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선임병들의 지속적인 가혹행위로 윤모 일병이 숨지면서 지금 나라가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 나도 옛날 군시절 모진 시련을 겪긴 했지만 요즘에 비하면 원시시대나 다름없던 그 당시에도 졸병이 기합 받고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한국 군대는 완전히 시대를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뒤 늦게 병영문화를 개선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지만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 문제다.
군대란 한 마디로 말해 유사시 사용할 살상무기를 양성하는 곳이다. 따라서 엄격한 통제가 불가피한데 이 통제의 수단으로 잘 못 쓰여지고 있는 것이 소위 기합이다. 기합을 주는 이유는 군기를 잡아 정신통일을 시킨다는 것. 그러나 내 경험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가학적 폭력욕구의 발로일 뿐이다. 기합이라는 말의 어원이 일본어 이듯이 한국 군대의 기합도 일제 잔재의 하나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는 가혹한 훈련교관이 신병들에게 “너희들이 아는 것을 다 잊어버려. 너희들은 군인이 되는 거야”라고 훈시하는 장면이 있다. 이 훈시는 인간성을 획일화하려는 구령으로 항상 자유를 요구하는 개체들은 이 같은 구령에 반동하게 마련이다.
고다르의 영화 ‘남성 여성’의 폴도 군생활을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파리의 카페에서 만난 마들렌에게 자기가 막 16개월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나왔다며 말을 건다. 이에 마들렌이 폴에게 “군생활 재미있었어요”라고 묻자 폴은 “그것은 권위주의와 복종으로부터 상대적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이었다”고 대답한다.
윤 일병의 뉴스를 읽다보니 자연 내 군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대학을 나온 뒤 학교 선생을 하다가 뒤늦게 군에 징집됐다. ‘영감’소리를 들어가며 34개월간 복무를 했는데 그 때만해도 군에 갈 때면 ‘3년간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조언을 들었었다.
손목이 빠져 나갈 것 같은 사역을 하면서 8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빠따’를 맞고 말뚝하사의 워커발로 정강이를 채이다가 밤에는 동해안 보초를 섰다. 서러워 눈물까지 흘렸다. 군대는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으로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러나 나의 고생은 아로운과 가지 그리고 프루의 그것에 비하면 말캉한 것이다. 방송작가 한운사의 라디오 드라마가 원전인 김기영 감독의 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사진)의 주인공 아로운(김운하)은 일제강점기 때 학병으로 군에 끌려가 일본인 고참 하사관들에 의해 매일 같이 초죽음이 되도록 기합을 받는다. 그러나 아로운이 이에 굴하지 않자 최고 악질 하사관(이예춘)은 아로운에게 자기 군화바닥에 묻은 똥을 핥아 먹으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오래 전에 한국의 논산훈련소 중대장이 변소청소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훈병들에게 변기의 똥을 찍어 먹도록 시켜 그 때도 나라가 떠들썩했었다. 이 중대장은 아마도 이예춘의 흉내를 냈던 것 같다.
코미카와 준페이가 쓴 반전소설이 원작인 영화 ‘인간의 조건’의 주인공 가지(타추야 나카다이)도 만주전선에 투입돼 단지 ‘인간적’이라는 이유 하나로 고참 하사관들에 의해 온갖 가혹한 기합을 받는다. 가지는 비인간지대의 군에서 인간성을 지키다가 그 벌의 하나로 똥지게를 나른다.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졸병 프루(몬고메리 클리프트)도 고집불통이어서 말뚝 하사관들로부터 별의별 기합을 다 받는다. 완전무장 구보에 체육관 바닥 물걸레질 그리고 접시 닦기에 주말 외출금지 처분을 받지만 미국이어서 구타는 안 당한다.
윤 일병의 사망 외에도 최근 선임병들의 기혹행위에 못 견뎌 2명의 젊은이들이 자살을 했고 그 전에는 임모 병장이 집단 왕따에 대한 화풀이로 동료들을 사살한 사건도 있었다. 이들 중 많은 병사가 소위 군생활 적응에 문제가 있는 A급 관심병사들이어서 징병제 대신 자원입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나는 젊은 병사들의 자살 뉴스를 읽으면서 그들의 이른 죽음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생명 경시에 충격을 느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지난 5년 사이 자살이 군대 전체 사망의 64%를 차지했다. 그리고 자살이 한국 청년층의 최대 사망원인이라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물질적 풍요로 내적 심지가 약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군생활을 하면서 탈영을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인물인 프루의 고집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월요일마다 운동장에서 조회가 있었다. 어느 날 조회에서 영어선생님이 우리에게 “너희들은 프라이드를 가져라”라고 한 말씀 하셨던 기억이 난다. 자존이란 생명을 아끼면서 그것과 투쟁하는 것이다.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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