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2월 16일 화요일

말러의 아다지에토



사랑을 하면 모두 시인이 된다고 하더니 폴과 에스테르가 각기 대학생과 여고생 때 만나 사랑에 빠진 10년간 서로 나눈 연애편지의 내용이 구구절절이 시다. 폴이 에스테르에게 ‘너의 존재는 내게 너무 크다. 마치 산처럼’이라고 고백했을 때 폴에게 에스테르의 존재는 무중력의 무게였을 것이다. 
폴과 에스테르는 오는 3월18일에 개봉될 프랑스의 아르노 데스플르샹 감독의 ‘나의 황금시절’(My Golden Years)의 주인공들로 둘을 보고 있자니 이젠 내게서 멀리 떠난 청춘의 탐스러움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아, 청춘은 아름다워라!
오는 14일은 그동안 게을리 하던 고백성사를 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밸런타인스 데이다. 초컬릿보다 더 달콤한 것이 러브 레터다. 매시브 어택이 ‘패라다이스 서커스’에서 노래했듯이 ‘사랑은 그것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에겐 죄와도 같아서’ 사랑은 고백을 해야 속이 풀리게 마련이다. 
요즘은 인터넷 세상이어서 아마 이번 밸런타인스 데이에도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로 러브 레터를 주고받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러브 레터는 잉크에 펜을 찍어 종이에 적어야 감정이 제대로 호흡한다. 
빅토리아(제니퍼 존스)가 얼굴도 모르는 알란(조셉 카튼)에게 사랑에 빠진 것도 알란이 이렇게 써서 보낸 편지 탓이다. 영화 ‘러브 레터스’(Love Letters·1945)의 주인공 알란은 2차 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우인 로저를 대신해 로저의 여자 빅토리아에게 연애편지를 보낸다. 빅토리아는 순전히 이 편지 때문에 로저와 결혼하는데 그러니까 빅토리아가 사랑한 남자는 로저가 아니라 알란이다.
‘러브 레터스’는 통속적인 여성 취향의 신파극으로 내용보다 아름다운 것은 빅터 영이 작곡해 오스카상을 탄 주제가다. ‘나는 줄마다 다 외우고 있어요/나는 당신이 사인한 이름에 키스를 하지요/달링, 그리고 난 다시 처음부터 읽어요/바로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온 사랑의 편지들을’. 이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에타 제임스 그리고 딕 헤임스와 냇 킹 코울 등 많은 가수들이 불렀다.
‘러브 레터스’는 프랑스의 에드몽 로스탕이 쓴 희곡 ‘시라노 드 벨즈락’이 원전이다. 코가 너무 큰 검객시인 시라노는 눌변의 크리스티앙을 위해 그가 사랑하는 록산에게 뜨거운 연서를 보내고 어둠 속 록산의 발코니 아래서 사랑의 고백을 유수처럼 쏟아놓는다. 록산은 나중에 가서야 자기가 사랑한 남자가 시라노였음을 깨닫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연극은 비극인데 미국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시라노 얘기는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좋은 것은 각기 호세 퍼러(시라노로 오스카 주연상 수상)와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주연한 것과 스티브 마틴이 나온 현대판 시라노 ‘록산’이다.
러브 레터라기보다 회한과 미련과 그리움의 자기 고백이라고 해야 할 편지를 쓴 여자가 리사다. 리사(조운 폰테인)는 비극적으로 아름다운 ‘모르는 여인의 편지’(Letter from an Unknown Woman·1948)의 주인공이디. 슈테판 즈바이크의 중편소설이 원작으로 틴에이저인 리사는 비엔나의 같은 아파트에 이사 온 핸섬한 콘서트 피아니스트 슈테판(루이 주르단)을 본 뒤 평생 그를 사랑하게 된다. 
리사는 성장해서도 슈테판을 사랑해 그의 아들까지 낳지만 슈테판은 오랜 세월 동안 몇 차례 리사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리사를 전연 기억 못한다. 그리고 리사는 죽음의 병상에서 자신의 변치 않는 슈테판에 대한 사랑을 적는다. 편지는 리사가 죽은 뒤 슈테판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유부녀 레즐리(베티 데이비스)가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편지’(The Letter 1940-서머셋 모음의 연극이 원전)에서 질투에 눈이 멀어 총으로 쏴 죽인 자기 정부 제프에게 보낸 편지도 러브 레터라고 하겠다.   
연애편지를 모래 속에 손가락으로 쓴 것도 있다. 팻 분은 ‘러브 레터스 인 더 샌드’에서 ‘우리가 함께 모래 속에 쓴 러브 레터를 물결이 쓸어갈 때마다 난 울었는데 당신은 웃었다’면서 ‘지금은 파도가 모래 속에 쓴 편지 위로 부서질 때마다 내 찢어진 가슴이 고통한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분의 음성이 너무 달콤하고 고와서 나는 이 상심의 노래를 들어도 별로 가슴이 안 아프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러브 레터는 구스타프 말러가 자기 아내가 된 알마(사진)에게 보낸 음악편지일 것이다. 말러는 교향곡 제5번의 제4악장 아다지에토를 알마에게 보내는 연서로 작곡했다. 10분 정도 계속되는 이 악장은 매우 느린데 말러의 비탄에 가까운 동경과 사랑이 천상의 것처럼 고결하고 아름답게 음표로 쓰여졌다. 이 음악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1971)에서 스산할 정도로 아름답게 사용됐다. 해피 밸런타인스 데이!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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