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로마를 찾았던 2명의 수녀가 사흘간이나 정전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가 구출된 사건이 있었다. 각기 58세와 68세인 아일랜드와 뉴질랜드 출신의 두 수녀는 지난 5일 바티칸 근처의 한 수녀원 기숙사 4층에서 엘리베이터에 타고 아래로 내려가던 중 정전이 발생, 층과 층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사고 당시가 금요일 오후여서 기숙사에는 두 수녀 외에 아무도 없었고 휴대폰도 기숙사 방에 두고 와 구조를 청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사고가 난 주말 로마는 무더운 여름 날씨로 기온과 습도가 높아 두 수녀는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더위 및 어둠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두 수녀는 심한 갈증과 탈수증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들의 소변을 마시면서 폐쇄된 공간에서 사투를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발견된 것은 사고 후 사흘이 지난 월요일(8일) 오전으로 여성 청소부에 의해서였다. 구출된 두 수녀를 돌본 의사는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두 수녀가 믿는 성모 마리아가 그들을 구해줬을 것이다.
나는 이 뉴스를 읽으면서 실제 사고를 똑 닮은 프랑스 영화가 생각이나 혀를 찼다. 24세의 루이 말르가 감독으로 데뷔한 필름느와르 스타일의 흑백 치정 살인극 ‘사형대의 엘리베이터’(Elevator to the Gallows·1957)이다.
콱 씹으면 짙은 초컬릿 맛이 날 것 같은 나태한 모습의 잔느 모로와 모리스 로네(‘태양은 가득히’)가 공연하는 이 영화는 누벨 바그의 기초가 된 것으로 특히 영화에서 이미지와 음악의 관계를 독특하고 완벽하게 새로 정립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음악은 마침 영화촬영 당시 파리를 방문 중이던 미국의 재즈 트럼피터 마일스 데이비스가 말르의 부탁을 받고 즉흥적으로 작곡했다. 한 재즈 평론가는 마일스의 음악을 듣고 “당신이 들을 수 있는 가장 고독한 트럼핏 소리이니 듣고 울어라”고 찬양했다.
여름철 파리. 흐린 토요일 오후 7시. 공중전화 부스 안의 모로의 감은 두 눈을 화면 가득히 클로스업하던 카메라가 서서히 모로의 헤픈 듯 두툼한 입술을 핥고 내려가면서 모로의 심한 안개처럼 가라앉은 음성이 들린다. “나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주 템므(사랑해요). 해야 해요. 난 당신을 안 떠날 거예요. 쥘리앙.” 이 때 트럼핏 소리가 비가조로 흐르면서 불길하고 로맨틱한 영화의 분위기를 전조한다.
나는 이 영화를 어렸을 때 보면서 단숨에 모로에게 빠져 들었었다. 컬을 한 금발에 하이힐을 신은 그녀가 투피스 상의의 깃을 올린 채 정부 쥘리앙을 찾아 밤새 비 오는 샹젤리제 거리를 마치 유령처럼 헤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런 여자를 갖기 위해서 살인마저 저지르는 쥘리앙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모로는 피곤해 보여 더욱 유혹적이다. 그늘진 얼굴, 미소 잃은 눈동자, 양끝이 아래로 처진 농염한 윗입술 그리고 약간 거슬리는 듯한 나른한 음성. 그녀는 마치 세상을 다 산 여자처럼 나태해 보여 보는 남자를 녹작지근하게 만든다. 권태와 피로가 선정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여자로 얼굴 안에 연기가 담겨 있는 배우다.
어두운 분위기와 심리적 깊이를 지닌 영화는 모로를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으로 그녀는 후에 말르의 애인이 됐다. 플로랑스(모로)는 공중전화로 쥘리앙에게 군수품 제조회사 사장인 나이 먹은 남편 시몽을 죽이라고 조른다. 시몽의 부하직원으로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싸운 외인부대 출신인 쥘리앙은 밧줄을 타고 자기 사무실 위층에 있는 사장실에 침입, 권총으로 시몽을 살해한다. 이 때 창밖으로 검은 고양이가 지나간다.
이어 쥘리앙이 회사 앞에 세워둔 신형 컨버터블에 타 시동을 걸고 둘의 단골카페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플로랑스에게 가려는 순간 자기 사무실 창밖에 걸린 밧줄이 눈에 띈다. 쥘리앙이 밧줄을 회수하려고 다시 회사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올라가는 순간 경비원이 건물의 전원을 끄고 퇴근한다. 꼼짝 없이 엘리베이터에 갇힌 쥘리앙(사진.)
이 때부터 쥘리앙이 엘리베이터에서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긴장감 가득한 장면과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쥘리앙을 찾아 텅 빈 파리 시내를 밤새 헤매고 다니는 플로랑스의 허탈한 모습이 교차된다. 트럼핏 소리가 연무처럼 무드를 뿜어내는 가운데 앙리 드카에가 찍은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어두운 파리의 밤이 몽환적이다.
매우 절제된 영화로 플로랑스의 하이힐 발자국 소리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같은 실제 음을 빼고 영화는 거의 침묵 속에 진행된다. 이 침묵을 깨고 플로랑스가 자기 내면의 언어를 독백으로 토해 낸다. “밤새 미친 여자처럼 찾아 다녔어요. 발이 차가워요”라며 자신의 피로와 절망감을 고백한다. 쥘리앙은 로마의 두 수녀처럼 월요일 아침이 돼서야 엘리베이터에서 빠져 나오나 악인은 지옥으로 간다. 주말 엘리베이터 조심하세요!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