 그리고 미아 패로가 나온 ‘로즈메리의 아기’ 및 폴란스키가 주연도 한 ‘테넌트’ 등이 다 그렇다.
폴란스키가 할리웃에서 만든 영화로 가장 유명한 것이 잭 니콜슨과 페이 더나웨이가 공연한 ‘차이나타운’이다. 그는 지난 2003년 자기 소년시절의 참담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피아니스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탔다. 당시 흥분에 들뜬 폴란스키가 비디오영상으로 오스카 회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폴란스키를 지난 2011년 10월 파리에서 만났었다(사진) 그가 만든 연극이 원작인 4인 드라마 ‘카니지’ 홍보의 일환이었다. 작달막한 키의 폴란스키는 당시 78세라는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고 에너지가 가득했다. 장난기 짙은 약간 쥐 상의 아이 같은 얼굴에 총기가 번득이는 눈을 한 그는 쾌활하고 유머와 위트가 있었다. 매우 솔직해 모든 것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는 할리웃 귀환 의도에 대해 “요즘은 할리웃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할리웃의 친구들과 단골 식당이 그립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운명론자일지도 모른다면서 “내가 할리웃에 계속해 있었다면 내 생애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폴란스키는 도망자로서의 자기신세를 자조하면서 “여러분들이 ‘카니지’로 내게 골든 글로브상을 줘도 난 할리웃에 가지 못하니 일찌감치 다른 사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능청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젊음의 이유를 일단 유전자 탓으로 돌린 뒤 “스포츠하고 좋은 음식 먹고 시가를 빼고 금연하기 때문”이라고 그 비결을 고백했다. 폴란스키는 이어 반세기가 넘도록 영화를 만드는 동기의 원동력을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도전정신”이라며 “그러나 작품의 주제가 날 움직여야한다”고 덧 붙였다. 폴란스키의 아내는 배우인 에마뉘엘 세녜(50)로 폴란스키는 아내와 해리슨 포드를 사용해 서스펜스 스릴러 ‘프랜틱’을 만들었다.
유대인인 폴란스키는 파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폴랜드로 이주했다. 2차대전이 나면서 그의 부모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갇혀 어머니는 개스 처형됐다. 그 후 폴란스키는 크라카우의 유대인게토를 탈출, 시골을 전전하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선한 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남았다.
폴란스키의 많은 영화들이 보는 사람 심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데는 그의 이런 어린 시절의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또 할리웃에서 활동할 당시인 지난 1969년 임신한 아내로 배우인 샤론 테이트(26)가 현재도 수감 중인 맨슨가족에 의해 살해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미국의 법이 이제 그만 관용을 베풀어 폴란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할리웃에 돌아와 탁월한 재주와 실력을 발휘해 만든 영화를 보고 싶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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